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염전 소금창고 / 임경묵
- 최영숙 선생님께
포동 옛 염전 소금창고가
얼마 전부터 간판사업에 손을 댔다
무담보 싼 이자 긴급자금대출 간판이
간밤에 허물어진 입구로 들어앉더니
아파트형 공장도 분양한다고
플래카드가 온종일 모가지를 꼰다
푸른 페인트칠 된 전화번호들은
제 몸을 비틀면서 서로 키 재기 하듯
소금창고 바람벽을 바락바락 오르며
풍어豊漁를 그리다 지친 새우개 마을로
한밤중 불쑥 이웃 다방을 불러들이고
만선滿船처럼 빨간 피자 통을 풀어놓는데
증발의 기억이 새겨진 녹슨 타일만이
목울대 꺾인 갈대숲을 달랜다
소금창고는 비쩍 마른 기둥을 후비던
서투른 못대가리도 제 살로 보태놓고
바람벽을 빌려주고 벌어들인 돈으로
밤마다 처마 밑에 쓰러진 함초를 일으킨다
구름 사이로 드러난 달빛을 끌어들여
오래전 바다에서 올라와 무너진
밀물의 그림자를 가만히 어루만진다
상처 난 물 주름을 펄 속에 부비던 갯골도
제 투명한 속살을 보려고 달빛에 젖는데
그 환한 달빛에 놀라
탁,
탁,
탁,
숭어 떼처럼 뛰어오르는 소금의 유충들
*2007년 6월 시흥 옛 염전에 남아있던 40여개 애틋한 소금창고가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졌습니다. 무지한 개발논리와 이기주의는 십 수 년의 애환과 소금기 묻은 추억들을 하루아침에 무참히 무너뜨렸습니다. 눈시울 붉히며 멍멍한 가슴으로 텅 빈 그 자리에 맑은 술 한 잔 부었을, 오랫동안 소금창고와 한몸이었던 시흥의 사진작가 최영숙 선생님께 이 부끄러운 시를 드립니다.
수주문학상을 수상한 소래문학회의 임경묵 시인이 [수주문학] 2007/ 제4호에 발표한 시이다.
소금창고를 무참히 떠나보내고 난 뒤에 수주문학에 실린 “옛 염전 소금창고” 시를 보면서 고맙고 미안했다. 소금창고를 지켜주지도 못하고 외사랑만 했던 사람은 이 시를 받기에는 너무도 면목없고 무안했기 때문이었다. 소금창고를 사진에 담았던 사람은 소금창고들이 2009년 6월 4일 파괴되고 한동안 어찌할 바를 몰랐다.
▲ 소금창고들이 파괴되기 전의 모습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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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금창고들이 파괴되고 난 후의 모습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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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되된 소금창고들에 한 잔 술을 붓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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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상이 깊었다. 2007년 6월 9일 글을 썼다.
[삶의 한 부분이 무너졌다.]
최영숙
한 시절이 갔다는 것
이제는 정말 끝났다는 것
더 어찌해볼 수 없다는 것
기대할 것이 추억밖에 없다는 것
너와의 시절이 내 삶에서 빛이었다는 것
그리하여 행복했다는 것
그것을
늘 가슴속 깊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네가 무참히 부질 때
나는 잠을 잤고
네가 무참한 생을 마감한지도 모르고
관광버스에 있었다는 것
그것이
너의 사랑에 대한 나의 답이었다
네게 술을 부었다
내게 영원히 남겨진 것은
사람도
친구도
소금창고도
모두 생명을 다한 뒤였다
이것이 내 삶의 진정한 슬픔이었다
소금창고 너를 평생 기억하고
사진 속에서나마 너의 아름다움을 다시 확인하고
너의 부재가 불러오는 아쉬움과 절망감을 다시 확인하는 일
내게 남겨진 숙명이며 업보이다
진정 사랑했다
정말 미안하다
지켜주지 못해서
그 많은 소금창고들이 어느 날 파괴되고는 한동안 깊은 우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4년 가까이 정들었던 소금창고들이 어느 순간 파괴되어 사라진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삶의 한 부분이 무너진 느낌이었다.
▲ 43째 '현수막' 소금창고의 모습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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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산대교로 가기 전에 있었던 이 소금창고는 광고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 부동산 업자들이 현수막을 걸어 놓고는 했다. 처음에는 한 장이 걸려있었다.
광고 효과가 좋았는지 나중에는 주렁주렁 업종도 다양하게 현수막들이 소금창고를 전면 도배를 했다.
임경묵 시인은 지나는 길에 월곶으로 향하는 방산대교를 건너기 전에 서 있었던 43호 '현수막' 소금창고를 만났던 모양이었다.
시인에게는 시로 남겨졌고 사진을 담는 사람에게는 사진으로 남겨졌다.
비단 현수막을 거는 것은 이 소금창고 만이 아니었다. 43호 '현수막' 소금창고와 반대 방향인 월곶 방향에서 방산대교를 건너기 전의 1호 소금창고에도 현수막을 걸어놓고 있었다. 현수막을 달고 있는 소금창고를 보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아 쓸쓸한 만년을 보내는 것도 서러운데 좌판을 벌여 놓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 '현수막' 창고 갈대 앞에 서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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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묵 시인의 시에 대하여 수주문학/ 유영자 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사라져 가는 것, 낡은 것들, 오래됨에의 비애가 인다. ‘간판사업’, ‘간판사업’, ‘긴급자금대출’, ‘아파트형공장도 분양한다고’, ‘플래카드’, ‘빨간 피자통’,이 상징하는 거센 물결로 치고 들어오는 새것들의 진입을 전 28행 12행까지 객관적인 시각으로 전개하다가 그 다음 행 ”증발의 기억이 새겨진 녹슨 타일만이/목울대 꺾인 갈대 숲을 달랜다“로 시의 정조는 쓸쓸해진다.
새로운 물결 앞에 낡은 것들은 그가 지닌 가치에 앞서 낡은 것 자체로 새로운 물결 앞에서 속수무책이라고 역사는 말한다. 정신적 가치의 전동은 미약하나마 제 자리를 숨죽여 지키고 있지만 언제나 발전이라는, 개발이라는 이름 앞에 무력하다.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진 소금창고는 아픔이다. “상처난 물 주름을 부비던 갯골도 / 제 투명한 속살을 보려고 달빛에 젖는데/ 그 환한 달빛에 놀라/ 탁, 탁, 탁, 숭어떼처럼 뛰어오르는 소금의 유충들”, "정신의 가치를 이어줄 소금창고를 잃은 분노로 존중받지 못하는 현실에 무수한 유충들은 이 밤도 뛰어오르고 있다고 시인은 소중한 것을 지켜내지 못하는 현실을 깨우고 있다" 고 했다.
▲ 207년 7월의 창고가 있던 자리 모습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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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이곳의 풍경은 이곳에 소금창고가 있었다는 것은 나뒹구는 소금창고 잔해들로만 겨우 알 수 있었다.
▲ 2009년 11월 43번째 '현수막' 창고 앞자리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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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의 풍경은 또 변해 있었다. 다른 소금창고들은 무너지거나 파괴된 장소나마 보존되었지만 이곳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이곳은 매립돼 갈대들이며 이곳의 생명들은 모두 사라지고 운동장처럼 변해 있었던 것이다.
운동장처럼 만들어진 이곳에는 컨테이너 창고들이 놓여 있었다. 그 또한 분양사무실에서 쓰인 듯 ‘분양사무실’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 2009년 11월의 43번째 창고의 옛자리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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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전탑만이 이곳이 43호 ‘현수막’ 소금창고가 있었던 곳이라고 말할 뿐이었다.
임경묵 시인의 ‘옛 염전 소금창고’를 보면 70여 년을 버텨온 소금창고에 현수막들을 주렁주렁 달아서 그들의 세월을 애써 외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소금창고와 함께 70여 년을 같이 보낸 포동의 오랜 이웃들인 갈대숲, 타일, 바람, 달빛들은 서로를 비며 위로한다.
“서투른 못대가리도 제 살로 보태놓고” “함초를 일으킨다” “달빛도 끌어들여 밀물의 그림자를 가만히 어루만진다” 고 한다. 어릴 시절 배가 아프면 엄마가 쓰다듬어 주시던 손길이 느껴지는 듯했다.
“상처 난 물 주름을 펄 속에 부비던 갯골도
제 투명한 속살을 보려고 달빛에 젖는데
그 환한 달빛에 놀라
탁,
탁,
탁,
숭어 떼처럼 뛰어오르는 소금의 유충들“
무너지고 파괴된 소금창고들의 그 깊은 상처들을 투명한 펄 속에 비어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유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듯했다.
숭어 떼처럼 뛰어오르는 소금의 유충들처럼 무너지고 파괴된 소금창고들이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뛰어오르는 날들이 빠른 시일 내에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임경묵 시인의 시를 보면서 시란 어떤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생각을 했다. 파괴된 소금창고들도 토닥이며 어루만져 주고 파괴된 소금창고를 보면서 다친 사람의 내상까지도 가만가만 치유하는 그의 시를 만났다. 고맙고 감사한 일이었다.
시는 시인의 손을 떠나면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시인의 더 깊은 속내를 모르는 사람이 자신의 잣대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그 또한 시를 대하는 독자의 내재된 마음속 길을 따라가는 것이기에 지금으로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한 번 귀한 시를 주신 임경묵 시인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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