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넘는 박달재' 반야월 선생 영면에 들다

"연예인에게는 고통, 애통, 비통, 절통이 힘이에요"

최영숙 | 기사입력 2012/04/07 [00:02]

'울고 넘는 박달재' 반야월 선생 영면에 들다

"연예인에게는 고통, 애통, 비통, 절통이 힘이에요"

최영숙 | 입력 : 2012/04/07 [00:02]
▲ 천둥산 박달재 노래비에서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를 부르다     © 최영숙

2012년 3월 30일 현대 아산병원장례식장에서는 작곡가 반야월 선생의 장례식이 작가협회장으로 치러졌다. 반야월(96) 선생은 1917년 경남 마산 태생이며 본명은 박창호이다. 1939년 가수 데뷔 때는 진방남이라는예명을 사용했으며 이후 추미림(秋美林), 박남포 라는 이름으로도 곡을 냈다. 1942부터 예명 '반야월'로 활동했다. 1950년 발표한 '울고 넘는 박달재'와 1956년 '단장의 미아리고개' '소양강 처녀' '아빠의 청춘' 등 지난 70여년 간 5000여곡을 작사했다.

▲ 발인전에 가족들이 마지막 인사를 하다     ©최영숙
 
발인에 앞서 가족들이 빈소에서 고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 한국가요작가협회장으로 치뤄지다     © 최영숙
 
장례는 한국가요작가협회장으로 치뤄졌다.

▲ 대한가수협회 회장 태진아 씨 조사를 읽다     © 최영숙
 
대한가수협회 회장 태진아 씨가  조사를 했다. "우리 가요계의 큰 별이 지셨습니다. 지난 73년간 가수로, 작사가로 활동해 오신 우리 가요계의 큰 어른, 반야월 선배님께서 이제는 불러 봐도... 울어 봐도... 못 오실... 그 길을 기어이 떠나셨습니다. 전체  후배가수들의 미어지는 가슴을 모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반야월 선배님의 인생은 우리 가요사 그 자체였습니다.
 
1939년 데뷔 이후 73년이란 긴 세월 동안 <불효자는 웁니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 <울고 넘는 박달재> <소양강 처녀>등 그동안 발표하신 주옥같은 4천여 곳의 작품들은 우리 민족의 애환과 격동의 시기를 함께 해 왔습니다. 우리 한민족의 정서를 대변하였으며 우리 가요계의 역사가 선배님의 발자국 하나하나에 고스란히 담겨져 왔던 것입니다. 오늘 그 자랑스러운 가요계의 전설을 떠나보내며 우리 후배가수들은 선배님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열정이 넘치는 음악인 반야월 선배님의 깊으신 가요 사랑과 그 크신 발자취를 가슴에 새겨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부디 물항라 고운 빛 비치는 그곳에서 편안히 영면하소서."

▲ 슬픔     © 최영숙
500여 명의 추모객들이 반야월 선생의 마지막길을 배웅했다. 

▲ 반달이 그려진 명정     © 최영숙
 
장경주 작사가는 “반야월 선생의 이름의 뜻은 반달을 다시 온달로 돌아간다는 뜻이라고 했다. 선생님의 겸손한 의미가 담겨있다. 선생님은 후배들에게 정신적인 지주였다.”고 회고했다.

▲ 가수 설운도 씨의 선창으로 '울고 넘는 박달재'를 추모객들이 부르다     © 최영숙
 
작사가 김주명(68) 씨가 ‘울고넘는 박달재’가 만들어진 사연을 이야기 해주었다. 반야월 선생님이 1948년 충주에서 공연을 마치고 제천으로 가기 위해 박달재 고개를 넘는데 차가 펑크가 났다.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기다리면서 밖을 보는데 건너편에서 연인이 이별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몰라서 촌로에게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촌로는 천둥산 박달재라고 했다. 노래를 지으면서 ‘울고넘는 박달재’가 되었다. 가사에 나오는 도토리묵도 노래 때문에 많이 알려졌다고 한다. 가사 중에 ‘물항라’는 반야월 선생님이 새롭게 만든 말이라고 했다. ‘물들인 항라 저고리’로서 물의 색깔과 같이 파랗게 물들여진 ‘항라’로 만든 옷이란 뜻이라고 했다. ‘항라’는 한자로 ‘亢羅’라고 쓰는데 ‘물’이라는 우리말과 ‘항라(亢羅)’라는 한자어가 합쳐진 말이라고 했다.

 가수 설운도가 장례식의 마지막 부분에 ‘울고 넘는 박달재’를 불렀다. 장례식에 참석한 300여명의 추모객들이 함께 불렀다.

 울고 넘는 박달재 가사 (작사 반야월/ 작곡 김교성/ 노래 박재홍)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왕거미집을 짓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울었오 소리쳤오 이 가슴이 터지도록/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는 님아/ 돌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 가소/
도토리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 한사코 우는 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박달재 하늘고개 울고 넘는 눈물고개/ 돌뿌리 걷어차며 돌아서는 이별 길아/
도라지 꽃이 피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금봉아 불러보나 산울림만 외롭구나

▲ 화장으로 모셔진 후 서울 추모공원에서 제천 박달재로 출발하다     © 최영숙
 
서울 추모공원에서 화장으로 모셔진 후 제천의 박달재로 출발했다.
 
▲ 제천의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비 앞에서 노래를 부르다     ©최영숙
‘반야월 선생님 영원한 제천인으로 영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제천 시민 일동- 박달재 고개에는 제천 시민들이 쓴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반야월 선생의 대표곡인 ‘울고 넘는 박달재’가 박달재의 노래비 앞에서 불려졌다.
 
 
▲ 복천사로 들어서다     ©최영숙

제천시의 복천사로 들어섰다. 신도들이 꽃을 뿌렸다. 제천시가 추진하고 있는 한국가요사 기념관은 제천시 백운면 박달재 관광지 내에 42억 원을 투자해 1000㎡의 규모로 반야월 선생의 전시관을 비롯해 상설공연장, 가요사 테마 체험관 등의 건립을 위해 국비16억 원을 확보, 오는 2013년 상반기 착공해 10월경 준공과 함께 개관을 목표로 추진 중이다. '울고 넘는 박달재'의 작사자 반야월(96세)선생은 2012년 3월 23일 음악과 관련된 소장품 158종을 무상으로 기증했다.

▲ 복천사에서 제를 지내다     ©최영숙

한국가요사 기념관이 완공되면 반야월 선생의 유해는 이곳에서 수목장을 할 예정이다. 완공되기 전까지 복천사에 모셔졌다. 복천사에서 제를 지냈다.

 생전에 반야월 선생은 어떤 분이었는지 지인들에게 물었다.

 양부길(72)가수는 “60년 대 부터 알았다. 1962년 첫 데뷔곡은 ‘애수의 가을밤’이었다. 반야월 선생님은 쾌활하시고 남의 말을 안 하시고 노래가 좋다. 나쁘다 여러 사람 있는데서 평하지 않았다. 조용히 개인적으로 말씀하셨다. 마음이 착찹하다. 우리가요계에서 백수 하실 거라고 했었다.” 

 박상오 씨는 “평소 인자하시지만 카리스마가 있으셨다. 주위 분들에게 많이 베푸셨다.” 

 딸 박희라(59)씨는 “아버님은 예민하시고 다정하셨다. 유머가 있으시고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셨다. 악극단 시절에 단원들 돈을 잘 안 주니까 단원들이 기운이 없어서 쿠웅~짝, 쿠웅~ 짝하면서 늘어지게 연주를 했다. 그러면 당시 한 주먹 했던 김준구 씨가 과일칼을 뒷짐에 들고 칼날을 아래로 내리고 달랑달랑 거리면서 악단 앞으로 왔다 갔다 했다. 그러면 단원들이 꿍짝 꿍짝 기운차게 연주했다. 당시에 악극단원들이 불만이 있으면 단원들을 여관방에 모이라고 해서 가방을 열어 그날 수익금을 다 쏟아놓고 실컷 먹고 놀고 그랬다.”고 아버님을 회고했다. 또한 “신세용 씨가 살아 계실 때는 원로 가수들의 ‘만나리’라는 모임이 있어서 많이 만나셨다. 항상 건강하시고 목소리가 카랑카랑하셨다. 사람들과 커피나 식사를 해도 밥 두 숟가락 들기 전에 먼저 계산하고 나오시고 평생 속전속결이시더니 떠나시는 것도 성질 급하시게 속전속결로 떠나셔서 자식들이 아쉬움이 크다.”고 했다. 

영사운드의 ‘달무리’ 윤수일 ‘갈대’ 이은하 ‘님마중’ 등을 작사한 김주명(68) 씨는 “반야월 선생님은 매년 6월에 종로 대각사에서 돌아가신 선배와 후배들의 합동 추모제를 지내주셨다. 선생님은 최근까지도 일기를 쓰시고 금전출납부를 쓰셨다. 그리고 5000여곡의 가사를 모두 외우시고 다른 사람들의 노래까지 모두 외우셨다. 사소한 것과 내면을 파고들어 가셨다. 반야월 선생님은 술을 좋아하셨다. 

 4시부터 술시라고 그때부터 보통 7차 까지 마셨다. 초걸이-소거리-중거리-중중거리-대거리-왕거리-이제는 망했다는 망거리 까지 7차를 마셨다고 한다. 보통 술을 마시는 차수를 1차, 2차가 아닌 때에 맞는 호칭들에서 그분의 유머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김주명(68) 작사가에게 어느 노래를 가장 좋아하냐고 물었다."대중가요는 자신 신세와 맞아 떨어질 때가 좋다. 개인적으로 ‘우중의 여인’과 ‘갈대’를 좋아한다고 했다.” 

 
▲ 홍콩아가씨를 부른 원로가수 금사향(85) 선생     ©최영숙

복천사 경내에서 제를 지내는 동안 밖에서 원로가수 금사향 선생이 정성을 다해 기도를 드리고 계셨다.

 홍콩아가씨’, ‘소녀의 꿈’을 부른 금사향(85)원로 가수에게 반야월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는지 여쭤보았다. 이름에 얽힌 사연부터 말씀해 주셨다. 

 "반야월 선생님은 장수하시고 곡도 많이 쓰셨지만 극작가 고려진 선생님이 반야월 선생님이 1938년 태평레코드사 전속가수로 데뷔할 때 진나라의 향기 나는 남자라고 진방남(秦芳男) 이란 예명을 지어주셨고 나는 거문고금 실사 뿌릴향 인 금사향琴絲響 이라고 이름을 지으셨다. 반야월 선생님은 작사도 멋지고 성격도 낙천적이셨고 복을 많이 타셨죠. 우리들 모두 60년 전쟁 중에 고생했지만 저작권비도 많이 타시고 인심이 좋으셔서 돈도 잘 쓰셨어요. 복을 많이 쌓으셔서 저 세상에 가셔서도 인기를 많으실 거 에요.
 
제가 사는 곳은 먼데 있고 차를 놓치면 40분씩 기다리는데 15분 늦어서 아산병원에는 못 갔는데 그래도 이렇게 올 수 있었으니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부처님도 뵈어서 이제는 한이 없어요. 만약에 못 왔으면 울어도 울어도 한이 없죠. 선생님이 남기신 노래가사는 진실한거에요. 오늘 보니까 너무 복 받으셨어요.
 
봄비도 오고 매화꽃 피고 철쭉, 개나리, 진달래 피는 꽃피는 시절에 돌아가신 것을 보니 역시 멋있으시다. 어쩜 그리 바른 속도로 가셨는지 가시는 날을 아셨을 거야 영적으로 맑고 순수하고 순진하신 분이셨기 때문에 알고 계셨을 듯하다. 약주도 좋아하셔서 1차 2차에서 7차까지 했는데 나는 술을 못해 평생을 2차 까지만 따라다녔다. 힘든 게 예술 아냐! 고통, 애통, 비통, 절통들이 우리 연예인에게는 좋은 작품 나오게 하는 힘이에요. 희망은 천국이다. 난 전쟁가수가 돼서 돈이 없어. 큰 다이아 있으면 칼 맞았을 거야. 철 냄비는 무거워 양은냄비가 가벼운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울림이 강하게 오는 말씀이었다.

 
▲ 단체사진을 담다     ©최영숙

단체 사진들을 담았다. 73년 동안 5000여곡을 작사했던 반야월 선생의 노래를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듣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각자의 사연이 맞는 노래들이 하나정도는 가지고 있을 듯했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생각나면 ‘불효자는 웁니다’ 가 떠오를 것이다. 또한 여행으로 소양강을 가면 ‘소양강 처녀’ 노래가 생각나고 미아리를 가면 ‘단장의 미아리 고개’가 있다. 만리포를 가면 ‘만리포 사랑’이 있다. ‘울고 넘는 박달재’가 바야월 선생으로 인해 ‘웃고 넘는 박달재’가 됐다는 김주명 작사가의 말처럼 지명이 들어간 노래가 많아서 지역민들과 그 곳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기억에 남고 노래와 함께 추억을 선물한다는 생각을 했다.

 
▲ 인사를 드리다     ©최영숙
돌아오면서 반야월 선생의 영면을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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