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소리를 뉘어놓고 가신 예인… 꽃상여에 실려 떠난 故 이은관 선생 발인 현장

최영숙 | 기사입력 2014/03/18 [21:11]

유년의 소리를 뉘어놓고 가신 예인… 꽃상여에 실려 떠난 故 이은관 선생 발인 현장

최영숙 | 입력 : 2014/03/18 [21:11]


▲ 배뱅이굿을 부른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이은관 선생의 꽃상여가 제자들에 의해 운구 되다     ⓒ최영숙


 지난 3월 12일, 배뱅이굿의 일인자인 이은관 선생이 향년 9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은관 선생은 1917년 11월 27일 강원도 이천군 동면 피동리에서 출생, 1937년(20세)에 황해도 황주로가 서도소리의 대가였던 이인수 선생을 만나 본격적으로 사사했고, 이때 평안도 김관준 계통의 <배뱅이굿>을 전수받으며 명창으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1984년, 그 독보적인 예술성과 전승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배뱅이굿)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서산낙조(西山落照) 떨어지는 해는 내일 아침이면 다시 돋건마는, 황천(黃泉)길이 얼마나 먼지 한 번 가면은 못 오누나.” 이은관 선생이 부르던 배뱅이굿의 서글픈 첫 대목이다.

 

배뱅이굿의 창조(唱調)는 본래 관서지방 무당들의 노랫소리에서 유래했다. 이 배뱅이굿은 최근세에 형성된 서도소리의 한 분과로 보이는데, 현재 전승되는 유파는 평안도 김관준 계통을 이은 이은관(李殷官) <배뱅이굿>과 황해도 문창규(文昌圭) 계통을 이은 양소운(楊蘇云) <배뱅이굿>이 있다. 그중에서도 이은관의 배뱅이굿은 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로 지정되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대개 반주는 장구 하나만을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나, 극의 흥을 돋우기 위해 바라, 피리, 대금, 해금 등을 곁들이기도 한다. 주요 장단은 굿거리, 볶는타령, 막장단, 중모리(산염불장단) 등으로 다채롭게 구성되어 있다.

 

▲ 이은관 선생 꽃상여를 타고 떠나다     ⓒ최영숙

 

이은관 선생의 부음 소식을 접했을 때, 가슴 한구석에서 쿵 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배뱅이굿을 부른 서도소리의 거목 이은관 선생을 생각하면, 필자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아련한 유년의 기억이 가장 먼저 고개를 든다.

 

필자가 배뱅이굿을 처음 들었던 것은 겨우 여덟 살 무렵이었다. 어느 날 이웃집 할머니 댁 마당에서 흘러나오던 배뱅이굿 소리는, 어린 계집아이에게 마치 다른 세상이 열리는 듯한 신선한 충격이었다. 온 동네가 들썩일 정도로 전축을 크게 틀어놓던 시절, 그 스피커에서는 늘 배뱅이굿과 회심곡이 흘러나왔다. 고무줄놀이나 사방치기를 하며 마당을 뛰놀다가도 이웃집에서 배뱅이굿 소리가 들려오면, 슬그머니 놀이에서 빠져나와 뒤란 담벼락에 기대앉아 한없이 귀를 기울이곤 했다. 가끔 그 모습을 어른들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어린것이 왜 그리 청승을 떠느냐"라며 다정한 지청구를 듣기도 했다.

 

▲ 이은관 선생의 배뱅이굿 LP 판     ⓒ 최영숙


배뱅이굿의 서사는 무척 흥미롭다. 황해도 최 정승의 귀한 딸 배뱅이가 18세 나이에 상사병을 얻어 요절하자, 슬픔에 잠긴 부모는 딸의 넋이라도 한번 불러보고자 큰 상금을 내건다. 딸의 영혼을 불러 주는 이에게 전 재산의 절반을 나눠주겠다는 공고였다. 이에 팔도의 이름난 무당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으나 그 누구도 배뱅이의 넋을 불러오지 못했다. 그때 우연히 마을을 지나던 평양의 한 건달이 동네 할머니에게 배뱅이가 죽은 사연을 귀동냥으로 전해 들은 뒤, 최 정승의 집을 찾아가 가짜 박수무당 행세를 한다. 배뱅이의 넋이 정말 찾아온 것처럼 속여 최 정승의 재산을 가로채 떠나는 해학적인 내용이다.  

 

▲ 상여가 잠시 쉬었다 가다     ⓒ최영숙


 배뱅이굿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그 조리 속에는 구슬픈 눈물과 어깨춤이 들썩이는 흥겨움이 묘하게 공존한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의 은공을 눈물로 생각하게 만들다가도, 저승에 가 권선징악을 하는 서슬 퍼런 장면에서는 죽음이라는 존재가 마냥 무서워 이불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세월의 두께가 쌓이면서 배뱅이굿을 해석하는 시선도 조금씩 바뀌었다. 처음에는 사기꾼 가짜 무당에게 허망하게 속아 넘어가는 죽은 배뱅이 부모가 참 어리석어 보였다. 하지만 부모가 되어 보니, 그 엉터리 박수무당은 돈을 사기 친 것이 아니라 자식을 잃고 미쳐가던 배뱅이 부모의 찢어진 가슴을 정성껏 치유하고 떠난  '치유자'였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먼저 보내고 피눈물을 흘리는 부모에게 그까짓 재산이 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가짜 배뱅이의 입을 빌려서라도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를 다 풀어내는 것을 보며, "기둥뿌리라도 다 뽑아가거라!"라고 통곡하던 부모의 절박한 심정을 이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한바탕 서럽게 울고, 또 호탕하게 웃으며 세상사를 너그럽게 품어 안던 한 판 대동굿이었던 배뱅이굿은, 언제 들어도 그 깊은 해학과 풍자에 찬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 이은관 선생 제자들이 상여를 메고 모시다     ⓒ최영숙


 배뱅이굿 소리를 듣고 자란 담벼락 밑의 계집아이는 어느덧 완연한 중년에 이르렀다.

 

이은관 선생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담으며 마치 내 소중한 유년의 한 페이지가 통째로 사라지는 듯한 깊은 상실감을 느꼈다. 살아가며 문득 힘든 일이 생기거나 마음 놓고 펑펑 울고 싶은 날마다 늘 이은관의 배뱅이굿을 들으며 위로받았기에, 필자는 평생 이 어르신의 소리에 큰 빚을 지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서도소리 무형문화재 김경배 씨가 스승의 영정을 들고 창을 하다     ⓒ최영숙

 

고인의 발인식은 지난 14일 한양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되었다. 마지막 장지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에 위치한 시립공원묘지였다.

 

운구차를 따라 용미리 시립공원에 도착하자, 꽃상여가 고인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상여는 평생 고인의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이 직접 어깨에 멨고, 고인의 넋을 달래는 마지막 상여소리 역시 제자들이 번갈아 가며 맡았다. 운구 행렬의 선두에서 상여소리를 이끈 이는 고인의 수제자이자 서도소리 보유자인 국가무형문화재 김경배(55) 씨였고, 21세 때부터 선생의 뒤를 따르며 상여소리를 배웠다는 안성근(59) 씨를 비롯한 수많은 문하생이 목청을 높였다. 그 광경은 마치 격조 높은 <국악한마당>의 한 장면을 마주하는 듯 장엄했다. 무형문화재급 대가들이 부르는 애절한 상여소리를, 그것도 평생의 은사를 위해 무대가 아닌  현장에서  부르는 소리로 들을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가슴 저리도록 감사한 일이었다. 스승의 마지막 가는 길 위에서 제자들은 온 정성을 다했다.

 

▲ 이은관 선생의 수제자들이 달공을 하다     ⓒ최영숙


선생의 제자인 한국남(67) 씨는 “선생님은 언제 찾아뵈어도 늘 버선발로 반갑게 맞아주셨고, 정이 참 눈물겹도록 많으셨던 분”이라며 “비보를 듣고 며칠 동안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제자의 도리로서 내 손으로 어르신을 가장 편안하게 모시고자 한다”라고 했다. 이날 무거운 상여를 멘 제자들 중 최고령자는 최죽선 씨로, 자그마치 77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존경하는 이은관 스승의  마지막 길에 동행했다.

 

▲ 이은관 선생의 명정     ⓒ최영숙

 
또 다른 제자인 양진희(57) 씨는 “선생님은 평생 배뱅이굿을 지키고 부르신 것 외에도, 국악의 대중화를 위해 수많은 창작곡을 직접 만드신 선구자이셨다”라며 “악기를 다루는 재주도 워낙 비범하셔서 색소폰과 대금, 피리 등 다루지 못하는 악기가 없으셨다. 나이가 드셔서도 늘 새로운 음악을 배우는 것을 아이처럼 좋아하셨던, 평생 소년 같으셨던 참스승”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 이은관 선생의 하관식을 보면서 슬퍼하는 유족들과 제자들     ⓒ최영숙


이광수(65) 씨 역시 “사실 최근까지도 선생님과 함께 선생님이 평소 아끼시던 창작 작품들을 모아 스튜디오 녹음 작업을 진행하기로 구체적으로 약속했었는데, 이렇게 급작스럽게 가실 줄은 꿈에도 몰랐다”라며 “조금만 더 버텨주셨더라면 선생님의 마지막 목소리를 온전히 남길 수 있었을 텐데…”라며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고인의 아들인 상주 이승주(52) 씨는  “어릴 적 아버님은 늘 우리 가족보다 배뱅이굿과 무대를 언제나 먼저 생각 하셨기에 어린 마음에 한때는 서운하고 야속했던 기억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 아버님 가시는 마지막 길에 제자들이 보여주는 이 진심 어린 눈물과 극진한 예우를 지켜보면서, 아버님이 참 올곧고 훌륭한 예인으로서 한평생을 잘 살고 가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며 함께 해준 이들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 서도소리 무형문화재 이은관 선생 마지막 길을 나서다     ⓒ최영숙

 

이은관 선생의 마지막 발자취를 기록하는 내내, 가슴 한구석에서 밀려오는 마음이 유독 남다르고 착잡했다. 메마르고 척박했던 내 유년의 감성을 배뱅이굿으로 풍성하게 채워주었던 고인을 향한 깊은 고마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울 수 없는 서글픈 안타까움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향년 97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긴 세월 동안 서민들의 애환과 삶의 굴곡을 창 한 자락으로 달래주었던 거장이다. 그런데 그 위대한 예인의 마지막 가시는 길이 우리 사회의 명성에 비해 생각보다 너무나 간소하고 호젓했다.

 

오늘날의 세태는 유명 아이돌 가수의 부모가 사망했다는 소식만 전해져도 각 방송사의 취재진과 카메라가 인산인해를 이루며 연일 요란한 보도를 쏟아내곤 한다. 그것이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다. 그런데 한평생 오직 우리 소리 외길만을 걸으며 민족의 혼을 지켜온 위대한 인간문화재의 마지막 길은 어찌 이토록 쓸쓸하고 고요해야 한단 말인가. 그 긴 세월을 오직 소리판을 지켜온 예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예의와 존경이 너무나 부족한 것은 아닌지, 남겨진 자로서의 아쉬움이 무겁게 밀려왔다.

 

▲ 이은관 선생에게 동백꽃 노래를 부르며 사랑을 표하는 제자들     ⓒ최영숙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스승을 향한 제자들의 눈물어린 정성이 너무도 지극하고 서러웠기에 이은관 선생은 이 세상 마지막 떠나는 걸음이 결코 외롭거나 서운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 깊은 슬픔에 잠긴 수제자들     ⓒ최영숙


77세의 백발 제자가 기꺼이 상여를 메고, 나이 든 중년의 제자들이 무덤가에 둘러앉아 '사랑해요' 하트를 그리며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모습, 그리고  은사의 무덤 앞에 엎드려 땅을 치며 대성통곡하는 제자들의 눈물을 보면서, 나는 이은관 선생이 지난 97년의 생을 얼마나 따뜻하고 위대하게 살다 갔는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 고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리다     ⓒ최영숙


 새로 솟아오른 흙무덤을 뒤로하고 천천히 발걸음을 돌리는 길, 고인의 영원한 영면을 기원하면서 “그동안 제 유년을 소리로 풍성하게 채워주셔서 참 고마웠습니다”라고 마음을 담아 고개 숙여 깊은 하직 인사를 올렸다.

 

바람이 쓸쓸하게 스치는 용미리 공동묘지 능선 너머로, 어디선가 카랑카랑하고 맑은 고인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는 듯했다.

 

“왔구나, 왔소이다! 황천 갔던 배뱅이가 오늘에야 다시 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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