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를 다녀오다

최영숙 | 기사입력 2017/01/25 [03:55]

경주를 다녀오다

최영숙 | 입력 : 2017/01/25 [03:55]

 

▲ 문무왕릉을 가다     ©최영숙

 

1월 중순 경주를 12일 다녀왔다. 그곳에서 만난 문무대왕릉의 바다는 깊고 푸르렀다.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이 자신의 시신을 불교식으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안장하면 용이 되어 침입해 들어오는 왜구를 막겠다고 한 유언을 따라서 장사하였다고 한다. 근처 해녀들은 이 근처를 신성시해서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바닷가에는 치성을 드리는 여인들이 있었다.

 

▲ 태종무열왕릉 앞에서 갈매기와 노는 관광객     ©최영숙

 

강화도 갈매기들처럼 관광객들이 던져 주는 새우깡에 맛들인 녀석들이 가득 모였다. 사육되는 갈매기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웠다. 그러나 이 모습 또한 만나기 힘든 풍경인지라 어느새 사진을 담는 자신을 보며 길들여지기는 갈매기와 다를 바가 없다는 묘한 생각이 들었다.

 

▲ 감은사지 석탑을 바라보다     © 최영숙

 

신라에서 가장 기품 있는 탑은 감은사지의 삼층석탑 2기가 아닐까 싶다. 국내에서 현존하는 탑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균형 잡힌 탑의 모습을 보면 경건함에 고개 숙여졌다. 이곳에는 문무왕과 관련된 만파식적(萬波息笛)의 전설이 있다.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이 보낸 동해의 용이 감은사로 와서 신문왕에게 검은 옥대를 주어 왕이 이 옥대로 피리인 만파식적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이 검은 옥대는 신문왕이 감은사에서 얻었다는 설과 이견대에서 얻었다는 두 이야기가 있다. 탑의 크기가 이 정도였다면 사찰의 규모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듯했다. 감은사가 아닌 감은사지라는 단어가 안타까웠다.

 

경주 양남 주상절리가 가깝게 있었다. 파도가 철썩철썩 주상절리를 부딪고 나갔다. 부채모양의 주상절리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주상절리 전망대에서 멀리 월성원자력발전소가 보였다.

 

▲ 월성원자력발전소앞     © 최영숙


월성원자력발전소는 우리나라 최초의 중수로형 원전으로 건설된 1호기는 197752일 건설에 착공하여 1982820일에 핵연료를 넣고 19821231일 시험발전을 시작하였다.

 

현재는 설비용량 677000급의 월성 1호기와 각각 70급인 월성 2·3·4호기가 가동 중에 있다.

 

월성원자력발전소 홍보관을 갔다. 홍보관 밖에는 원전을 반대하는 현수막과 관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홍보관 안에는 원자력에 대한 설명과 안전성과 경제적인 효과 등이 설명되어 있었다.

원전사고의 심각성을 가까운 주변 국가에서 보았기에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 골굴사에서 무예시범을 보이다     ©최영숙

 

불가의 전통 수행법인 선무도를 수행하는 골굴사를 갔다. 마침 무예시연을 하고 있었다. 해동제일 지장보살 영험성지인 골굴사는 약 1,500여 년 전 인도에서 온 광유 선인 일행이 경주 함월산에 정착하면서 골굴사와 기림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이 중에서 골굴사는 광유스님 일행이 인도의 석굴 사원을 본떠서 석굴사원 형태로 조성한 국내에서 가장 오랜 된 석굴사원이다.

인도에서 온 광유스님이 창건한 것에 상응하듯이 선무도 무예 시연에는 고난도의 인도의 요가도 선보였다. 만나기 어려운 선무도 시연을 볼 수 있어서 여행의 즐거움이 배가되었다.

석양이 질 무렵 불국사를 들렀다.

  

▲ 물국사 석가탑과 다보탑     ©최영숙

 

불국사를 삼국유사에는 십이연기 불교의 윤회설에 따라 김대성 자신의 전생의 부모님을 위해 석굴암 석불사를, 현생의 부모를 섬긴다는 뜻에서 불국사를 창건하였으며, 공사를 마치기 전에 죽자 국가에서 나서서 완성시켰다고 한다.

 

현존하는 건물의 배치를 보면, 대웅전은 중앙에 위치하여 남향하였고, 그 앞에 석등이 있으며, 다시 그 앞의 동서에 각각 석탑 1기가 서 있다. 동쪽 다보탑의 기묘하고 정밀한 형태는 유례가 드물고, 서쪽 석가탑은 예로부터 애달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즉 이 탑의 축조를 맡은 백제의 석공인 아사달의 아내 아사녀가 남편을 찾아왔으나 탑이 완성되기 전이라 만날 수 없었다. 조언하기를 불국사 아래에 있는 영지(影池)에 그 그림자가 비친다고 하여 그곳에 가서 기다리다가 석가탑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아서 마침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슬픈 이야기를 지니고 있어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부른다.

 

경주의 밤은 은은하고 또한 찬란하다. 경주의 야경을 보기위해 매운 칼바람을 맞으며 나섰다. 커다란 모자 모습의 내물왕릉이 마치 어린왕자의 보아뱀을 보는 듯했다. 경주는 어느 시절에 와도 늘 다른 모습을 보인다. 언제가 한 2~3년 정도 이곳에 머물러 해가 뜨는 새벽부터 밤까지 느긋하게 지켜보고 싶은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경주 최부자집을 찾았다. 경주 최부자집은 자그마치 12300년 동안 만석꾼을 유지했던 집안이었다. 이 가문이 이렇게 오랫동안 부를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은 육연과 육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경주 최부자댁 쌀통     ©최영숙

 

 육연(六然)

  

1. 자처초연(自處超然) : 스스로 초연하게 행동하라.

2. 대인애연(對人靄然): 남을 대할 때 온화하게 대하라.

3. 무사징연(無事澄然) : 일이 없을 때 마음을 맑게 지내라.

4. 유사감연(有事敢然): 일이 있을 때 적극적으로 대처하라.

5. 득의 담연(得意淡然) : 뜻을 이룬 뒤 담담하게 처신하라.

6. 실의태연(失意泰然) : 실패를 하더라도 태연하게 행동하라.

 

육훈(六訓)

 

1.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마라.

2. 만 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며, 만 석이 넘으면 사회에 환원하라.

3. 흉년에는 남의 땅을 사지 마라.

4. 과객(過客)은 후히 대접하라.

5. 며느리들은 시집온 뒤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6.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등이었다.

 

그러나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최부자집의 쌀통이었다. 배고픈 사람 누구나 가져갈 수 있게

쌀을 채워놓는 쌀통이었던 것이다. 종교계의 사랑의 쌀통도 최부자집에서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천년고도 경주의 밤     ©최영숙

 

우리가 김춘추로 더 잘 알고 있는 무열왕릉으로 왔다. 경내의 비각에는 국보 제25호로 지정된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있다, 이수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 새겨져 있어 신라 왕릉 가운데 매장된 왕이 명확한 유일한 능이었다. 이곳에서 경주의 지진 피해를 느낄 수 있었다. 담장의 기와들이 모두 내려져 있었다. 지진을 겪고 지진에 강하게 보강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김춘추와 함께 삼국통일의 기초를 이룬 김유신 장군의 묘로 왔다. 묘의 병풍석을 12지신으로 감싸고 있는 것이 독특했다. 바람이 자고 조강했다. 사람을 편하게 안정시키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이 명당이라는 문화해설사의 설명이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 용담정     © 최영숙


이번 여행을 통해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경주시 구미산 자락에 위치한 동학의 태동지 용담정(龍潭亭)을 방문한 것이었다. 최제우가 37세 되던 186045일 이곳에서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를 받아 동학을 창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수운은 21세에 구도의 길을 떠난다. 행상 등을 하며 세상의 소리를 듣는다. 1855년 수운은 울산에서 하늘로부터 책을 받는다. ‘천서(天書)’. 그 길로 수행에 들어가 1860년 마침내 용담정에서 도를 깨우친다. 이듬해 수운은 포덕에 나선다. 이후 그가 경주 서천을 지날 때 머리에서 광채가 나 빨래를 하던 아낙네들이 성인임을 먼저 알아본다. 그를 따르는 사람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관은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체포에 나선다. 수운은 쫓기는 몸이 되자 용담정에서 해월 최시형에게 도통을 전했다. 그 후 체포된 수운은 대구로 옮겨지고 국법을 어긴 죄로 끝내 참수되었다.

 

천 년의 고도 경주는 마치 전설의 고향 같았다. 발 내딛는 곳마다 전설이 있었고 새로운 전설이 쓰여지고 있었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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