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우듬치 견적지를 보고 정읍으로 떠났다.
정읍에서는 백산성-전봉준고택-전봉준 단비-말목장터-사발통문작성모의집-무명동학농민위령탑-고부관아터-황토현기념비-동학농민혁명기념관-만석보유지비를 답사했다.
| ▲ 배들평야가 한 눈에 들어오는 백산 이곳에서 격문을 발표하고 농민들의 봉기와 호응을 촉구하였다.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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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백산성으로 향했다. 1894년 3월20일 무장(茂長)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고부관아를 점령한 뒤, 백산으로 이동하였다. 백산은 해발 47m에 불과하지만 부안, 김제, 고부, 태인 등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배들평야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동학농민군은 이곳에서 총대장 전봉준, 총관령 김개남ㆍ손화중, 영솔장 최경선, 총참모 김덕명ㆍ오시영, 비서 송희옥ㆍ정백현 등으로 진영을 확대개편하고 연합부대를 구성하는 한편, 호남창의대장소의 이름으로 격문을 발표하고 농민들의 봉기와 호응을 촉구하였다.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이라는 이름을 들었던 것은 전라도 각지에서 몰려든 농민들이 백산성에 집결했을 때 농민들이 서면 흰옷을 입은 농민들이 백산을 만들었고 앉으면 죽창들이 하늘을 찌를 듯했기 때문이다.
사적293호 전봉준 고택으로 왔다. 전봉준은 이곳에서 한약방과 서당을 하면서 동지를 규합했다.
'새야새야' 노래에서 전봉준을 기억하게 하는 것은 어린 시절 엄마를 따라 불렀던 노래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밭을 매거나 고추 등을 딸 때 흥얼흥얼 이 노래를 부르셨다. 엄마는 지나는 듯 말씀하시길 녹두장군은 전봉준을 이른다고 하셨다. 우리 세대까지는 불려졌던 이 노래가 요즘 어린이들이 이 노래를 알 수 있을까 싶었다. 세대가 빠르게 단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야 새야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은새야
녹두꽃이 떨어지면 부지깽이 매맞는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은새야
아버지의 넋새보오 엄마죽은 넋이외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너는어이 널라왔니
솔잎댓잎 푸릇푸릇 봄철인가 널라왔지
이 사진 한 장은 100년 뒤 전봉준을 다시 불러냈다.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안도현 시인은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라는 시로 등단했다. 1984년이라는 시대는 다시 전봉준이 간절했던 것이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
_ 안도현
눈 내리는 만경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가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 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 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가니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헤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갈 것을
우리 성상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목숨 타오르겠네
봉준이 이 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 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전봉준 단비로 왔다.
공주의 패전에서 전봉준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원평 태인의 마지막 전투에서도 패배하여 입암산성과 백양사를 거쳐 회문산 아래 순창 피노리로 피했다. 전봉준은 피노리에서 옛 부하 김경천의 변절로 체포되어, 1895년 3월30일 손화중, 최경선 등과 함께 처형당하였다. 비석에는 새야새야 노래와 전봉준의 절명시가 있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절명시
時來天地皆同力 때를 만나서는 천지가 모두 힘을 합치더니
運去英雄不自謀 운이 다하매 영웅도 스스로 도모할 길이 없구나
愛民正義我無失 백성을 사랑하고 의를 세움에 나 또한 잘못이 없건마는
爲國丹心誰有知 나라를 위한 붉은 마음을 누가 알까
동학농민운동과 전봉준은 떼어놓고 말 할 수가 없다. 벽촌에서 시골 훈장을 하던 전봉준을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로 거듭 태어나 세상을 바꾸려 했던 녹두장군 전봉준의 일생은 시대를 지나면서 거듭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 ▲ 말목장터 앞 정읍사무소에 쓰인 2014년 농민들의 요구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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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목장터는 1894년 1월10일 전봉준 등이 고부관아로 나아가기 전, 이 일대 농민 1천여명이 집결하였던 곳이다. 말목장터 앞 정읍사무소에는 '80㎏ 쌀 1가마 8년 만에 4,000원 인상이 왠말이냐! 정부는 쌀목표가격 80㎏ 쌀 1가마 23만원 실시하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 ▲ 동학농민혁명을 모의하며 사발통문을 작성한 집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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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모의장소로 왔다.
사발통문(沙鉢通文)은 어떤 일을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람 이름을 사발 모양으로 둥글게 삥 돌려 적어, 같은 뜻을 가진 다른 사람을 모으기 위해 널리 알리는 문서를 말한다.
동학 농민 운동 때 동학군들이 사용하였던 통문이 유명하다. 1893년 11월 고부군 서부면 죽산리(현재 정읍군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송두호의 집에서 전봉준 등 20명이 모여 고부 농민 항쟁을 계획하고 그 결의를 서명하여 각 리의 집강에게 돌렸는데, 1968년 12월 세상에 공개되면서 고부농민항쟁이 혁명적 거사 계획에서 치밀하게 진행되었음을 알려주게 되었다.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하라.
1.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하라.
2.군수에게 아첨하여 백성을 침학한 관리를 격징하라.
3.전주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직접 향하라.
마을 입구에는 동학혁명모의탑이 있었다. 시아버지가 사발통문에 이름을 적었던 동네주민에 의하면 이 탑은 송두호 씨 후손 송기태 씨가 3년 동안 정으로 쪼아서 이 탑을 세웠다고 했다. 동학농민운동이 실패하고 이 마을 사람들은 거의 모두 부안 등으로 도망을 갔다고 했다.
녹두회관 앞에는 무명동학농민 위령탑이 있었다.
| ▲ 조병갑의 수탈과 학정으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난 고부관아터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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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관아터로 왔다.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현 고부초등학교. 고부초는 1906년 8월 15일 사립광화학교로 개교했다. 2013년 9월 1일 현재 특수학급까지 총 52명의 학생들이 다니고 있다. 올해로 개교 108주년을 맞는다. 올해가 동학농민운동 120주년이다. 탐관오리 조병갑이 있던 이 고부관아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고 12년 후에 사립광화학교가 개교했던 것이다. 한일병합조약이 1910년 8월 22일 조인되었는데 그보다도 빨랐다.
고부는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 된 고부봉기의 중심지이었다. 그러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19개 면을 관장하는 군에서 일개 면소재지로 몰락하였다. 이곳은 동학농민혁명의 본 고장이면서도 가장 철저하게 파괴되어 버렸다. 고부관아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지점의 만석보 유지비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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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어두워졌다. 답사의 마지막은 동학농민혁명을 시초가 된 만석보유지비로 왔다.
배들평 농민은 정읍천 아래에 보(예동보)를 막아 물을 댔다. 이 보는 가뭄이 들어도 풍년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만석보라 하였다. 그러나 조병갑은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새롭게 보를 쌓았다. 이 때문에 홍수가 지면 오히려 냇물이 범람하여 상류의 논이 피해를 입었다.
예동마을뿐만 아니라 보를 쌓은 첫해에는 수세를 징수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어기고 좋은 논에는 두말, 나쁜 논에는 한 말의 수세를 강제로 징수하였다. 이에 농민은 봉기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게 되었다. 만석보는 고부군수 조병갑 학정의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 ▲ 정읍 마을 구멍가게 담벼락에 그려진 동학 횃불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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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유적지를 다녀오면서 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동학농민운동은 시대에 따라 이름을 달리했다. 동학난에서 동학혁명, 동학농민운동까지 이름이 바뀌는 것에 따라 역사적인 평가도 달라졌다. 실패한 혁명이면서 이율배반적으로 3.1운동 등 항일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절반의 성공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의 민초들의 이야기와 두 거두 전봉준과 김개남은 후대에 시인과 소설가들로 인해 새롭게 조명되었다. 북한에서 쓴 박태원 대하역사소설 '갑오농민전쟁'은 1988년 납,월북작가의 전면해금으로 1989년 깊은샘에서 출간되었다.
동학농민운동 지도자 전봉준은 이미 그 당대의 '새야새야' 노래와 1984년의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란 시를 통해 다시 불려졌다. 김개남은 박경리 소설 '토지'에서 동학의병장 김개주로 거듭난다. 김개주는 최참판댁 윤씨 부인을 겁탈해서 김환을 낳는다. 별당아씨와 달아나는 김환은 나중에 항일운동과 무장 독립운동을 한다. 동학 의병장이었던 아버지 김개주의 뒤를 이어 일본에 대항한 것이다. 현시점에서도 새롭게 해석되는 동학농민운동은 1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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