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10년 2월 22일 간월암에 가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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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22일 바닷물이 가득 찼을 때는 마치 한 송이의 연꽃 또는 한척의 배가 떠 있는 듯 하다하여 원통대(圓通臺) 또는 연화대(蓮花臺)라고도 하는 간월암을 다녀왔다.
이곳은 신라시대의 원효대사가 수행했던 곳이다. 또한 고려 말에는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수도(修道) 하다 하루는 달을 보고 홀연히 도를 깨치고 난 후 암자 이름을 간월암(看月菴)이라 하였다고 한다.
날씨는 풍경을 바꾼다. 2007년 왔을 때의 간월암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구름이 낮고 짙게 깔려 있었다.
기륭해수관세음보살님 탱화가 모셔져 있는 용왕단은 가는 불빛만이 새어 나왔다.
간월암을 떠올리면 아름다웠던 그날의 풍경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득도한 이후, 이 암자는 조선왕조의 배불정책(拜佛政策)으로 폐사되었다. 1941년 만공선사가 제자인 마벽초 선사에게 중창(重創)을 명하고 친히 조국해방 천일기도(千日祈禱)를 올렸다. 회향(回向) 삼일 만에 광복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대웅전 안에는 무학대사, 만공선사, 마벽초 선사까지 세 분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었다.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이 없어질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원을 세운 지장보살을 모신 지장전을 갔다. 놀라웠다. 벽면에는 이름까지 버젓이 밝힌 “한동균 건강 발원"을 비롯해 “수능대박”,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우리 남편 오래 살게 해주세요.”등이 어지럽게 낙서되어 있었다. 기원의 글들은 간절했다. 그러나 이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문화권의 문자는 하나도 없었다. 우리의 위대한 한글뿐이었다. 우리들이 문화재를 대함에 있어서 어째 이토록 무지하고 무례할 수 있는가 싶어 분노를 넘어 슬퍼졌다.
지장보살은 자기가 세운 원력을 성취하기 위해서 자기가 구원할 중생이 있는 곳에 찾아간다고 한다.
지장보살은 “괜찮다, 괜찮다.”고 할 수 있다 싶겠지만 낙서를 바라보는 다른 중생은 또한 괴로웠다. 다음부터는 제발 이러지 말기를 기원했다.
지장전이 멀리 보였다. 오래된 암자나 사찰에 가면 긴 세월 함께 보낸 나무들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의 나무들 또한 세월의 깊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새로운 풍경을 만났다. 간월암 앞에서는 대구의 자비선사에서 올라온 불자들이 방생회를 하고 있었다.
방생회는 경건히 치러지고 있었다.
| ▲ 방생을 하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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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생을 하기 위해 불자들이 기도를 하면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생은 다른 사람들이 잡은 물고기 ·새 ·짐승 따위의 산 것들을 사서, 산에나 못에 놓아 살려 주는 것을 말한다. 방생회를 마친 불자들이 순서에 따라 방생을 했다.
신도 한 분이 어린 우럭 한 마리를 방생했다.
어린 우럭이 바다로 미끄러지듯 헤엄쳐 들어갔다. 불자는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서는 어린 생명이 잘 자라기를 두 손을 합장해서 기원했다.
불자들이 방생하는 동안 스님은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간월암 앞에서는 방생을 하면서 기원도 함께했다. 용왕단 옆에는 연꽃으로 피어나는 촛불들을 켜서 기원했다. 또 지장전 벽에는 낙서로 간절한 기원들을 적었다.
기원의 방식은 서로 달랐다.
방식은 달라도 기원을 표현하는 방법에도 예의와 원칙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송이의 연꽃으로 피어있는 간월암은 작지만 아름다웠다.
유구한 역사와 많은 이야기들을 담은 간월암에서 만난 여러 풍경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불자는 아니었지만 돌아오면서 새로운 세상으로 방생된 어린 생명들이 제 수명을 다하고 살기를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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