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왕동에 꽃상여 나가다

물왕동 강금순 집사 의송화 피는 마을을 떠나다

최영숙 | 기사입력 2015/07/07 [17:53]

물왕동에 꽃상여 나가다

물왕동 강금순 집사 의송화 피는 마을을 떠나다

최영숙 | 입력 : 2015/07/07 [17:53]

 

▲ 물왕동 장금순 집사 꽃상여가 마을 앞을 지나다     © 최영숙

 

“장례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꽃을 피우고 가는 것 같아요.” 지인이 말했다.

 

▲ 장금이 집에 사셨던 강금순 집사 상여 나갈 준비를 하다     © 최영숙

 

 지난 6월19일 아침 지인에게서 “ 물왕리에서 옛날 상여가 나갑니다. 사진을 찍으려면 8시 50분까지 오세요.”라는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시간은 이미 8시 30분이었다. 서둘러 나갔다.

 

도착해보니 상여가 나가는 장금이 식당 앞에는 주민들이 장례식장에서 오는 운구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 상여가 떠나기전 예전에 살았던 집에 인사를 하다     © 최영숙

 

장금이 집주인 강금순(83) 집사의 운구가 도착했다. 마을 주민들이 꽃상여를 꾸몄다.

 

신현돌 어르신이 선창으로 상여소리를 했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에~ 허~야 명~차 야.

상여꾼들이 소리를 받았다.

 

어~허~야 어~허~야~

 

마을의 상여꾼들도 오랜만에 하는 소리들이어서 처음에는 리듬이 잘 맞지 않자 주위에서 "아니! 막걸리들이 적었나! 벙어리 들이야. 잘들 해”하면서 흥겹게 지청구를 주었다.

또 상여를 메면서 키가 큰 사람은 뒤로 가게 바꾸고 자리들을 조정했다.

 

어린 시절  마을에서 상여가 나가면 무서워하면서도 그 소리가 좋아서 멀리서 주위를 맴돌던 기억이 떠올랐다. 상여소리는  처연하면서도 그 속에는 흥겨움이 있었다.

 

상여가 움직이기 전에 집에 마지막 인사를 했다.

 

▲ 상여가 선산으로 향하다     © 최영숙


고인이 예전에 울 밖 담장에 심었을 듯한 접시꽃이 인사를 하는 듯했다. 선산으로 상여가 움직였다. 

▲ 상여가 마을길을 지나다 상여꾼과 가족, 마을분들이 뒤를 따르다     © 최영숙

 

이제는 음식점이 즐비한 마을길을 올라갔다. 만장을 앞세우고 사진과 위폐, 상여가 따르고 그 뒤를 유족과 마을 사람들이 따랐다.

 

▲ 상여가 움직이지 않다. 상주들 노자돈을 놓다     © 최영숙

 

상여가 움직이지 않았다. 상주들은 망자에게 노자 돈을 내 놓았다. 밀고 밀리면서 가벼운 실강이가 있었다.  마치 상주나 상여꾼들이 옛날식으로 가볍게 인사하는 듯했다.

 

▲ 마을을 지나 선산으로 들어서다     © 최영숙

 

상여가 선산으로 향해 들어갔다. 고인이 생전에 마실 다녔던 마을 안 길을 지나 산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주 오래된 풍경을 보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귀하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 상여가 장지에 도착하다.     © 최영숙

 

 상여가 장지에 도착했다. 망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 마을 주민들에 의해 하관하다    © 최영숙

 

마을 주민들에 의해 조심조심 고인을 하관했다. 그 정성스러움이 삼 대 독자를 달래는 듯했다.

 

▲강금순 집사의 장지에서 마지막 예배를 드리다     © 최영숙

 

유족들과 교인들은 목사님의 집도로 강금순 집사의 예배를 장지에서 마지막으로 드렸다. 

 

찬송가 ‘천국에서 만나보자’를 부르며 마쳤다.

 

천국에서 만나보자 그날 아침 거기서

순례자여 예비하라 늦어지지 않도록

만나보자 만나보자 저기 뵈는 저 천국 문에서

만나보자 만나보자 그날 아침 그 문에서 만나자 

 

▲ 하관시 아운(亞雲)이라는 글자를 넣다     © 최영숙

 

아운(亞雲) 이라는 글자를 청실홍실을 묶어서 넣었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하관시 아운이라는 글자를 넣지 않으면 자손이 발족을 못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아운은 천둥번개가 몰아 치더라도 고인의 움직임이 없도록 관안에서 편안히 계시라는 뜻이라고 했다.

생전에 기독교인 이었지만, 전통적인 장례에서 하는 방식 또한 따랐다. 

 

▲ 취토하고 고인의 관 위에 꽃을 뿌리다     © 최영숙

 

취토를 하고 고인이 묻힌 관 위에 꽃을 뿌렸다.

 

▲ 신현돌 어르신 소리를 하고 마을 사람들 달공을 하다     © 최영숙


상여소리를 한 신현돌(81) 어르신은 "18살에 소리를 배웠다. 아버지 친구분이 밤이면 참외밭 원두막으로 불러내서 소리를 가르쳐 주셨다. 총각 때는 상여소리를 안하려고 했는데 어른들이 시켜서 22살에 처음으로 앞에서 했다. 이 근동의 어르신들은 다 내가 모셨다. 어느 때는 3시간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러면  그때 그때 상황에 맞게 소리를 하는 것이다. 이 댁도 시어머니와 며느리 두 분 다 내가 상여소리를 한다."고 했다.


신현돌(81)어르신 소리에 맞춰 마을 사람들이 달공을 했다.

 

▲ 북채에 돈이 쌓이다     © 최영숙

 

북채에는 상주와 고인과 가까운 친척과 주민들이 노자 돈으로 드린 봉투가 가득했다. 산판 일이 끝나고 돈을 걷으면서도 흥겨운 소리는 계속 나왔다.

 

"아이고, 신사임당 여사님이 많이 나와야 하는데 세종대왕 님이 많이 나오시네! "하면서 돈을 걷었다. 상여를 멘 사람들은 고인이 젊은 시절에는 어린이로 주위를 맴돌았을 연배들이었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어르신한테 세배돈을 받고 즐거워 하는 모습 같았다.

 

바라보는 눈길이 따스해졌다.

 

▲ 산판에 차린 음식들     © 최영숙

 

산판에 음식들이 차려졌다, 이곳에서 점심식사들을 했다.

 

▲ 박종화(64)맏상주가 어머님께 노자 돈을 드리다     © 최영숙

 

박종화(64) 맏 상주는 “어머님은 2남 2녀를 낳으셨다. 어머니는 논농사 밭농사를 지었다. 어머니는 깔끔하신 분이어서 어려서 우리들을 동네서 가장 깔끔하게 하셨다. 주관이 강하신 분이었다. 교회는 외정 때부터 무지내 교회를 증조부, 증조모(오씨)가 다니셨다. 물왕 교회가 생기면서 이곳으로 다니셨다. 할머니는 (최선덕) -어머님과 우리들까지 다녔다. 100년 넘게 5대가 다닌 것이다. 꽃상여로 모신 것은 어머님이 원하셨다. 할머니도 꽃상여도 모셨다. 어머님도 할머니도 신앙심이 깊으셨는데 우리나라 전통문화를 존중하셨다. 교회에서도 잘해주셨다. 동네 분들이 모두 집안일처럼 해주셨다. 감사드린다. 상여로 나가면서 장난들도 하고 여기서 모인 돈을 모아서 마을기금도 만들고 단합도 된다.”고 했다.

 

김정분 큰 자부는 "어머님은 무서워 보이시지만 따뜻한 분이셨다. 또한 꽃을 유난히 좋아하셨다. 장미, 의송화 등을 뒤뜰에 심었다. 그런데 어느 해 할머님과 어머님이 집안에 의송화가 있으면 자손이 번성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셨다며 모두 뽑으셨다. 어머님이 목화를 심어서 둘째 시누님 시집갈 때 솜 틀어서 이불을 만들었던 생각이 난다. 물왕저수지로 땅들이 다 들어가서 전장들이 멀었다. 어머님이 고생을 많이 하셨다. 깔끔하셔서 목욕을 좋아하셨다. 손녀랑 목욕탕에 가시면 저녁에 오셨다."고 회고했다.

 

▲ 꽃상여 나가다     © 최영숙

 

김영기 시흥문화원 부원장은 "물왕동에서 상여가 나간 것은 2년 정도 되었다. 이제는 어르신들도 별로 없으시고 상여를 멜 수 있는 사람들도 적어서도 보기 힘들것이다."고 했다.

 

물왕동에서 상여를 나가는 것을 처음부터 사진에 담았다.  기록을 하는 사람은  전통장례가 나간다고 연락을 주신 분과 이를 허락해준 유가족 분들께 감사했다. 기록을 하면서 느낀 것은 유가족분들과 마을 주민들이 고인을 위하여 마지막 인사를 잘해드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르신을 꽃상여에 모시고 고인이 다녔던 마을길을 돌고 가깝게 지내던 이웃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심을 쓰고, 구슬픈 상여소리를 듣고 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 마을을 지나다     © 최영숙

 

장례업체 직원들의 안내로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요즈음의 장례를 보다 이렇게 천천히 여유롭게 이승을 떠나게 할 수 있게 한 것은 유족들의 효심과 마을 사람들의 인심이었다. 장례를 모시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상여를 움직일 때 마다 노자 돈을 드리고 장지에서 먹을 음식들을 준비하는 수고를 돌아가신 어르신의 마지막 길을 편하게 하기 위해 자손들이 기꺼이 담당했기 때문이다. 또한 마을분들도 다 바쁜일정에도 모두 모여 함께 상여를 모시고 그곳에서 모인 돈들은 마을 기금으로 만들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부모님을 보내 드리듯이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물왕동에는 아름다운 전통이 살아있었다.

 

돌아오면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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