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광 문도진 시인 장례식을 다녀오다

고인을 기록하다

최영숙 | 기사입력 2015/06/27 [23:23]

염광 문도진 시인 장례식을 다녀오다

고인을 기록하다

최영숙 | 입력 : 2015/06/27 [23:23]
▲ 문도진 장로의 성경책     © 최영숙


 지난 26일 오전 6시 시흥장례원에서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새샘교회 안기창 목사 집례로 故 문도진 시인의 천국환송예배를 드렸다.

 

▲ 안기창 목사의 집례로 故 문도진 시인의 천국환송 예배를 드리다     © 최영숙

 

천국환송예배는 이른 새벽임에도 많은 신도들과 가족과 일가친척들이 참석한 가운데 경건하게 진행되었다.

 

고인의 약력 소개에 이어 새샘교회 이소라 청년이 고인의 유작 시 [그대 곁을 떠나며]를 낭송하자 장내에서는 깊은 한숨소리와 함께 울음이 터져 나왔다.

 

▲ 고 문도진장로 천국환송예배에서 새샘교회 찬양팀에서 찬양하다     © 최영숙

 

사위 백민호 씨가 인사의 말을 했다. “바쁘신 중에도 찾아 주셔서 슬픔 중에 있는 저희 가족을 위로해 주시고 장례절차가 원만히 이루어지도록 마음 모아 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 가족은 여러분들의 격려와 기도가 헛되지 않도록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며 화목하고 복된 가정을 세워가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임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고 했다.

 

▲ 옛 동료들에 의해 운구되다     © 최영숙

 

고인의 운구는 옛 동료들에 의해 영구차에 모셔졌다. 영구차는 화장을 하기 위해 용인 평온의 숲으로 향했다.

 

용인 평온의 숲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깊은 슬픔이 밀려왔다. 두 달 전에 이곳에서 사랑하는 언니를 떠나보낸 곳이었기 때문이다. 가족들과 지인들의 슬픔이 더욱 아프게 다가섰다.

 

▲ 슬픔에 빠진 유가족     ©최영숙

 

사람은 떠나면서 자신만의 향기를 남기고 떠난다. 고인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만이 내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 인 듯 했다. 고인이 마지막 가는 길에 함께 한 사람들에게 고인에 대한 추억과 소회를 물었다.

 

▲  족구를 하던 고인을 회고하는 지인 ©최영숙

 

 금대현(60년생) 씨는 “시흥에 87년도에 이사 와서 28년을 만났다. 교회를 나오라는 전도를 받고 새샘교회에 나갔다. 문대장님, 라르고회장, 소래문학회 회장, 시흥문인협회 부회장 등의 호칭보다 형은 문 장로로 불리길 원했다. 호 염광은 ‘소금과 빛’이었다. 故 문도진 형과 한 달 전에 여수로 3박 4일 남도 바다를 보고 왔다. 힘들어 하셨지만 이렇게 빨리 떠날 줄 몰랐다. 너무 생생하게 가까이 계시던 분이어서 아직 감당이 되지를 않는다.”

 

육군3사관학교 후배는 “고인이 힘든 일도 있었을 텐데 단 한 번도 화내는 모습을 뵌 적이 없었다.” 고 회고했다.

 

유영학(52년생) “故 문도진 장로님과 교회 창립멤버였다. 신앙의 동지였다. 운동을 좋아하셔서 축구, 족구 같은 것을 주관해서 하셨다. 문 장로님이 들어가면 그 팀은 이겼다. 혼자서 훨훨 날아 다녔다. 족구 하자고 일어서실 것 같다. 이렇게 빨리 떠나셔서 안타깝고 당황스러웠다. 한결 같고 성실 했고 인생의 많은 부분을 배웠다.”

 

새샘교회 안기창 목사는 “평소 장로님은 정말 반듯하고 진실한 분이었다. 하느님을 믿는 만큼 생활 속에서 사셨다.”고 했다.

 

 

▲ 고 문도진 시인 자연으로 돌아가다     © 최영숙


화장이 모두 끝났다. 시인은 자연으로 돌아갔다.

故 문도진 장로의 유골함은 이천 호국원으로 향했다.

 

▲ 이천호국원에 봉안되다     © 최영숙


이천 호국원에 봉안되었다. 

 

▲ 가족들 슬픔에 젖다     © 최영숙

 

 문도영(60년생) “큰형은 완전히 모범생이었다. 형이랑 꼴 베러 가고 했던 추억들이 생각난다. 육군3사관학교를 간 것은 국가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서 갔다.”

 

 문도인(62년생) “저희 3형제 보낸 편지들을 모아서 부모님전상서를 준비 중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다보니까 형님의 국방 편지 100 여 통과 고시공부하면서 보낸 편지와 며느리와 손주들 편지가 많았다. 책으로 엮어서 집에 보관하고 가족끼리 놀러왔을 때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돌아보려고 했다.”

 

임미숙 씨는 “우리 아주버님은 제수와 조카들에게 편지를 보내주시는 다정다감한 분이셨다. 오누이 같이 지냈다. 가정을 위하여 많은 희생을 하셨다. 너무 귀한 분을 떠나보내서 가슴이 아프다. 평생 기억할 것이다.”

 

이상복(64년생) “은행동예비군중대장 하실 때 행정관으로 같이 근무했었다. 지역사회에도 많은 기여를 하셨는데 너무 안타깝다. 이제 여유롭게 즐기실 나이인데 아깝다. 뭐든지 다 잘 하셨다. 대충 하시는 게 없었다.” 고 회고했다.

 

▲ 소래문학회 회원들과 함께     © 최영숙

 

고인과 함께 문학 활동을 했던 지인들은 다음과 같이 회고 했다.

 

이준옥 소래문학회 회장 “아직도 생목이 오르는 것처럼 마음에 있습니다. 그 분이 아직 마음에서 나가질 않습니다. 그대는 나와 갑장이었습니다. 나는 갑장이란 말과 뜻을 그대를 통하여 처음 알았습니다. 말하자면 그대는 나에게 이 세상의 처음인 것 하나를 내게 알려 준 사람입니다. 내가 소래문학회의 대문을 들어와 기웃거릴 때 그대는 나에게 '우리는 갑장'이라며 내 손을 잡아 주었습니다. 그 손, 그 목소리 따뜻했습니다. 내가 격의없이 손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이성의 갑장이 그대였습니다. 앞으로도 그대는 내가 유일하게 손을 잡을 수 있는 이성의 갑장입니다. 그대와 나는 내 기억이 온전한 한 갑장입니다. 그리고 우리이며 소래문학입니다."

 

전영준 시향문학회 회장은 “친구 문도진! 그는 참 예의 바른 친구입니다. 늘 부를 때는 ‘갑장’하고 부르는 인상 좋고 착한 친구! 그에 비하면 얼굴은 험하고 목소리 크고 활동 반경이 커서 대비되는... 그래서 내가 가지지 못한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히고 노력해서 좋은 결과를 가진 석사 친구! 그대가 줄다리기를 하면 나는 줄넘기, 색소폰을 불면 나는 트럼펫을... 소래문학회에서 활동 할 때 나는 시향문학회에서 서로 협력하며 시흥문인협회를 이끌어 가던 소중한 친구! 지금은 그대가 시흥문인협회부지부장으로 수고하며 시흥의 문학을 이끌어 주시던 귀한 자리에 부지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니, 늘 선의의 라이벌, 아니 따라가지 못하지만 그대의 그림자라도 함께 하고 싶었던 나는 그대의 빈자리가 너무 슬프오! 이제 함께 걸으며 소중한 추억과 봉사로서 염광 문도진과 주영 전영준이 함께 하려 했는데 어찌 먼저 가신단 말입니까! 고통 없고 슬픔 없는 천국에서 찬송 부르시게 나는 이 땅에서 찬양 드리겠습니다. 잘 가시게 갑장, 친구!”

 

▲ 지인들과 족구를 즐기던 고인의 생전 모습     © 최영숙

 

안봉옥 시흥문인협회 전 지부장 “정갈한 바람이 스쳐갔습니다. 머물다간 곳곳에 웃음, 배려, 나눔의 흔적이 너무나 곱습니다. 이제 마름질한 수의에 모두의 눈물 한 방울씩 올려 그리워질 그 정갈한 바람을 보냅니다.

 

이동호 시인은 “매사에 열정적으로 임하신 문대장님! 그 값진 삶을 향한 태도 마음 깊숙이 간직하겠습니다. 함께해주신 시간들 감사드립니다. 문대장님 그곳은 좀 어떠신지요. 저희 걱정 마시고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임경묵 시인은 “10년도 더 된 일입니다. 뭐가 그렇게 괴로운 일이 많다고 밤마다 술에 잔뜩 취해 문대장님께 문자를 보냈었죠.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만 합니다. 그 밤에도 문대장님은 꼬박꼬박 장문의 따뜻한 답장을 해주셨지요.”

 

심우일 시인은“아, 이게 인생입니까? 잔혹합니다.”

 

최분임 시인은 “그저 편안하시길 빕니다.”

 

이지선 시인은 “시흥에서 가장 오랫동안 보고 싶은 사람, 이승에서도 천국에서도 꼭 필요한 사람, 지금 보내기에는 너무 아까워 붙잡고 싶은 마지막 사람, 신이 질투 나게 그 맑은 영혼을 사랑해 티 묻을까 봐 먼저 데려간 사람.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보배로운 사람, 보내고 그리워져 가슴 시릴 사람”

 

박길목 시인은 “약주를 못해도 노래방에서 넥타이를 머리에 질끈 묶고 놀았었다. 사상이 넓게 열려 있었다. 자신에게 엄격하면서도 다른 모든 것에서는 넓은 아량을 가지고 있었다.”고 회고 했다.

 

▲ 고 문도진 시인의 영정 사진     © 최영숙

 

그 어렵다는 시아주버님을 제수씨가 오누이 같았다고 느끼게 했던,

후배에게, 또 고인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한 번도 화내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지인을 교회에 인도하고 아이처럼 기뻐했던 성도로써의 모습,

금방 이라도 족구를 차자고 나올듯하다는  모습,

시를 쓸 때의 치열했던 모습까지...

 

참으로 많은 모습을 간직했던 고인의 모습들을 기록했다.

 

사람이 떠난 뒤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일상을 쌓는 일이며 그 일상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았다.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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