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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30일 오전 10시, 서울 현대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는 한국 가요계의 거목 고(故) 반야월 선생의 장례식이 한국가요작가협회장으로 엄숙히 치러졌다. 반야월(96) 선생은 1917년 경남 마산 태생으로 본명은 박창호이다. 1939년 가수로 데뷔할 당시에는 '진방남'이라는 예명을 사용했으며, 이후 '추미림(秋美林)', '박남포'라는 이름으로도 수많은 곡을 발표했다. 1942년부터는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예명인 '반야월'로 본격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는 1950년 발표한 <울고 넘는 박달재>를 비롯해 1956년 <단장의 미아리고개>, <소양강 처녀>, <아빠의 청춘> 등 지난 70여 년간 5,000여 곡을 작사하며 국민의 애환을 달랬다.
| ▲ 발인전에 가족들이 마지막 인사를 하다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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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인에 앞서 유가족들이 빈소에서 고인에게 마지막 절을 올리며 눈물의 인사를 드렸다.
이날 장례는 고인의 업적을 기려 한국가요작가협회장으로 경건하게 진행되었다.
| ▲ 대한가수협회 회장 태진아 씨 조사를 읽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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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가수협회 회장 태진아 씨가 후배 가수들을 대표해 절절한 조사를 낭독했다.
"우리 가요계의 큰 별이 지셨습니다. 지난 73년간 가수로, 또 작사가로 활동해 오신 우리 가요계의 큰 어른 반야월 선배님께서 이제는 불러봐도… 울어봐도… 다시는 못 오실 그 길을 기어이 떠나셨습니다. 전체 후배 가수들의 미어지는 가슴을 모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반야월 선배님의 인생은 우리 가요사 그 자체였습니다. 1939년 데뷔 이후 73년이란 긴 세월 동안 <불효자는 웁니다>, <단장의 미아리고개>, <울고 넘는 박달재>, <소양강 처녀> 등 선배님께서 발표하신 주옥같은 4,000여 곡의 작품들은 우리 민족의 애환과 격동의 시기를 늘 함께해 왔습니다. 우리 한민족의 정서를 대변해 주셨으며, 우리 가요계의 역사는 선배님의 발자국 하나하나에 고스란히 담겨 왔습니다. 오늘 그 자랑스러운 가요계의 전설을 떠나보내며, 우리 후배들은 선배님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열정이 넘치는 음악인이셨던 반야월 선배님의 깊은 가요 사랑과 그 크신 발자취를 가슴 깊이 새겨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부디 물항라 고운 빛 비치는 그곳에서 편안히 영면하소서."
이날 빈소에는 500여 명의 추모객이 몰려와 가요계 큰 어른의 마지막 길을 눈물로 배웅했다.
장경주 작사가는 “반야월 선생의 이름은 '반달이 다시 온달로 돌아간다'는 뜻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늘 자신을 낮추셨던 선생님의 겸손함이 녹아있다. 선생님은 평생 후배들에게 거대한 정신적 지주이셨다”라고 회고했다.
| ▲ 가수 설운도 씨의 선창으로 '울고 넘는 박달재'를 추모객들이 부르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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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사가 김주명(68) 씨는 대표곡인 <울고 넘는 박달재>가 탄생하게 된 애틋한 비화를 들려주었다. 1948년 반야월 선생이 충주에서 공연을 마치고 제천으로 가기 위해 박달재 고개를 넘던 중, 마침 차 바퀴에 펑크가 났다고 한다. 궂은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차가 고쳐지기를 기다리며 밖을 보는데, 건너편에서 한 젊은 연인이 눈물로 이별하는 애절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이 어디인지 궁금했던 선생이 지나가던 촌로에게 묻자 "천동산 박달재"라는 답이 돌아왔다. 선생은 그 현장에서 영감을 받아 노랫말을 지었고, 그것이 오늘날의 <울고 넘는 박달재>가 되었다.
노래 가사에 나오는 '도토리묵'도 이 곡 덕분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고 한다. 또한 가사 중 '물항라'라는 표현은 반야월 선생이 고심 끝에 새로 조합해 만든 아름다운 단어다. '물들인 항라 저고리'라는 뜻으로, 파란 물빛처럼 곱게 물들여진 항라(亢羅, 명주 실로 짠 직물의 일종) 옷을 의미하며, 우리말 '물'과 한자어 '항라'를 합쳐 만든 선생만의 시적 언어였다.
장례식의 마지막 순서에는 가수 설운도 씨가 목이 메는 목소리로 <울고 넘는 박달재>를 선창했다. 그러자 식장에 참석한 300여 명의 추모객이 약속이라도 한 듯 다 함께 노래를 합창하기 시작했다. 식장은 이내 눈물바다가 되었다.
시 <울고 넘는 박달재> (작사 반야월 / 작곡 김교성 / 노래 박재홍)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는 님아 돌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 가소 도토리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박달재 하늘고개 울고 넘는 눈물고개 돌뿌리 걷어차며 돌아서는 이별 길아 도라지꽃이 피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금봉아 불러보나 산울림만 외롭구나
| ▲ 화장으로 모셔진 후 서울 추모공원에서 제천 박달재로 출발하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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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을 마친 고인의 유해는 평생의 숨결이 깃든 제천 박달재를 향해 출발했다.
| ▲ 제천의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비 앞에서 노래를 부르다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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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재 고개에 들어서자 '반야월 선생님, 영원한 제천인으로 영면하소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제천 시민 일동'이라고 적힌 커다란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고인의 유해와 추모 행렬은 박달재 노래비 앞에 멈춰 섰고, 그 자리에 모인 시민들과 함께 다시 한번 <울고 넘는 박달재>를 나지막이 불렀다.
이어 유해를 모시기 위해 제천시의 고찰 복천사로 들어섰다. 흰 옷을 입은 신도들이 고인의 가시는 길 위에 고운 꽃잎을 뿌리며 영면을 기원했다. 현재 제천시가 추진 중인 '한국가요사 기념관'은 백운면 박달재 관광지 내에 총사업비 42억 원을 투자해 1,000㎡ 규모로 건립될 예정이다. 여기에는 반야월 선생의 전시관을 비롯해 상설 공연장, 가요사 테마 체험관 등이 들어선다. 이를 위해 국비 16억 원을 이미 확보했으며, 오는 2013년 상반기 착공해 10월 개관을 목표로 하고 있다. 평생을 기록해 온 반야월 선생은 타계하기 직전인 2012년 3월 23일, 평생 아껴온 음악 관련 귀중 소장품 158종을 제천시에 무상으로 기증하며 아름다운 마무리를 보여주었다.
향후 한국가요사 기념관이 완공되면 반야월 선생의 유해는 그 자리에 수목장으로 영원히 안치될 예정이다. 기념관이 완공되기 전까지 고인은 이곳 복천사에 임시로 봉안되기로 하여, 이날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추모 제례가 봉행되었다.
식의 틈틈이 생전의 반야월 선생은 어떤 어른이었는지 오랜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가수 양부길(72) 씨는 “1960년대부터 선생님을 뵈었다. 1962년 내 데뷔곡인 <애수의 가을밤>을 작사해 주신 분이기도 하다. 반야월 선생님은 언제나 성품이 쾌활하셨고, 절대 남의 흉을 보거나 험담을 하지 않으시는 군자이셨다. 후배들의 노래를 평할 때도 여러 사람 앞에서 절대 망신을 주지 않고, 나중에 조용히 개인적으로 불러 따뜻하게 조언해 주셨다. 막상 가셨다고 하니 마음이 참 착잡하다. 우리 가요계 사람들은 선생님께서 백수(白壽)를 누리실 줄 알았다”라며 슬퍼했다.
가요 관계자 박상오 씨는 “평소 무척 인자하셨지만 가요 발전을 이야기하실 때는 대단한 카리스마가 있으셨다. 무엇보다 주위의 어려운 이웃과 후배들에게 늘 아낌없이 베푸셨던 큰 어른”이라고 회상했다.
고인의 딸 박희라(59) 씨는 자식의 눈으로 바라본 아버지를 추억했다. “아버님은 창작자이셔서 무척 예민하셨지만, 동시에 가족에겐 한없이 다정하셨어요. 유머 감각이 뛰어나셔서 옛날이야기를 정말 재밌게 해주셨죠. 옛날 악극단 시절 이야기인데, 기획자가 단원들 돈을 제때 안 주니까 단원들이 기운이 빠져서 연주를 '쿠웅~짝, 쿠웅~짝' 하고 늘어지게 했대요. 그러면 당시 주먹 좀 쓰던 김준구 씨가 과일칼을 뒷짐에 숨겨 들고 칼날을 아래로 달랑달랑 흔들으면서 악단 앞을 서성거렸대요. 그럼 무서우니까 단원들이 갑자기 '꿍짝 꿍짝!' 하고 엄청 기운차게 연주를 바꿨다는 일화를 웃으며 해주셨죠. 아버지는 악극단원들이 불만이 있어 보이면 그날 번 수익금 가방을 여관방에 통째로 쏟아놓고 '실컷 먹고 놀아라' 하실 만큼 호방하셨어요.
또 신세용 선생님이 살아 계실 때는 원로 가수들의 모임인 '만나리'에서 자주 어울리셨죠. 항상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건강하셨어요. 지인들과 커피를 마시거나 식사를 해도 상대방이 밥 두 숟가락 뜨기 전에 먼저 슬그머니 나가 계산을 끝내놓으실 만큼 평생을 속전속결로 사셨는데, 떠나시는 것마저 성격 급하게 속전속결로 가버리셔서 자식들로서는 아쉬움과 슬픔이 더없이 큽니다”라고 전했다.
영사운드의 <달무리>, 윤수일의 <갈대>, 이은하의 <님마중> 등을 작사한 중견 작사가 김주명(68) 씨는 선생의 철저한 기록 정신을 증언했다. “반야월 선생님은 매년 6월이 되면 종로 대각사에 모여 먼저 떠난 가요계 선후배들을 위한 합동 추모제를 손수 지내주실 만큼 정이 깊으셨다. 그리고 놀랍게도 최근까지 매일 일기를 쓰시고 금전출납부를 꼼꼼히 기록하셨다. 본인이 작사한 5,000여 곡의 가사는 물론이고, 동료들의 노래 가사까지 전부 머릿속으로 외우고 계셨다. 사소한 일상의 내면을 파고드는 천생 창작자이셨다. 또 선생은 애주가이기도 하셨다.
오후 4시만 되면 어김없이 술자리가 시작되었는데 보통 7차까지 자리를 옮기며 드셨다. 1차는 초걸이, 2차는 소거리, 3차는 중거리, 4차는 중중거리, 5차는 대거리, 6차는 왕거리, 그리고 마지막 7차는 이제 완전히 망했다는 뜻의 '망거리'라고 부르셨다. 술 마시는 차수를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국악의 장단과 해학을 섞어 부르시는 모습에서 선생의 남다른 유머와 멋을 느낄 수 있었다.” 김주명 작사가에게 개인적으로 선생의 곡 중 어떤 노래를 가장 좋아하느냐고 묻자, 그는 “대중가요는 결국 자기 신세와 맞아떨어질 때 가장 좋은 법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선생님의 곡 중 <우중의 여인>과 <갈대>를 가장 사랑한다”라고 답했다.
| ▲ 홍콩아가씨를 부른 원로가수 금사향(85) 선생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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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천사 경내에서 제를 지내는 동안, 밖에서는 원로가수 금사향 선생이 정성을 다해 두 손 모아 기도를 올리고 계셨다. <홍콩아가씨>, <소녀의 꿈>을 부른 금사향(85) 원로가수에게 반야월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는지 여쭤보자, 이름에 얽힌 아련한 사연부터 들려주셨다.
"반야월 선생님은 참 장수하셨고 곡도 많이 쓰셨지. 내가 1938년 태평레코드사 전속가수로 처음 데뷔할 때, 극작가 고려진 선생님이 반야월 선생님에게 '진나라의 향기 나는 남자'가 되라며 '진방남(秦芳男)'이라는 예명을 지어주셨어. 그리고 내게는 '거문고 소리가 실바람처럼 널리 울려 퍼지라'는 뜻으로 '금사향(琴絲響)'이라는 이름을 선물해 주셨지. 반야월 선생님은 참 작사도 멋지게 하셨고 성격도 참 낙천적이셨어. 복을 많이 타고나신 게지. 우리 예인들 모두 6·25 전쟁을 겪으며 말도 못 하게 고생했지만, 선생님은 이후에 저작권료도 많이 받으셨고 워낙 인심이 좋아서 주변에 돈도 잘 쓰셨어. 이승에서 복을 많이 쌓으셨으니 저 세상에 가셔서도 분명 인기가 아주 많으실 게야.
내가 사는 곳이 여기서 참 멀고, 차를 한 번 놓치면 40분씩 기다려야 하거든. 그래서 아쉽게도 현대아산병원 빈소에는 시간을 못 맞춰 못 갔어. 그래도 다행히 이렇게 제천 복천사까지 올 수 있었으니 너무너무 고마울 뿐이야. 부처님도 뵈었으니 이제는 한이 없어. 만약 여기마저 못 왔으면 평생 울어도 울어도 지워지지 않는 한이 되었을 게야. 선생님이 남기신 노랫말들은 전부 가짜가 없어, 진실 그 자체지. 오늘 가시는 길을 보니 참 복을 가득 받으셨어.
촉촉이 봄비도 내리고 매화꽃도 활짝 피고, 철쭉, 개나리, 진달래가 흐드러지는 이 고운 꽃 시절에 세상과 작별하신 것을 보니 마지막까지 역시 멋쟁이이셔. 어쩜 그리 바른 속도로 가셨는지, 아마 가시는 날을 스스로 알고 계셨을 거야. 평생 영적으로 맑고 순수하며 순진하셨던 분이니까 다 느끼셨을 게야. 약주를 참 좋아하셔서 매번 1차, 2차를 넘어 7차까지 달리셨는데, 나는 평생 술을 전혀 못 하니까 늘 2차까지만 기분 좋게 따라다녔지.
힘든 게 바로 예술이 아냐! 삶의 고통, 애통, 비통, 절통… 이런 아픔들이 우리 연예인들에게는 좋은 작품이 나오게 하는 진짜 힘이야. 우리의 마지막 희망은 결국 천국이야. 나는 평생 군부대를 돌며 노래한 '전쟁 가수'라 가진 돈이 없어. 만약 나한테 큰 다이아반지라도 있었으면 벌써 칼 맞았을지도 몰라. 무거운 철 냄비보다는 가벼운 양은 냄비가 살아가기엔 훨씬 편한 법이." 노 가수가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에는 삶의 철학이 담긴 거대한 울림이 있었다.
단체 사진들을 담았다. 73년 동안 5,000여 곡을 작사했던 반야월 선생의 노래를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듣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각자의 사정에 맞는 노래들을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을 듯했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생각나면 <불효자는 웁니다>가 떠오를 것이다. 또한 여행으로 소양강을 가면 <소양강 처녀> 노래가 생각나고 미아리를 가면 <단장의 미아리고개>가 있다. 만리포를 가면 <만리포 사랑>이 있다. <울고 넘는 박달재>가 반야월 선생으로 인해 '웃고 넘는 박달재'가 되었다는 김주명 작사가의 말처럼 지명이 들어간 노래가 많아서 지역민들과 그곳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기억에 남고 노래와 함께 추억을 선물한다는 생각을 했다.
돌아오면서 반야월 선생의 영면을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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