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17일 구례 산수유산수유마을과 섬진강 매화마을의 봄꽃들을 만나기 위해 새벽 3시에 출발했다.
올해는 두 번에 걸쳐 남도의 봄꽃들을 보게 되었다.
구례 산수유 마을에 아침 8시경에 도착했다. 날씨가 봄날 같지 않게 추웠다. 꽃 몽우리들이 살짝 얼어 있었다. 산수유꽃들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겠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태양이 솟았다. 그러자 산수유들은 햇살을 받아 환하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온 마을과 들판이 환해지는 듯했다. 자연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 수 있었다.
돌담을 따라 마을길로 들어서면 노란색 터널을 만들어주는 듯했다.
담벽에도 산수유 한 그루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마을을 가로 지르는 냇물은 산수유꽃들과 하나를 이루었다.
산수유 나무 꽃들이 마을을 품고 있는 듯했다.
여인들은 봄나물을 캐고 있었다.
산수유나무 숲이 뒷산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구례 화엄사(華嚴寺)로 왔다.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각황전앞석등(국보 12호), 통일신라시대의 사사자삼층석탑(국보 35호), 조선 숙종 25년(1699)에 건립된 각황전(국보 67호)까지 3개의 국보가 한 곳에 있었다. 1000년 고찰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듯했다.
각황전과 나한전 사이에는 600년 된 매화나무 한 그루가 서있었다. 이 매화꽃은 붉음을 지나 검붉어서 ‘흑(黑)매화’라고 부른다고 했다. 처음 흑매화 모습을 보고 놀랐다. 마치 여인이 어서 오라고 손을 내밀고 서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흑매화는 오랜 세월, 이곳에서 방문객들을 맞아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600살의 흑매화는 300여 년 전 각황전이 세워질 무렵에도 이곳에서 지켜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흑매화가 살아 있는 또 다른 국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꽃을 보기에는 너무 일찍 왔다. 흑매화는 이제 막 붉은 눈을 뜨고 있었다.
흑매화 꽃이 피면 단청을 하지 않은 각황전과 검붉은 매화꽃이 어울리는 그 장엄함이 어떨까. 생각만으로 가슴이 설렜다.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12호 )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커다란 규모이다. 불자들이 경건하게 탑돌이를 하고 있었다.
국보 35호 사사자삼층석탑의 네 마리 사자상 사이로 원통전이 보였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사자상 너머로 불도들이 기원을 드리고 있었다.
몽긋한 꽃망울을 맺고 있는 흑매화 그늘로 사람이 지나왔다. 주위의 풍경으로 천년 고찰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이번 여행길에서는 화엄사의 흑매화가 핀 것을 만나지 못했다. 다음에는 꼭 만나보고 싶다는 염원을 가지게 하는 흑매화였다.
선암사로 왔다. 선암사의 고즈넉함과 대웅전 앞 홍매화의 아름다움은 오래전부터 익히 들어왔다. 꼭 한 번 찾고 싶은 사찰이었다.
선암사 홍매화도 이제 막 몽우리가 맺혀지고 있었다. 10일정도 지나야 필 것 같았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돌아서 나왔다.
매화축제가 열리는 섬진강 매화마을로 왔다. 홍매화 나무가 젊기 때문일까. 사찰에서는 피지 않던 홍매화가 산 아래에서는 만개했다.
‘홍쌍리매실가’를 찾았다. 홍매화와 어우러진 장독대가 눈에 들어왔다.
임권택 감독의 ‘천년학’이 생각났다. 죽음을 맞이하는 이의 머리맡에서 매화꽃이 분분히 흩날리던 장면이 잊혀지지 않았다. ‘천년학’을 촬영했던 정자에 올랐다. 내게는 영화 속의 그 느낌이 살아나지 않았다. 마음에 와 닿는 풍경을 만나려면 섬진강변을 더 찾아 다녀야 할 듯했다.
꿈밭에 봄마음
-김영랑-
굽어진 돌담을
돌아서 돌아서
달이 흐른다 놀이 흐른다.
하이얀 그림자
은실을 즈르르 몰아서
꽃밭에 봄 마음
가고 가고 또 간다
김영랑 시인의 시를 비롯해서 이이, 성삼문, 김용택, 안도현 등 시대를 망라한 시조와 시들이 매화꽃 그늘 속에 있었다.
굽어진 길과 대나무 숲이 보이는 풍경이 좋았다.
그러나 매화축제가 열리는 아랫마을 행사장에서는 "싸요, 싸요. 어서 오세요"라는 호객소리와 온 산을 쩡쩡 울리게 틀어놓은 음악소리들이 산 위로 그대로 올라왔다.
관광객들이 매화축제가 열리는 이곳까지 왔다면 어디로 도망가지도 않을진데 너무 시끄럽게 울려대는 소음들은 집중해서 꽃을 감상 할 수 없게 했다.
매화꽃과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매화꽃 축제장을 벗어났다. 섬진강변에 매화가 피었다. 흐드러진 꽃들이 보였다. 잠시 머물렀다.
돌아오면서도 화엄사의 고즈넉한 뜰에 서 있던 고혹적인 흑매화가 눈에 어른거렸다.
꽃을 피우지 않은 산사의 매화나무들에게서 더 깊은 감흥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봄날,
꿈결같이 화엄사 흑매화를 만나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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