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질, 사육신 밀고한 공으로 말 한 필 받다

최영숙 | 기사입력 2007/02/03 [09:31]

김질, 사육신 밀고한 공으로 말 한 필 받다

최영숙 | 입력 : 2007/02/03 [09:31]
 
 
 
 
 
 
 
 
 
 
 
 
 
 
조선왕조실록 세조 2년 (1456) 7월 10일(정축) 

좌익 공신 김질에게 말 한필을 하사하다.
 
세조 2년 6월2일 단종복위운동은 김질의  밀고로 발각되었다. 사육신을 포함한 많은 충신들이 목숨을 잃었다. 7월10일 김질은 충신들의 목숨 값으로 좌익 공신이라는 이름과 말 한필을 하사받았다.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은 간략했다. 기록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 사육신묘     © 최영숙

 

" 한강 남쪽 강변에 네 무덤이 있고, 각기 자그마한 표석에 성씨만을 쓴 것이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육선생이라고 하는데 무덤 둘은 없다. '성씨'라고 한 것은 바로 선생(성삼문)이다. 또 은진 땅에 하나의 무덤이 있으며 장송이 무덤 곁에서 자란다. 주민이 가리켜 말하기를 '선생의 사지 가운데 하나를 순시하다가 은진현 관아의 뜰에 이르렀을 때 그것을 여기에 묻고 물에 떠내려갔다고 핑계를 댔다'는 것이다.  인종 때 연신중에서 육신의 일에 대해 말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로부터 잇달아 그 충절을 표창하라고 청한 사람들이 있었다. 선조 때에는 박선생(팽년)유복자의 후예가 드디어 녹용을 받았다.
 
                             [연산유허비 蓮山遺墟碑 ]  송시열 찬
 
사육신 사후 200여 년이 지난 뒤 그들의 충절은 모든 이의 존경과 함께 귀감이 되었다.
 
사육신은 누구인가?  숙부 세조에 의해 왕위를 강탈당한 단종의 복위운동을 주도적으로 하다 김질의 밀고로 죽음을 당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이렇게 여섯분을 말한다.  또한 남효온인 찬한 육신전약六臣傳略에 의해  사육신으로 전해진 것이다.
 
그러나, 이곳 사육신묘역에는 7기의 묘와  7기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처음부터 있던 박팽년, 성삼문, 유응부, 이개의 묘에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선생의 가묘를 추가되어 7기가 된 것이다.
 
세조2년 6월 8일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이개·하위지·성삼문·박중림·김문기·유응부·박쟁·송석동·권자신·윤영손·아가지·불덕 등이 결당하여 어린 임금을 끼고 나라의 정사를 마음대로 할 것을 꾀하여, 6월 초1일에 거사하려 하였으니, 그 죄는 능지 처사(凌遲處死)에 해당합니다. 적몰(籍沒)과 연좌(緣坐)도 아울러 율문(律文)에 의하여 시행하소서”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아가지와 불덕은 연좌시키지 말고, 나머지 사람들은 친자식들을 모조리 교형(絞刑)에 처하고, 어미와 딸·처첩(妻妾)·조손(祖孫)·형제(兄弟)·자매(姉妹)와 아들의 처첩은 변방 고을의 노비로 영속시키고, 나이 16세 미만인 자는 외방에 보수(保授)하였다가 나이가 차기를 기다려서 안치(安置)시키며, 나머지는 아뢴 대로 하라”하고 드디어 백관(百官)들을 군기감(軍器監) 앞 길에 모아서 빙 둘러서게 한 다음, 이개 등을
환열(轘裂)하여 두루 보이고 3일 동안 저자에 효수(梟首)하였다.
 
김문기(金文起)는 박팽년과 족친(族親)이 되었고, 또 친밀히 교제하였는데, 그때 김문기가 도진무(都鎭撫)가 되었으므로 박팽년·성삼문과 함께 모의하기를, "그대들은 안에서 일이 성공되도록 하라. 나는 밖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있으니, 비록 거역하는 자가 있다 한들 그들을 제재하는 데 무엇이 어렵겠는가?”하였다.  
 
김문기 선생이 혁명의 최대 요건인 병력동원의 책임을 진 영도자로 실려있음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1977년 9월 22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김문기의 순으로 원사육신을 환원 판정하였다.
 
유응부선생이 빠지고 김문기 선생이 새롭게 사육신에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유응부선생도 그날 같은 처형을 받았다. 남효온의 육신전이 틀린것이 아니다. 처음부터의 기록들을 자세히 보면 오히려 그 옥사의 와중에도 무인이기에 배제한것이 아닐까 싶었다. 

사육신 중에서 유일한 무인이었던 유응부 선생이 문신 중심으로 모의된 육신죄상六臣罪常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아마 유응부가 사림출신이 아니고 무인이었기 때문이 아닐런지 추측된다(韓國史大觀)
 
유응부는 무인이다. 용맹스럽고 활 쏘기를 잘 하였다.세종과 문종께서 모두 사랑하고 중시하여 벼슬이 2품에 이르었다. 병자년에 일이 발각되어 대궐의 뜰로 잡혀갔는데, 임금이 묻기를 "너는 무엇을 하려고 했는고?" 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연회를 청하던 날 일척의 칼로 족하를 없애고 옛임금을 다시 뫼시려 했으나, 불행히도 간인이 발고하고 말았으니, 제가 다시 무엇을 하겠소이까? 족하는 빨리 나를 죽여주시오"라고 했다. 세조가 성이 나서 꾸짖기를 "네가 상왕을 핑계대고 사직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렸다!" 라 하고는 무사로 하여금 살가죽을 벗겨서라도 사실대로 말하도록 하였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성삼문등을 돌아보고는 "남들이 서생들은 모의에 참여시키기에 부족하다고 하더니 과연이로다. 지난 날 연회를 청하던 날 내가 운검을 시험하려 했으나, 너희들이 굳이 말리며 '만반으로 완전한 계책이 아니다'고 하더니 오늘의 화를 당하게 되었구나. 너희들은 사람이로되 꾀와 수단이 없으니 축생과 무엇이 다르랴?"고 하였다. 임금께 말하길 "만약 사실을 알고자 하거든 이밖의 일은 저 수유들에게 물으소서"하고는 입을 다물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임금이 더욱 성을내 불에 달군 쇳덩이를 배 아래 올려 놓게 하여, 기름과 불이 엉겨 지글거리는데도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다. 서서히 쇠가 식기를 기다렸다가 쇳덩이를 집어 땅에 내던지며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너라!" 하면서 끝내 굴복하지 않다가 죽었다.
 
                                    <육신전六臣傳 >  남효온 찬중에서
 
사육신중 유일한 무인이었던 유응부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던 성삼문등을 썩은 선비라며 조롱하고 세조에게도 끝까지 굽히지 않고 죽었다. 유응부선생이 처음부터 거사에 참여했고, 끝까지 지조를 지키다 죽음을 맞았고 처음부터 사육신묘에 함께 모셔져 있었다. 그런데,   400년이 지난 뒤 1977년 근대학자들이 다시 당신은 사육신이 아니라고 한다는 것도 경우가 아닌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이름은 사육신묘에 7기의 묘와  7기의 신위가 모셔진 것이다.  어쩜 최선의 선택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보듯이 단종복위운동에 연좌되어 형을 받은 이들은 멸문지화를 당한 사육신 외에도 100여명이 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육신만이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다. 하다못해 단종이 복위될 것이라고 말했던 무녀 또한 죽음을 당했다. 

뒤에 금성대군까지 포함하여 왕족,문인, 무인, 상민, 천민예외가 없었다. 예외가 없었다는 것은 그만큼 단종의 복위운동이 광범위하게 민심을 얻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알았기에 그처럼 무자비했던 것이다.

 

▲ 사육신 하위지 묘와 어린이     © 최영숙


세종이 인제를 배양하고 문종 때에 성했는데 한 시대의 인눔을 논함에 있어 하위지를 첫째로 뽑았다.  단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니, 팔공자가 강성하여 인심이 위태롭게 여기고 의심하였다. 박팽년이 일찍이 위지에게 도룡이를 빌려 주었는데 시로써 답했다. 

 
대장부 할 일이야 고금이 같은 법
머리 위에서 백일이 환히 내려다보네
도룡이 보내심은 응당 뜻 있으려니
오호의 연우속에 함께 살자함일테지요
 
인심의 위태로움을 마음 아파했던 것이다.
 
400여 년이 흘렀다. 계집아이는  사육신묘에서 놀고 있었다.   두 어르신은 겨울 햇살을 맞으면서 한숨 잠을 자거나 신문을 뒤적이고 있었다. 평화로웠다.  

 

▲ 영월에 있는 단종의 묘     © 최영숙

 

 

사육신과 생육신,종친, 무녀까지 충절이라는 이름 하나로 힘으로 결집시키게 했던 단종은 영월에 혼자 누워있었다. 단종을 떠올리면 금방 쓸쓸해졌다. 그리고 떠오르는 단어는 '가엾다'는 것이다. 할아버지 세종, 아버지 문종 두 분 모두 배움이 깊었고 백성과  신하를 사랑한 현군이었지만, 손주를, 아들을 구하지 못했다.

이리와 같은 마음으로 악착같이 왕권을 뺏으려는 아들을 동생을 제지할 힘이 없었던 것이다. 두 분중에 한 분이라도 5 년정도만 더 살았으면 지혜로웠던 단종이 숙부를 제지할 수 있는 힘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역사에서 가정처럼 허무한것이 없건만, 어쩔 수 없이 생각하게 했다.
 
계란을 품듯이 사육신묘역의 나무들이 사육신 묘를 감싸 않았다.  멀리 보이는 한강이 시원했다.  시선이 쭉쭉 뻗어나갔다.  저 한강은 묵묵히 흘렀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의 물이 어제의 물이 아니듯 다시 만날 수 없는 역사라는 강물을 따라 오늘도 흐른다. 흐르는 물을 막을 수 없듯이 역사도 그렇게 오늘은 또 다른 얼굴로 흐를것이다.

우리는 잠시 머물던 순간을 기억할 뿐이다. 그러나 휘몰아치던 물결을 400여 년이 흘렀어도 그 물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가 있다.  우리의 피속에는 400여전에 흐르던 그 뜨거웠던 그분들의 피가 흐르는 강물처럼 그렇게 막연히 천천히 흐를 것이기 때문이다.  천천히 흐르다 가장 뜨거웠던 시점에 도달하면 큰 물길이 가슴을 쳤다. 숨을 고르고 한숨 떨어져 천천히 바라보았다. 
 
물길은 고요했고, 깊은 물 속은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     © 최영숙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된 충신들은 사육신, 칠육신이 아니었다. 수백분이 연루되어 목숨을 잃었다. 신분의 고위를 떠나  한마음으로 왕에게 충절을 바쳤던 분들이 무녀라고, 또 종이라고 격이 낮아질것은 없다.
 
또한,  목숨은 구했지만, 남편과, 아들을 잃고 양반의 신분에서 종의 신분으로 떨어져 오욕의 세월을 살았던 사건에 연루됐던  여인들의 삶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살아있음으로써 더 큰 오욕과 고통의 세월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밀고했던 김질은 좌익공신과  말 한 필을 하사받았다.
김질이 밀고를 할 적에는 말 한 필을 받자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백명 충신들의 죽음과 말 한 필'
역사는 그가 밀고의 댓가로 받은 말 한 필을 기억한다.

사육신묘를 돌아 나오면서 세조가 한 말이 생각났다.
"박팽년, 성삼문은 당세에는 난신이지만 후세에는 충신이라"

▲ 사육신묘와 서울 시내     © 최영숙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약 단종복위혁명이 성공했다면 세조는 수양대군이란 이름으로 천하의 역적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단종복위운동을 했던 분들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제거하려 했던 세조조차도 '후세의 충신'으로 인정했다.
 
의절사에 향을 올리면서 이곳에 모셔진 사육신 분들과 더불어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돌아가신 그 수많던 분들에게 향을 피우는 마음으로 경건히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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