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전설이 되어 그림 속으로 걸어간 화가, 고(故) 이만익 화가 영면에 들다-최영숙의 발길 따라 가는 풍경-
전 국민이 런던올림픽에 빠져 있던 지난 8월 9일 새벽(1시 57분). 88서울올림픽의 미술을 총지휘했던 화가 이만익(1938~2012)은 조용히, 그러나 ‘이만익답게’ 영면에 들었다. 향년 74세.
모자, 강, 복숭아나무뿐만 아니라 한국의 설화 등 한국적인 소재를 특유의 화법으로 그려내는 가장 한국적인 현대화가로 평가받는 이만익 화가는 1938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경기중학교 3학년 때인 1953년 제2회 국전에 <정동의 가을>과 <골목>을 출품해 입선했다. 중학생 신분으로 국전에 입선한 것이 문제가 돼 국전 출품 자격을 ‘대학 3학년 이상’ 조항으로 추가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국전은 이만익의 독무대였다. 대학 3학년이 된 후 다시 국전에서 특선을 하고, 1961년 졸업 뒤 1966년부터 <여념>, <하영>, <시장일우> 등의 작품이 국전에서 3년 연속 특선을 휩쓸었다.
이후 10년간 미술 교사를 하면서 모은 월급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했다. 파리 시절 초기에는 사회 부조리에 대한 환멸과 현대인의 소외감 등을 그렸다. 그러나 파리 화랑에서 ‘만드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그림을 그리는 것에 빠져 있다’는 비판을 듣고 그림을 그리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끊임없는 고민을 하게 되었고, 결국 서양을 모방하는 것이 아닌 한국적인 회화에 천착하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돌아온 뒤 한국적 소재로 한국적 미감을 통한 독자적인 그림 세계를 추구하기 시작했고, 한민족의 자화상을 그려낸 한국적 화가로 자리매김했다. 독특한 화풍과 특유의 한국적 감성으로 대중적 인기와 미술계에서의 입지를 동시에 얻을 무렵인 1988년 제24회 서울 올림픽 미술감독, 제8회 서울 장애인 올림픽 미술감독을 맡는 등 굵직하고 다양한 활동에 참여했다. 뿐만 아니라 국내 창작 뮤지컬 <명성황후>, <댄싱섀도우>의 포스터를 제작하는 등 다양한 화풍으로 대중과 만났다.
이만익 화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명성황후’는 뮤지컬 명성황후에 사용되어 일반인에게도 익숙한 포스터가 되었다.
8월 11일 오전 9시 30분 서울 삼성의료원 장례식장에서 고 이만익 화가의 발인식이 있었다.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 뒤 모란공원(남양주 화도읍)에 안장된다고 했다. 유족은 아내 김대화(69), 아들 이민겸(39), 딸 이민선(32) 씨가 있다. 아들 이민겸 씨가 조문을 받았다. 이 씨는 “아버님은 불교적인 색채의 그림을 많이 그리셨다. 만년에는 예수님도 그리셨다. 아버님이 아프신 와중에 기적적으로 깨어나셨을 때 기독교를 받아들이셨다. 어려서는 교회에 다니셨다”고 했다.
고인의 많은 동료, 선후배들이 서울추모공원에 함께 왔다.
이만익 화가의 대학 동창인 박한진(74) 화가는 “1957년에 입학해서 1961년에 졸업했다. 끝까지 작업한 사람이 많지 않다. 학교 다닐 때 그는 털썩 주저앉아 캔버스에 물감을 붙이고 긁어내기를 반복해서 그렸다. 그 당시는 만들었다. 아교칠 하고 안료를 아마인, 린시드 오일과 섞어서 물감으로 썼다”면서 “초기 대표작은 학과 청계천이다. 초기 작품들을 친구 화실에 맡겼는데 화실에 비가 새서 상한 것이 많았다. 프랑스 유학을 다녀오면서 그림이 바뀌었다. 설화나 전설 등에서 한국미를 끌어내면서 자기 스타일이 정착이 됐다. 그림을 그렇게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했다.
이광우(48) 씨는 “선생님 작품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안 된다. 근자의 전시회는 예술의전당 개인전과 조선일보 미술관 개인전을 보면 그분 작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박동진(51) 씨는 “앙가주망(Engagement: 사회참여, 자기구속이란 문학, 예술 등에서 정치나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작품에 반영하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한국 현대사의 격랑기였던 1961년 4‧19 직후 현실참여를 기치로 김태, 박근자, 안재후, 최경한, 필주광, 황용엽 등이 모여 만든 모임) 회원이신 선생님과 주로 야외 스케치를 같이 다녔는데 깐깐하시고 호불호가 확실했다”면서 “하지만 술도 좋아하시고 작품을 대하시는 태도는 진지하고 좋은 말씀 많이 해주셨다”고 이 화가의 생전을 회고했다.
박 씨는 또 “이 선생님은 유학을 다녀오신 뒤 청계천의 거친 표현처럼 전설, 신화 등의 그림이 정형화되었다. 우리 문학을 건드리고 역사를 표현하는 것이 좋았는데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나셨고 모든 면에서 박학다식하셨다”고 말하면서 “에고가 세서 그런 면에서 좋았는데 명성황후를 그릴 때가 특히 좋았다”면서 이 화가의 화풍을 일군 한국적인 정서에 깊은 존경을 표했다.
사유하는 모습의 반가사유상은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깊은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된 것이다. 깊은 사유를 길어내기 위해서는 오롯이 홀로였다. 단군신화와 삼국유사, 전설과 설화까지 가장 한국적인 그림을 그린 이만익 화가의 화풍이 4천여 년을 이어온 듯했다. 원근법이 없는 민화풍의 그림을 보면 너도 하나요, 나도 하나인 크기가 모두 같은, 평면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모란공원 묘원 2N 282번에 이만익 화가는 현대판 부도탑에 묻혔다.
까까머리 중학생으로 국전에 입선해 국전 출품 자격까지 개정하게 만든 이만익. 단군신화에서 부처, 예수까지 4345년의 인간사를 캔버스로 불러내 가장 한국적으로 그린 화가. 전설을 민화풍으로 그린 그가 이젠 스스로 전설이 되어 그림 속으로 영원히 걸어 들어갔다.
<저작권자 ⓒ 시흥장수신문(시민기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장례식, 이만익 화가 관련기사목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