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29일 3시 천안함 46 용사들의 안장식이 대전 현충원 803묘역에서 있었다.
2010년 4월 27일부터 29일까지 3일간 천안함 46명 용사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다녀왔다.
2010년 4월 27일 봄비가 가을비같이 추적이며 내렸다. 평택 2함대 사령부에 마련된 천안함 전사자 분향소를 찾았다.
체육관 앞에는 46위의 영정과 위패가 있었다. 현수막에는 “故 천안암 46용사 대한민국은 당신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하고 있었다.
| ▲ 이창기 원사의 외아들 이산을 위로하는 선생님과 학생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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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미귀환자 이창기 원사의 외아들 이산(14)을 위로하기 위해 도곡중 1학년 4반 학생들과 선생님이 조문을 왔다. 선생님이 산이를 위로해 주었다.
| ▲ 이산에게 힘내라는 글을 남기는 친구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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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은 “산이야 울지 말고 힘내!” -원일- “산! 힘내! 그리고 자랑스러운 해군의 이름을 너의 발명품으로 알려. 너의 아버지도 가 훌륭하게 자라는 보습을 지켜 주실거야.” 등 친구들이 산이에게 글을 남겼다.
"아들 정범구 네가 없다는게 미치겠다. 심장이 떨린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데 너에 모습을 보면 온 몸이 저려서 아무 생각을 할 수 없다. 부디 잘가. 엄마가 편히 보내줄께!!"
아들을 떠나 보내는 엄마의 편지를 읽는데 가슴이 막혀왔다. 장대 같은 아들을 졸지에 잃은 어미의 심정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 ▲ 아빠의 영정 앞에서 노는 아이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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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죽음을 실감할 수 없는 어린 자녀들은 국화를 들고 아빠의 영정 앞에서 놀고 있었다.
함께 근무했던 장병들이 세상을 달리한 동료에게 조문을 온 듯했다. 어머니는 자식을 대하듯 병사들의 손을 잡고 놓을 줄 몰랐다.
학위증과 명예졸업장 등이 영정 앞에 놓여 있었다. 그들이 지상에서 꿈꾸었던 세상은 이제 없었다. 영정사진을 보면서 한없이 쓸쓸해졌다.
2010년 4월 27일 평택2함대에 어둠이 찾아왔다. 밖으로 나오니 날이 개었다. 언제 비가 왔었냐는 듯 달이 떴다. 그러나, 이 달을 동료들과 보았던 46명의 평택2함대 소속의 장병들은 없었다.
2010년 4월 28일 비가 내렸다. 서울시청광장의 합동분향소를 찾았다. 쌀쌀한 기온에도 많은 참배객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 ▲ 연예인 차승원, 빅뱅 멤버 오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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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제철 사장을 지냈던 박태준 사장, 군인, 예비역장성, 배우 차승원, 빅뱅 멤버 등 다양한 사람들이 다녀갔다.
어린이들의 모습도 보였다.
올 봄은 날씨까지 궂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기다리며 조문을 했다.
이곳에서는 천안함 사진전도 함께 열리고 있었다.
| ▲ 장철희(19) 천안함 막내의 사진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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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희 이병(19)은 천안함의 막내로 해군에 입대한지 70여일, 천안암에 승선한지 8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편지들에는 “비 오는 날 빗방울이 떨어지는 날 천안함의 아들들을 기억합니다. 필승! 고이 잠드소서.”, “오호! 통재라! 젊은 그대들이여.” "철희야 미안해, 철희야 고등학교 생활을 함께 했는데 안타깝구나.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하다. 철희야, 너와 같이 보낸 학창시절 동안 잘해주지 못해서 안타깝고 네가 하고 싶었던 기관사의 꿈을 못 이룬 게 슬프다." 등 많은 사연과 글이 적혀 있었다.
2010년 4월 29일 안장식이 있는 대전 현충원으로 갔다.
308구역 건너에 한주호 준위의 묘가 있었다. 옛 동료와 동생이 비석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308구역에는 천안함 46용사의 구역이 따로 있었다. “이곳은 2010. 3. 26. 서해안 임무수행 중 희생된 천안함 46용사가 잠들어 있는 곳입니다.”라는 검은 돌의 기념석이 있었다.
46기의 빈무덤이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꽃다운 청춘장병들이, 어린 자녀들을 두고 세상을 떠난 46용사들이 영원한 안식을 가질 곳이 이곳이었다. 가슴이 서늘해졌다.
| ▲ 이창기 원사 영정과 유골함이 들어서다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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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기 원사의 영정과 유골함이 처음으로 308묘역으로 들어섰다.
308묘역은 커다란 슬픔에 빠져들었다. 어머니는 자식의 영정을 쓰다듬고 쓰다듬으며 단장이 끊어지게 자식을 불렀다. 불러도 대답 없는 자식은 영정 속에 갇힌 듯 했다.
자식 잃은 어미들은 떠나는 마지막 길에 목 놓아 울었다.
“내 새끼! 추운 바다에서 얼마나 추웠냐.”며 어미는 옷을 벗어 무덤을 덮었다.
| ▲ 어머니의 눈물을 바라보는 어린 아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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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먼저 떠나 보낸 아내는 통곡하고 있었다. 어린 아들은 어머니를 어떻게 위로 할지 몰라 태극기만 들고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46명의 안장식이 한꺼번에 치뤄지기에 관리인들은 유가족들의 안내를 돕기 위해 팻말을 들고 기다렸다.
| ▲ 김동진 영정사진을 들고 들어오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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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진의 영정과 유골함이 들어왔다.
어미의 통곡이 이어졌다. “동진아! 이 우찌 아까운 거 우찌 보낸다냐, 일찍 갈 거면 속이라도 썩이지. 어찌 이리 착했노. 에미는 어찌 살라꼬”하면서 통곡을 했다.
자식을 키우는 사람은 자식이 어떤 존재인지를 안다. 그 어미의 마음을 알기에 사진을 담으면서도 눈가가 젖었다.
홍성에서 온 이정석(66) 씨는 “너무 마음이 아프고 딱해서 왔다. 자식을 군대 보내본 사람이라서 저 부모들의 심정을 안다. 이제 자식을 이곳에 묻고 군복을 입은 군인들을 보면 다 자식으로 보이고 남편으로 또 아빠로 보일 텐데 그 세월들을 어찌 살꼬.”하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 ▲ 고 임재영의 영정을 들고 들어오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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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에서 살아남은 동료의 슬픔도 컸다. 천안함에서 생존한 동료가 고 임재영 영정을 들고 안장식에 들어왔다.
2010년 3월 26일 승조원 104명 중에서 46명의 사망자와 58명의 생존자로 생사가 갈렸다. 함께 선상에서 생활했던 친구들의 무덤을 보던 생존 장병이 친구의 비석을 안으며 소리 없는 울음을 쏟아냈다.
46기의 무덤이 생겼다. 온갖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한 무덤은 고요했다.
| ▲ 서울에서 48개의 초콜릿을 가져온 여인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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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왔다는 한 여인이 초콜릿 48개를 뜯었다. 2개는 한주호 준위의 무덤에 놓았다고 했다.
이 젊은이들이 추운데서 돌아가서 초콜릿을 먹고 뜨거운 기운을 느끼라고 가져왔다고 했다. 초콜릿은 “사랑합니다.”라는 표시라고 했다.
46 용사의 무덤 옆에 초콜릿이 하나씩 놓여졌다.
어린 자녀를 남겨두고 떠난 천안함의 아빠들,
| ▲ 유족들이 떠난 자리를 못 떠나고 있던 여인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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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에게 복받치는 슬픔을 안기고 떠난 연인들,
유족들이 떠나고 젊은 여인만이 남았다.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영영 움직일 줄을 몰랐다.
친구의 무덤을 찾은 장병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아들의 영정을 쓰다듬고 쓰다듬던 어머니의 손길을 멀리 두고 다시는 올 수 없는 곳으로 46명의 장병들은 떠났다.
| ▲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젊은 장병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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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젊은 장병들이 한 순간 목숨을 잃게 한 명확한 이유를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각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가장 빛나던 시절의 그 장병들은 떠났다.
든든한 집안의 가장이었던 그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던 자식들, 사랑을 키워가던 연인들이었던 그들이 왜 죽는줄도 모르고 죽었다면 이는 돌아간 영령들에게 차마 못할 일이다.
장례는 최고의 예우로 했다고 돌아간 영령들에게 말 할 수는 없다.
그들은 이미 그 바다에서 모든것을 잃었기 때문이다.
서두르지 않되 정확한 답을 이들의 무덤 앞에 알려줘야 할 의무가 살아남은 자들에게 남겨진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그 차가운 바다에 사랑하는 자신을, 가족들의 통곡을 함께 묻었던 그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정확한 원인을 알아야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에 맞는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식을 군대에 보냈던 어미의 마음으로 가슴이 아팠던 3일간의 기록이었다.
돌아오면서 마치 이웃집 아이처럼 익숙한 이름이된 상민이, 정훈이, 보람이를 비롯한 세상 떠난 분들의 영면을 기원했다.
또한, 깊은 슬픔에 젖은 유가족분에게 심심한 위로의 마음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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