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답게 살아온 시인 이만균 선생

이지선 | 기사입력 2020/02/23 [22:10]

시인답게 살아온 시인 이만균 선생

이지선 | 입력 : 2020/02/23 [22:10]

 

▲ 이만균 시인     ©시흥예총 제공

 

얼굴에서 시를 읽다

어르신들은 그분들이 살아온 이력이 얼굴에 기록되어 있다. 미국 대통령 중에 제일 못생긴 링컨 대통령은 중요한 참모를 뽑을 때는 꼭 관상을 보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어느 대기업도 그랬다는 후문이다. 40이 넘으면 자기 관상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다. 어렸을 때는 잘 생겼던 얼굴이 나이가 들면서 망가진 얼굴, 젊어서는 못생겼던 얼굴이 나이 들어 멋있어 보이는 모습으로 변해가는 사람들을 본다. 이만균 선생을 오래도록 가까이에서 뵐 수 있었다. 내게는 기쁨이고 행운이었다. 뵐 때마다 선생의 얼굴에서 시를 읽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말을 만들어 내신다. 음식점에 가서도 그 음식이 짜고 맵고 맛이 없어도 불평하거나 부정적인 느낌의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술을 즐기면서도 주변을 편안하게 배려하신다. 시 속에다 온몸을 담그고 숙성된 시인으로 생활하시는 모습이다.

 

20대에 현대문학으로 시에 입문하시다

1933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셨으니 올해가 만으로 86세다. 83세까지 직장에서 월급을 받고 일하셨다. 직장에서 적극 만류했는데도 능력 있는 젊은 사람이 일을 해야 한다며 사직을 하셨다. 그 연세까지 당당하게 일을 하실 수 있었던 건 선생의 삶이 얼마나 성실하고 충실했는지 알 것 같다. 12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어 어려운 가정을 어머니와 꾸려나가야 해서 또래보다 5년 늦게 중학교에 입학하다 보니 지금도 동창들 중에 제일 나이가 많다. 자연 대학도 그렇게 늦었다. 25세 때 박두진 선생의 추천으로 현대 문학에 시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면서 대한일보 문화부 기자로 근무하셨다. 그러다가 50대까지는 기업 업무와 대일 수출을 담당하는 기업의 중역으로 일했고 70 대까지는 일본에 주방용품을 제조하여 수출하는 사업을 하셨다.

 

시흥에서 아름다운 노후를 보내시다

시흥에 오셔서 시흥지역사회에 많은 발자취를 남기셨다. 시흥 일하는 노인연대, 시니어 뱅크, 자치신문 칼럼 위원 편집위원, 효도회 부회장, 하우명 예절학교 교장, 노인상담 등 지역의 많은 일을 열심히 하셨다. 또한 시인으로서의 활동도 활발하셨다. 시흥문협, 시향문학, 경기문협 자문위원, 한국가교문학회 고문, 계간문예이사 등 작 은 체구에 야무지게 많은 일들을 하시면서도 항상 고맙고 감사하다는 겸손한 인사는 장로님으로서의 몸에 베인 신앙의 뿌리가 깊어서다.

 

  © 시흥예총 제공

 

연애도 시인답게 하다

선생과 6년 차이가 나는 아내와의 연애담은 시인다운 감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28세 때 선생이 기자로 있을 당시 피난학교에 다니던 아내가 여고 3년 때, 그녀에게 끌려 취재하러 다녀야 하는 신문사 차로 그녀의 등교 시간에 맞추어 같이 출근하면서 가까이 지내다가 4년 후에 결혼하게 된다. 32세의 나이면 당시에는 노총각이었다. 선생은 여성스러운 시인의 감성을 가지고 있고, 부인은 이성적이라 두 분의 조화가 지금까지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을 것이다. 살면서 완전한 부부도 완전한 가정도 없겠지만 두 분이 서로 존경하며 존댓말을 쓰시는 모습이 참 아름다워 보였다. 지금도 나이 든 처남들이 용돈을 준다며 본인처럼 행복한 사람을 없을 것이라 자랑을 하신다. 그러기까지는 젊어서 그 처남들에게 많은 것을 베풀었던 결과이겠지만 본인이 해주었던 건 자랑하지 않으시고 처남들이 그렇게 잘한다며 자랑하시는 모습이 천상 시인이시구나 싶다.

  

어머니의 교훈이 삶의 지침이 되었다

선생의 어머니는 일찍 혼자되시어 3남매를 혼자 키우시며 눈물의 기도를 하셨다. 아무리 어려워도 더 어려운 사람을 돌보셨던 어머니시다. “네가 손해를 보더라도 절대 다른 사람 가슴 아프게 하지 마라.”라는 교훈으로 하나님 사랑을 몸소 실천하며 힘들게 사셨던 어머님의 가르침이 선생의 삶에 기초를 이루었다. 삶이 힘들고 정상의 궤도에서 이탈할 수 있는 위험이나 유혹이 있을 때마다 어머니의 기도와 교훈을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선생의 글에서는 어머니에 대한 애잔한 시가 많다.

 

시집다시 지리산에서출간하다

2009년이 돼서야 다시 지리산에서첫 시집을 출간 했다. 시가 아니고서는 버텨내지 못하는 숙명을 타고났다고 하신 선생의 말씀처럼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시인으로 태어나신 분 같다. 수십 권의 시집을 출간하고도 시 인답지 못한 시인이 있다. 삶과 언행이 시와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는 시인이 아니고 언어 협잡꾼일 것이다. 선생 의 시를 정독하면서 시 속에 흐르는 역사의식과 내면의 아픔과 슬픈 시대의 고통을 느낀다.

 

다시 지리산에서

 

그보다 아플 수는 없다

눈이 많은 몸의 기억을 기억하다가

묵상하는 나무들, 겨울이다

 

저들은

세석고원, 달궁계곡, 피아골 어디에서고

죽어서 다시 산다는 결단으로 파고 든

빈사의 몸들 의지할 동지가 되어왔다

괴나리봇짐에 죽창에 스민

눈물보다 피보다 절고 짠

십만의 피 뿌리는, 녹두꽃 떨어지는 순간들을

보았을 것이다

고부황톳길 텅 빈 들녘에서 서럽게

서럽게 우는 청포장수를 보았을 것이다

 

생각이 목숨보다 질긴 몸들을 보았을 것이다

이데올로기, 피아골, 빨치산 낯선 이름으로

멧돼지 같은 울음 울며

아사하는 게 아니라고 동사하는 게 아니라고

어깃장을 놓으며 무너져 내리는 몸들을 보았을 것이다

눈이 많은 몸의 기억을 기억하다가

묵상하는 나무들, 겨울이다

피 머금어 아픈 나무아래 웅크리고 앉아

피 끓는, 울고 싶은 아무데나

돌 하나씩 던져 보아도

그 모진, 뜨거운 피 한 방울 남아있지 않거늘

지리산만 서러움은 왠일인가

 

그보다 아플 수는 없다.

눈이 많은 몸의 기억을 기억하다가

깊은 묵상에 든 나무들, 겨울이다.

 

꽃바람에 흔들리고 싶다

 

고요한곳으로 이끌어다오

잉태의 경험도 없이

옥문 안쪽 같이

아무것도 들이지도 키우지도 않은 곳으로

이끌어다오, 거기

꽃잎과 꽃잎사이를 지나는

꽃바람에 흔들리는 꽃잎같이

흔들리고 싶다.

 

오늘은 아름다운 노후를 살아야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한다는 선생은 저 세상에 가서도 이 세상의 삶이 헛되지 않았다고 고백할 것이고 언제 죽음이 찾아와도 기꺼이 손을 들어 V 자를 그리며 작별 인사를 하겠다.”라는 선생의 말씀에 원로의 모습은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는 순간까지 성장하고 천국에서 완성하라. 용서하며 살자.”는 말씀은 우리가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지표를 정해주시는 것 같아 나를 다독이게 했다. 요즈음은 다리가 여의치 않아 예전처럼 활발한 활동은 자제하고 계시지만 시흥의 올곧은 어르신으로서 문단의 원로로 존재 자체만으로도 든든한 믿음을 주고 계신다. 오래도록 건강하시길 기도한다.

 

 

이 글은 '예술시흥 2019 Vol.21'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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