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7일 오전 10시 40분, 경기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장준하 공원에서 고 장준하 선생 37주기 추모식과 더불어 장준하 공원 개원식이 열렸다.
장준하(張俊河, 1918년 8월 27일~1975년 8월 17일, 평안북도 의주)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뒤에는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정치인이었으며,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한 언론인으로 정치 격변기의 정점에서 어느 날 의문사했다.
장준하 선생은 1918년 8월 27일 평북 의주(義州)에서 장석인과 김경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20년 장석인의 독립운동으로 일본 경찰에 쫓겨 가족이 삭주(朔州)로 이사했다. 1944년 일본군 학도병으로 징집되었다가, 그해 7월 7일 윤경빈 외 2명과 함께 부대를 탈출했다. 그 후 중국 유격대에서 김준엽과 만나 동행했다. 8월에는 한국광복군 훈련반에 입소해 김준엽, 윤재현과 함께 『등불』 1·2호를 발간했다.
1945년 1월 31일 중경(重慶)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도착했다. 서안(西安)에서 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되었고, OSS(미국 전략정보처) 제1기 훈련반에 편입되어 광복군 중위로 진급했다. 해방 후 임정 요인들과 함께 귀국해 김구 선생의 비서, 비상국민회의 서기 등을 역임했다. 1953년 부산에서 월간지 《사상》을 발간했다가 폐간한 이후 다시 《사상계(思想界)》로 창간했다. 1962년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으며, 1964년 한·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위원회의 초청 연사로 전국을 순회하며 70여 회의 연설을 통해 박정희 정권을 비판했다. 1967년 제7대 총선에 신민당 후보로 서울 동대문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압도적인 지지로 옥중 당선되었고, 1971년 자서전 『돌베개』를 출간했다. 1974년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위반 혐의 제1호로 구속되었고, 이듬해인 1975년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에서 등산 중 의문사했다.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천주교 묘지에 묻혔었다.
37주기 추도식을 겸한 공원 개원식에는 8월 1일 이장 과정에서 장준하 선생 타살 의혹이 증폭되며 쏠린 관심을 반영하듯, 부인 김희숙(88) 여사와 장남 장호권(63) 씨 등 유족과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한승헌 변호사, 이해찬 민주통합당 대표, 정세균 민주당 경선후보, 정운찬 전 총리, 이인재 파주시장 등 500여 명이 참석했다.
추도식은 파주시립합창단이 부르는 뮤지컬 <청년 장준하>의 삽입곡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가 울려 퍼지면서 시작됐다.
이해찬 민주통합당 대표는 추도사에서 “고 장준하 선생 제막식에 오니 가슴이 뭉클합니다. 1975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감금되어 있을 때 안양교도소에서 백기완 선생님과 장준하 선생님을 처음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돌베개』를 읽고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고 제가 만든 출판사 이름도 ‘돌베개’로 짓게 되었습니다. 독립운동을 한 선현들의 삶의 자취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1975년 실족사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도저히 믿지 못했지만 당시는 박정희 정권이 극악을 더해 후배들이 제대로 모시지 못했습니다. 진실을 밝히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위해서 당신을 다 바치셨습니다. 저희가 이제 남북관계를 재설정해서 한반도에 평화가 오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이인재 파주시장은 제막식 추모사에서 “선생님 이제 조금 편안하십니까? 선생님을 흠모하는 이들이 여기에 모였습니다. 오직 나라를 구하고 민족을 일으키고자 애쓰셨던 선생님의 일생이 다시금 살아납니다”라며 “광탄면 나사렛공원묘지에 묻혀 계신 선생님을 뵈러 가 수해로 무너져 내린 무덤 주변을 보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이곳으로 모시게 됐습니다”라고 밝혔다.
유족 대표인 큰아들 장호권(63) 씨가 인사말을 했다. “이장하면서 37년 만에 백골의 아버님을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머리에 참혹한 상흔을 보면서 그동안 참았던 한과 분노가 뼛속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습니다. 그러나 곧 삭였습니다. 내가 37년 만에 너희 앞에 나타난 것은 아직도 못다 한 과제가 있으니 그것을 해결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장준하 공원에는 선생을 상징하는 돌베개를 놓았다. 추모벽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파주는 항전의 땅입니다. 삼국시대부터 삶의 터전을 지켜내려는 사투가 있었고, 근래 6·25전쟁에서도 자유를 수호한 도시입니다. 분단의 역사 접경도시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지만 매우 역동적인 모습으로 평화로운 미래를 열어갑니다. 장준하 선생은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 《사상계》를 발간해 지식인의 등대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고자 온몸을 불살랐으며, 분단된 조국의 평화통일에 헌신했습니다.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구국 장정의 길에 올랐던 장준하 선생의 굳은 의지를 파주에 다시금 살립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결코 거저 얻어지지 않았음을 파주에서 가르치고 일깨워 나가겠습니다. 연고도 없이 묻혀 계셨던 파주 광탄 나사렛공원묘지에서 이곳 통일동산으로 오신 이유는 수많은 호국영령이 선생의 안타까운 영혼을 부른 때문입니다. 죽어서도 살아있는 장준하 선생의 애국애족 정신, 의로운 기상은 우리 파주와 영원히 함께할 것입니다.”
가고. 요즘 애들이 말하는 공동체 생활이었어 이제 바람이 있다면 ‘지금부터 시작이고 싸움이야! 나같이 당한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 나라의 주인이 돼야지, 열심히 싸워야 해요! 젊은 사람들 다 여러분 책임이야”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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