2007년 6월 4일 근대문화유산 등재 심사 사흘 전 구염전에 있던 소금창고 중 3동만 남겨놓고 ㈜ 성담에 의해 파괴되었다. 소금창고를 복원해야 한다는 시민사회의 결집으로 복원 운동이 시작되었다. 소금창고와 인연은 사진을 담기 시작한 2004년부터였다. 그동안 담았던 소금창고를 사진으로 복원한다는 일념으로 1호부터 45호까지 소금창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소금창고가 있던 자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사진을 들고 걷고, 방향을 찾았다. 사진 속에 있는 45동의 소금창고의 자리들을 찾는데 2년 가까이 들었다.
2007년 6월 24일 시흥시민 뉴스에' 1호 입구 소금창고'를 시작으로 2009년 12월 27일 44호 소금창고까지 연재했다. 마지막 남은 45동 ‘새우개’ 소금창고를 못했다. 복원은 이미 멀리 떠났다. 복원을 위해 노력한 시간들은 기록으로만 남게 되었다. 45동의 소금창고를 쓰지 못한 것은 복원이 되지 않을까 하는 미련 때문이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44동을 마지막 연재하고 벌써 10년이 지나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45동의 소금창고를 정리한다. 그동안 연재했던 시흥시민뉴스는 시흥장수신문으로 바뀌었다. 소금창고가 있던 곳은 솔트베이 골프장과 시흥월곶에코피아 등이 들어섰다. 지금도 이곳은 변화하고 있다.
45호 소금창고를 만난 것은 2006년이었다. 포동 새우개 마을을 들어서는 입구 방향에 있었다. 염부를 지냈던 분은 그곳에는 원형 소금창고였다고 했다. 마을과 가까워서 주민들이 기억하는 소금창고는 안이 원형으로 되어있었고 소금창고의 크기도 컸다고 했다.
'45호 새우개 소금창고'를 다시 만난 것은 의외의 장소였다. 시흥문화원에서 시흥의 옛 사진전을 할 때 이 소금창고의 모습이 있었다. 반가웠다. 사진 설명에 “1991년 10월 4일 포동 우회 도로 개설공사 준공식” 사진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좀 더 늠름한 소금창고의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사진이 주는 기록의 힘이었다.
사진에 남겨진 1호부터 45호까지의 소금창고들을 바라보았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소금창고들과 시흥갯골생태공원에 있어서 파괴를 면한 40호와 41호 소금창고는 연극 무대로 또는 전시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최소한의 무대 장식으로 되었다. 소금창고라는 그 자체만으로 이미 세상 가장 독특한 무대를 만들고 있었다. 현재 있는 소금창고 두 동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해 준비 중이라고 했다. 늦었을 때가 가장 빠르다고 했다.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지는 그런 문화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나기를 기원해 보았다.
2019년 현재의 시흥 갯골 사진을 담으며 마음이 쓸쓸해졌다. 그 아름답던 소금창고가 없음에도 시흥에서 가장 빛나는 장소가 시흥 갯골이기 때문이었다. 현재의 시흥 갯골을 온전히 지켜야 하는 이유인듯했다. 후대의 아이들도 이 아름다운 장소를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45호 소금창고를 끝으로 연재를 마친다. 2007년 1호부터 2019년 45호 소금창고까지 12년이 걸렸다. 소금창고와 함께한 갯벌, 게, 새, 두꺼비, 창고의 벽, 바닥. 타일. 칠면초, 갈대, 방게, 구름, 달, 별, 그 바람들까지 모두 고맙습니다. 인사를 했다. 구염전에서 아름다웠던, 마음 아팠던, 자유로웠던, 시간들이 함께 흘렀기 때문이다. 가장 힘들던 시간은 빛나던 시간과 함께 시소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삶이 늘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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