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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꽃을 피우고 가는 것 같아요.” 지인이 말했다.
지난 6월 19일 아침, 지인에게서 한 통의 문자가 도착했다. “물왕리에서 옛날 상여가 나갑니다. 사진을 찍으려면 8시 50분까지 오세요.” 문자를 확인한 시간은 이미 8시 30분이었다. 서둘러 카메라를 챙겨 현장으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상여가 출발할 예정인 '장금이' 식당 앞에는 주민들이 장례식장에서 오는 운구차를 미동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식당 주인이자 새샘교회 성도인 故 강금순(83) 집사의 운구가 도착했다. 마을 주민들은 기다렸다는 듯 고인을 모실 화려한 꽃상여를 정성스레 꾸미기 시작했다.
이날 상여소리의 앞소리는 신현돌 어르신이 맡아 선창을 뗐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에~ 허~야 명~차 야.” 그러자 상여를 어깨에 멘 마을 상여꾼들이 힘차게 소리를 받았다. “어~허~야 어~허~야~”
마을 주민들로 구성된 상여꾼들도 참으로 오랜만에 맞춰보는 소리였다. 처음에는 호흡과 리듬이 잘 맞지 않자, 구경하던 주위 주민들이 "아니! 막걸리가 적었나! 벙어리들이야? 잘들 해!"라며 정겨운 지청구를 보냈고 장내에는 웃음이 터졌다. 이내 상여꾼들은 키가 큰 사람을 뒤로 보내는 등 서로의 자리를 조정하며 서서히 균형을 잡아갔다.
어린 시절, 마을에서 상여가 나가면 무서워 이불을 뒤집어쓰면서도 그 애절한 가락이 좋아 멀리서 주위를 맴돌던 기억이 스쳤다. 상여소리는 참으로 처연하면서도, 역설적이게도 그 속에는 남은 이들을 달래는 흥겨움이 공존하고 있었다.
상여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 고인이 평생을 일구며 살았던 집을 향해 마지막 하직 인사를 올렸다.
이제는 세련된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선 물왕동 마을 길을 상여가 타고 올라갔다. 망자의 영혼을 인도하는 만장을 앞세우고 고인의 영정 사진과 위패, 그리고 화려한 꽃상여가 따랐으며, 그 뒤를 유족과 마을 사람들이 줄지어 행진했다.
산으로 오르던 상여가 갑자기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상여꾼들의 짓궂은 멈춤에 상주들은 얼른 망자가 저승길에 쓸 노자돈을 상여 위에 내놓았다. 밀고 당기는 가벼운 실랑이가 오가는 모습은, 상주와 상여꾼들이 옛날 방식으로 정겹게 인사를 나누는 축제처럼 보였다.
상여는 드디어 선산 초입으로 향했다. 고인이 생전에 이웃들과 마실을 다녔던 정든 마을 안길을 지나 울창한 산판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도시화된 현대 사회에서 이토록 오래된 풍경을 마주하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귀하게 채워지는 시간이었다.
마침내 상여가 장지에 도착했다. 장지 주변에는 하얀 망초꽃이 무더기로 흐드러지게 피어 고인을 맞이하고 있었다.
상례 업체의 손길 대신, 평생을 함께 보낸 마을 주민들의 온기 어린 손으로 조심조심 고인을 하관했다. 그 지극한 정성스러움은 마치 귀한 삼대독자를 달래어 뉘는 듯 조심스럽고 극진했다.
하관을 마친 후 유족들과 교인들은 목사님의 집례 하에 강금순 집사의 마지막 장지 예배를 드렸다. 참석자들은 찬송가 「천국에서 만나보자」를 함께 부르며 고인과의 이승에서의 이별을 고했다. “천국에서 만나보자 그날 아침 거기서 / 순례자여 예비하라 늦어지지 않도록 / 만나보자 만나보자 저기 뵈는 저 천국 문에서 / 만나보자 만나보자 그날 아침 그 문에서 만나자”
예배가 끝난 뒤, 하관된 관 위에 '아운(亞雲)'이라는 글자를 청실홍실로 정성껏 묶어서 내려놓았다.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민간 전설에 따르면, 하관할 때 명정이나 관 위에 이 '아운'이라는 글자를 넣지 않으면 자손들이 번창하거나 발복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운은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거칠게 몰아치더라도 고인께서 아무런 동요 없이 관 안에서 편안하고 조용히 계시라는 염원을 담은 글자다. 고인은 생전에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지만, 남은 자손들은 전통적인 장례 방식이 지닌 미덕 또한 소중히 여겨 이를 함께 따랐다.
참석자들이 차례로 흙을 채우는 취토(取土)를 한 뒤, 고인이 묻힌 관 위에 꽃들을 한 줌씩 뿌려 드렸다.
이날 상여소리를 이끈 신현돌(81) 어르신은 자신의 소리 인생을 나지막이 들려주었다. “18살 때 처음 소리를 배웠다. 아버지 친구분이 밤만 되면 나를 참외밭 원두막으로 불러내 이 소리를 가르쳐 주셨다. 총각 때는 상여소리 같은 건 안 하려고 요리조리 피했는데, 마을 어른들이 억지로 시키시는 바람에 22살 때 처음으로 대열 맨 앞에서 소리를 메겼다. 그 후로 이 근방 어르신들 마지막 길은 다 내가 모셨다. 어느 때는 소리를 3시간 넘게 할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현장 상황과 망자의 사연에 맞게 즉흥적으로 가사를 엮어 소리를 채운다. 신기하게도 이 가문은 시어머니와 이번 며느리(강금순 집사)까지 두 분 다 내가 소리를 메겨 보내드리게 되었다”며 남다른 인연을 회고했다.
신 어르신의 구슬픈 가락에 맞춰 마을 주민들은 한마음으로 흙을 단단히 밟는 달공(회다지)을 시작했다.
달공이 이어지는 동안 소리꾼의 북채에는 상주와 일가친척, 주민들이 노자돈으로 드린 흰 봉투가 보란 듯이 가득 쌓였다. 산판 일이 모두 끝나고 이 돈을 걷어 정돈하면서도 현장에서는 유쾌하고 흥겨운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아이고, 신사임당 여사님(5만 원권)이 많이 나와야 하는데 세종대왕님(1만 원권)이 잔뜩 나오시네!” 주민들은 돈을 걷으며 농을 던졌다. 상여를 메고 흙을 밟은 장정들은, 고인이 젊고 한창이던 시절에는 코흘리개 어린아이로 마을을 뛰어다녔을 연배의 후배들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명절날 어린아이들이 동네 어르신에게 세배를 드린 뒤 세뱃돈을 받고 다 함께 즐거워하는 풍경과 꼭 닮아 있었다. 바라보는 눈길도 한없이 따스해졌다.
묫자리 다지기가 마무리될 무렵, 산판 한편에 푸짐한 음식들이 차려졌다. 땀 흘린 주민들은 이곳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정겨운 점심 식사를 나누었다.
고인의 장남 박종화(64) 씨는 어머님의 삶을 담담히 추억했다. “어머님은 슬하에 2남 2녀를 두시고 평생 논농사, 밭농사를 지으며 거친 세월을 사셨다. 그러면서도 성품이 워낙 깔끔하셔서 자식들만큼은 동네에서 가장 단정하고 깨끗하게 입혀 키우셨고, 매사에 주관이 뚜렷하셨던 분이다. 우리 가문의 신앙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시작됐다. 증조부와 증조모 때부터 무지내교회에 다니셨고, 이후 물왕교회가 개척되면서 이곳으로 옮겨 오셨다. 할머니(故 최선덕)와 어머님, 그리고 우리 자식들까지 대를 이어 무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5대가 한 교회를 섬긴 셈이다. 오늘 이렇게 꽃상여로 모신 것은 생전 어머님의 간절한 유언이었다. 앞서 가신 할머니도 꽃상여로 모셨는데, 어머님 역시 신앙심이 깊으시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 고유의 전통 상장례 문화를 무척 존중하셨다. 교회에서도 이런 뜻을 이해해 잘 배려해 주셨고, 동네 분들도 모두 자기 집안일처럼 발 벗고 나서주셔서 깊이 감사드린다. 상여 행진을 하며 서로 장난도 치고, 여기서 모인 돈은 전액 마을 기금으로 기부되어 동네 단합에도 큰 도움이 된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큰자부 김정분 씨의 회고도 이어졌다. “어머님은 겉보기엔 다소 엄해 보이셨지만 속정은 누구보다 깊고 따뜻한 분이셨다. 특히 꽃을 유난히 좋아하셔서 집 뒤뜰에 장미와 의송화 등을 애지중지 심으셨다. 그러다 어느 해, 시할머님과 어머님이 '집안에 의송화가 있으면 자손이 번성하지 못한다'는 속설을 들으시더니 자식들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 아까운 꽃들을 단숨에 다 뽑아버리시기도 했다. 또 어머님이 직접 목화를 심고 수확하셔서, 둘째 시누이 시집갈 때 손수 솜을 틀어 따뜻한 혼수 이불을 만들어 주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훗날 물왕저수지가 개발되면서 땅들이 많이 수용되는 바람에 일구던 전답들이 멀어져 어머님이 고생을 참 많이 하셨다. 깔끔한 성격이라 목욕하는 것을 무척 좋아하셨는데, 주말에 손녀 손을 잡고 목욕탕에 가시면 저녁때가 되어서야 개운한 얼굴로 돌아오시곤 했다”며 그리움을 표했다.
김영기 시흥문화원 부원장은 “물왕동에서 전통 상여가 나간 것은 대략 2년 만의 일이다. 이제는 마을에 토박이 어르신들도 얼마 남지 않으셨고, 상여를 멜 수 있는 젊은 장정들도 갈수록 줄어들어 앞으로는 이런 전통 상여를 보기가 정말 힘들 것”이라며 아쉬움을 전했다.
물왕동에서 펼쳐진 전통 장례의 전 과정을 담으며 기자의 마음에는 깊은 울림이 일었다. 이런 귀한 전통 장례가 열린다는 소식을 미리 알려준 지인과, 슬픔 속에서도 기꺼이 사진 촬영을 허락해 준 유가족분들께 고개 숙여 감사를 전한다. 기록을 진행하며 느낀 것은, 유족들과 마을 주민들이 고인을 향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적이고 아름다운 마지막 예우를 다해드렸다는 점이다. 어르신을 화려한 꽃상여에 정중히 모시고 생전 거닐던 정든 마을 길을 한 바퀴 돌아보게 해드렸으며, 가깝게 지내던 이웃 주민들에게 마지막 인심을 베풀고 구슬픈 상여소리를 길동무 삼아 이승을 떠나게 해드렸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장례는 자본과 결합한 장례 전문 업체의 안내에 따라 병원 식장과 화장장을 오가며 일사천리로 차갑게 진행되곤 한다. 이러한 시대에 고인을 이토록 천천히, 그리고 여유롭고 따뜻하게 이승과 작별하게 만든 힘은 다름 아닌 자식들의 깊은 효심과 마을 사람들의 넉넉한 인심이었다. 장례를 준비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상여가 멈출 때마다 기꺼이 노자돈을 올리고, 장지에서 온 동네 사람이 먹을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는 번거로움을 자손들은 어머님의 마지막 길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감내했다. 동네 주민들 역시 바쁜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마치 내 부모를 보내듯 정성을 다해 상여를 메어 주었다. 시흥 물왕동에는 여전히 사람이 사람을 아름답게 배웅하는 눈부신 전통의 공동체 문화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붉게 물드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故 강금순 집사의 영원한 안식과 명복을 간절히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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