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지인이 예수살이공동체에서 안중근 순국 100주년 기념순례를 떠난다고 했다. 동행할 수 있는지 물었다. 다행히 2010년 3월 23~27까지 4박5일 일정에 합류할 수 있었다.
안중근의사가 여순감옥에서 쓴 자서전 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와 객관적인 사실들을 기록한 당시의 기록들을 바탕으로 그의 삶을 따라가 봤다.
| ▲ 안중근의사가 수감되었던 감방의 안 풍경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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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독방에서 안중근의사의 자서전 '안응칠역사'는 쓰여졌다.
“나는 1879년 기묘년 7월 16일, 대한국 황해도 해주보 수양산 아래에서 한 남아로 태어났다. 나의 성은 안이요, 이름은 중근, 어릴 적의 이름은 응칠이다. (나의 타고난 성질이 가볍고 급한듯하여 이름을 중근이라 짓고, 가슴과 배에 일곱 개의 검은 점이 있어 어릴 적의 이름을 응칠이라 하였다 한다)."
안중근의 조부 안인수는 진해현감으로 있었고 부친 안태훈은 문필이 출중한 지사였다.
안중근의사는 어려서 사냥을 좋아해서 걱정하는 친구에게 “옛날 초나라의 패왕 항우가 말하기를 ‘글이란 이름이나 적을 줄 알면 족하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만고영웅 초패왕의 명예는 오히려 천추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 나는 학문으로써 세상에 유명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항우가 장부라면 나도 또한 장부이러니 너희들은 다시는 이런 말 하지마라.” 고했다."
안중근의 자서전 ‘이응칠역사’는 근엄한 모습만이 아닌 솔직담백하고 기개가 넘치는 그의 삶이 드러나 있었다.
17,8세의 젊은 날 안중근 장군이 즐겨하던 일이 네 가지 있었다.
"첫째는, 친구와 의를 맺는 것이오, 친우결의(親友結義)
둘째는,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것이오, 음주가무(飮酒歌舞)
셋째는, 총으로 사냥하는 것이요, 총포수렵(銃砲狩獵)
넷째는, 날랜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이다. 기치준마(騎馳駿馬)였다."
안중근의사가 어린 시절부터 호방하고 무인적(武人的) 성향이 강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1905년 12월 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대한독립의 날까지 단주를 결심했다.
| ▲ 2010년 3월 26일 다롄성당에서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추모 미사를 드리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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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 때 프랑스 신부 홍석구한테서 <도마>라는 교명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는 그 후 10년간 황해도 각 지방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는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해서 홍신부와 서울로 뭬텔대주교를 찾아가서 대학 설립을 의논하였다. 그러나 뭬텔대주교는 “한국인이 만약 학문을 하게 되면 신앙생활에 좋지 않을 것이니 다시는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마라.”고 했다. 두 번 세 번 다시 권고하였지만 끝내 거부하였다."
안중근은 “천주교의 진리는 믿을지언정 외국인의 심정은 믿을 것이 못된다.”하고 프랑스어를 배우던 것도 내던지고 말았다. 친구가 묻기를, “무엇 때문에 배우던 것을 포기하였느냐.” 라고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일본말을 배우는 자는 일본의 종놈이 되고, 영국 말을 배우는 자는 영국의 종놈이 된다. 내가 만약 프랑스 말을 배우다가는 프랑스의 종놈을 면치 못할 것이기에 내던져 버린 것이다. 만일 우리 한국이 세계에 위력을 떨친다면 세계 사람들이 모두 한국말을 배우게 될 것이니 너는 조금도 걱정하지 마라.”고 하였다. 그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물러갔다."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100년 전 안중근 의사가 한국이 세계에 위력을 떨치면 세계가 한국말을 배우게 된다는 당당함과 한국의 저력을 믿는 깊은 자부심을 보면서 그의 깊은 세계를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 후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설립하고 국채보상회운동을 하였다.
1907년 울라지보스또크에가서 이범운, 김두성과 함께 의병을 조직하고 의병 참모중장으로 의병을 거느리고 경흥, 회령에서 일군과 싸웠다. 1909년 1월 로씨야카리에서 11명의 동지와 단지동맹을 결성하고 맹주가 되어 조국과 민족을 위해 한 몸 바칠 것을 맹세하였다.
그에게 선지자적인 예감이 있었던 것일까? 그의 자서전을 보면 그의 거사는 운명적이었다는 대목이 있었다.
"1908년 9월이었다. 그때 나는 연추 방면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하루는 갑자기 아무 까닭도 없이 마음이 울적해지며 초조함을 이길 수 없고 스스로 진정하기 어려워 친구 몇 사람더러'나는 지금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려고 하오.’하였더니 그 사람들 말이‘왜 그러는 것이오. 아무런 기약도 없이 졸지에 가려는 것이오.’하므로 나는 말하되‘나도 그 까닭을 모르겠소. 저절로 마음에 번민이 일어나서, 도저히 이곳에 더 머물고 있을 생각이 없어, 떠나려는 것이오.’하였다. 그들은 다시 묻기를 ‘이제 가면 언제 오는 것이오.’하므로, 나는 무심중에 갑자기 대답하기를‘다시 안돌아 오겠소.’하자 그들은 무척 괴상히 생각했을 것이오, "
| ▲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저격한 하얼빈역 전경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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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이등박문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해 소원하던 목적을 이제야 이루게 되었다니! 이놈의 늙은 도둑을 이제야 내 손으로 끝장내는구나!” 며 기뻐했다.
1909년 10월 22일 하얼빈에 도착했다.
그는 거사를 앞두고 여관방 등불 밑에서 장부가(丈夫歌)를 지었다.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음이로다
천하를 응시함이여 어느 날에 업을 이룰꼬
동풍이 점점 참(차가움)이여 장사의 의기가 뜨겁도다
분개히 한 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쥐도적 이등이여 어찌 즐겨 목숨을 비길꼬
어찌 이에 이를 줄을 헤아렸으리요.
사세가 고연하도다.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만세 만세여 대한 독립이로다.
만세 만만세 대한 동포로다."
이등박문의 죽음은 예정된 것이었다. 10월 24일 안중근, 우덕순, 조도순은 이토히로부미가 탄 열차가 차이지거우역에서 오전 6시경에 중간 정차한다는 첩보를 입수 차이자거우로 향했다. 안중근의 지략은 이곳에서 빛났다.
“모레 아침 여섯 시쯤이면 아직 날이 밝기 전이니 이등박문이 반드시 정거장에 내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요. 또 설사 차에서 내려 시찰한다 하여도 어둠 속이라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분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내가 이등박문의 모습을 모르는 데야 어찌 일을 치를 수가 있을 것이랴.”
“나는 오늘 하얼빈으로 돌아가서, 내일 두 곳에서 일을 치르면 충분히 유리할 것이다. 만일 우동지가 일을 성사시키지 못한다면 내가 꼭 성사시킬 것이요, 만일 내가 일을 성사시키지 못한다면 우동지가 꼭 일을 성사시켜야 할 것이다. 또 만일 두 곳에서 다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다시 자금을 마련해서, 다시 상의해서 거사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완전한 방책일 것이다.”하였다."
안중근의 예측은 정확했다. 그는 문무를 겸비한 지장이었다. 10월 26일 거사 당일 차이자거우역에서 우덕순일행은 수상히 여긴 러시아 경비경에게 잡혀 역구내 여관에 감금되었다. 열차는 정차하지 않고 안중근이 기다리는 하얼빈으로 직행했다.
안중근의 혜안으로 두 겹으로 겹쳐진 그물망을 이등박문은 피할 수 없었다.
| ▲ 하얼빈역의 의거 현장은 화물 하역장에 위치해 있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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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은 이등박문의 얼굴을 몰랐다. 그러나 그는 직감적으로 이등박문을 알아보았다.
”러시아 관리들이 호위하고 오는 무리 중에 맨 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한 일 개 조그마한 늙은이가 이같이 염치없이 감히 천지 사이를 활보하고 있지 않은가. ‘저 자그마한 늙은이가 분명 노적 이등박문일 것이다.’ 나는 곧 단총을 뽑아들고, 그 오른쪽을 향하여 4발을 쏘았다.“ ”그때가 바로 1909년 음력 9월 13일 오전 9시 반쯤이었다. 그때 나는 하늘을 향하여 목이 터져라 큰 소리로 ‘대한 만세’를 세 번 부른 다음, 정거장 헌병 분파소로 붙잡혀 들어갔다.“
그의 의거는 성공했다. 세계는 놀랐다. 조선 황실과 동아시아와 구미 각국의 안중근의거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조선의 반응
"태황제(고종)는 말하기를 이등은 동양의 인걸이고 동양평화를 관심하는 사람이다. 그는 아국에 충실하고 정의로우니 실로 아국의 慈父(자부)이다. 그의 죽음은 일본뿐만 아니라 아국 및 동양의 불행이다. 이등통감이 재임할 때 한 번도 통감부를 방문하지 않았던 것이 유감스럽다. 나는 11월 4일 통감부 이등의 원 거소로 가서 조문을 하려고 한다. 한국인이 이등을 살해했다니 나의 얼굴이 붉어진다. 그를 죽인 사람은 이등공의 진의를 모르는 해외류랑자로 한국사회의 파괴자이고 가증스런자이다.
태황제는 일본에 있는 황태자에게 상복을 입고 이등공의 장례에 참가하여 석 달 간의 상기(喪基)를 지키라고 지시하였다.
또한 태황제는 한황(순종)이 이등에게 문충 (文忠)이란 익호를 내릴 것을 결정하였다.
태황제와 엄비는 눈물을 흘리면서 일본에서 공부하는 황태자(실은 인질, 고종의 셋째아들)의 안전과 전도를 걱정하였다.
민영휘: 친족들에게 말하길 당년 민비가 한국주재 일본공사 미우라고로에게 살해당한 것은 기실 일본정부가 지시 한 것이다. 오늘 안중근이 일본정부를 대표하는 이등을 죽였으니 나라 위해 복수 한 것이고 우리의 쌓인 원한도 풀었다. 안중근은 이미 체포되었다. 이후 만약 사형에 처해지면 그는 스스로 깨달아 유감이 없을 것이다.
이완용: 자신의 안전을 걱정하여 외출을 삼갔고 심지어 방문객을 거절하였다.
대한매일신보: 유생, 반일단체 및 열혈청년들은 몹시 기뻐하였다. 이등의 죽음은 한국의 사기가 완전히 죽지 않았음을 증명하며 그릇된 통감정책이 낳은 결과라고 하였다. 양기탁, 신채호등은 소식을 들은 후 연회를 차려 축배를 들면서 대한만세를 외쳤다.
학생들은 이등의 추도회에 참가하길 거부하였다. 서북학회 간부 이도원 및 소속 학생들은 한황이 일본에 사죄하러 가면 목숨으로 저지하겠다고 결심하였다.
외국선교사들이 정부가 조직한 이등공추도회에 참가하려고 하자 한인교도들은 만약 정말 참가하면 우리 전부 퇴교하겠다고 반항하였다.
천도교주 손병희는 이등은 위인이며 공헌이 크다. 그의 죽음은 동양의 불행이요 한국은 곧 망국을 불러 올 것이라고 말하였다. "
미주 한인동태
"신한국보(11월2일)자 ‘한국침략원흉 이등의 죽음’이란 제목으로 장편사론을 발표하였다. “천하에 열사가 많으나 안중근 같은 의사는 고금 이래 없었다. 그는 이천만동포가 질타하는 이등을 죽였다.”
일본의 민심동태
"동경의 모 단체는 이등공의 장례에 한인을 죽여 제사 지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선동하였다."
중국의 반응
중국의 혁명가 손문은 안중근의사에게 제사를 썼다.
“공은 삼한을 뒤덮고 이름은 만국에 떨쳤으니
살아 백세가 아니라도 죽어 천추에 빛나리
약국의 죄인이 강국의 재상보다 강하여
분연히 타향에서 이등후작을 베였노라“
러시아 의 반응
"<할빈일보(10월27자)및 원동보>: 대정치가 이등은 국가위해 목숨 바친 위인이다. 러시아는 그의 피살에 동정을 표시한다. 하지만 그는 한국에서 저지른 과분한 죄행에 대해 책임이 있다. 때문에 한국인의 증오가 그에게 집중되었다.
<하얼빈의 로씨신문 10월 28자 사론>: "한인들은 고국의 독립을 상실한 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나라 위해 복수할 기회를 찾던 한 한국인이 과감하게 이등을 격살하였다. 타국에 피비린 탄압을 가한 자는 이 사건에서 교훈을 섭취해야 할 것이다. 러시아도 만주에서의 현상을 총결하여 반항자의 총소리가 나타나는 것을 방지해야 할 것이다.“
러시아 정부는 이 문장에 노하여 이 신문의 총편을 투옥하고 오백루블의 벌금까지 안겼다.
러시아황제 니콜라2세는 동경에 보내는 조전에 저명한 정치가 이등공은 일로간의 평화와 우의를 실현하기 위해 할빈에 갔는데 불행하게 야수 같은 음모에 살해 되였다고 하였다."
프랑스
"<애국파>신문은 “이등의 과격하고 독단적인 한국경영은 실책이었으며 피살 당한것은 마땅한 징벌이다.”
영국
"이등은 건설적대정치가의 특징을 구비했다. 그는 정의와 온건한 정책을 옹호하며 평화를 지도하는 위인이었다."
미국
"뉴욕의 신문: 이등이 한국주권을 강탈하였기에 한국인은 그를 원수로 여긴다. 그래도 요행 5년이나 살고 오늘에야 살해되었다."
"시카고의 신문 : 이등의 죽음은 그의 악정을 시행한 보응이다. 일본은 한국에 대한 착오적 정책을 반성해야한다."
각국의 입장에 따라 자신이 처한 위치에 따라 다양한 반응들이 나왔다.
| ▲ 안중근의사가 의거 직후 수감된 옛 일본 총영사관 자리 (현재는 소학교가 들어서 있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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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가 의거 직후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돼 이송되었던 일본 총영사관자리는 현재 2002년부터 소학교가 들어서 있었다.
이곳에서부터 안중근 장군의 두 번째 의거인 옥중투쟁과 역사에 길이 남을 동양평화론이 시작되었다.
"미조부찌 검찰관이 이등박문을 가해한 까닭에 대하여 묻기에,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이등박문을 저격한 까닭은 이등박문의 가공할 죄악 때문이다. 그 죄악은 다음과 같다.
1. 한국 민 황후(명성황후)를 시해한 죄요,
2. 한국 황제를 폐위한 죄요,
3. 의사 5조약과 정미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요,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케 한 죄요,
8. 군대를 해산시킨 죄요,
9. 교육을 방해한 죄요,
10.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요,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요,
13. 현제 한국과 일본 간에는 분쟁이 끊이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도, 마치 한국이 무사태평한 것처럼 위로는 천황을 기만한 죄요,
14. 동양평화를 파괴한 죄요,
15. 일본 천황폐하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때문이다.“ 라고 답했다.
검찰관이 나의 진술을 다 듣고는 깜짝 놀라면서,
“이제 말을 듣고 보니, 당신은 참으로 동양의 義士(의사)라 할 수 있겠고, 의사를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법은 없으니 염려하지 마시오.” 하는 것이었다. 나는 답변하기를,
“내가 죽고 사는 것은 논할 것 없고 이 뜻을 속히 일본 천황폐하에게 아뢰어라 그래서 속히 이등박문의 옳지 못한 정략을 고쳐서, 동양의 위급한 대세를 바로잡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고 했다."
안중근은 이등박문이 죽어야 하는 15가지 죄 중 “1. 한국 민 황후(명성황후)를 시해한 죄요,” 2. 한국 황제를 폐위한 죄.“라고 했다. 고종황제는 안중근을 “그를 죽인 사람은 이등공의 진의를 모르는 해외유랑자로 한국사회의 파괴자이고 가증스러운 자이다.”라고 했다. 안중근은 심중을 말할 수 있었지만 명성황후가 비참하게 피살되고, 자신은 일본에 의해 폐위를 당한 고종은 심중을 들어낼 수 없었다.
| ▲ 안중근의사가 수감되었던 감방과 간수장 방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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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등 9명은 1909년 11월 1일 하얼빈역에서 오전 11시 25분에 발차하는 기차를 12명 헌병들의 감시 하에 11월 3일 여순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안중근의 자서전을 보면 여순의 일본관원들을 그를 상당히 존중해주었다. 감옥장은 그의 생활여를 돌봐주었고 검사관도 예절있게 대했다.
여순감옥으로 압송된 사흘 뒤 (1909년 11월 6일) 안의사는 서면으로 이등이 한국을 침략한 15조의 죄목을 공소하는 동시에 이등을 사살한 정당성을 피력하였다. “나는 의병참모중장의 신분으로 각지에서 전투를 벌였고 이번 거사도 한국독립전쟁의 일부분이다.” “본 사건은 정치문제이며,” “ 검찰관과 변호사들은 모두 이등통감의 정치방침은 완벽무결한데 내가 오해를 한 거라고 하지만 그건 잘못이다. 난 오해를 하지 않았을 뿐더러 너무 똑똑히 알고 있다.” “나는 한국 독립을 위해 동양평화를 위해 이등을 제거하였다.” “나는 적군에 잡힌 포로다.” “ 때문에 응당 국제공법에 의해 처벌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일본 당국은 안중근이 중대한 국사정치범이라 일본형법에 의해 사형에 처할 수 없음을 잘알고 있었다.
일본 정부의 강경파는 심판에 간섭하려고 했다.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는 안중근의거의 정당성을 이해하고 무기도형으로 판결하려고 고려하고 있었다. 이러한 동향을 탐지한 일본외무성은 12월 2일 <안중근을 극형에 처하라>는 비밀명령을 내렸다.
당시의 안중근의사는 그 내막을 알 수 없었지만 그 당시의 미묘한 기류를 안응칠역사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하루는 검찰관이 다시 찾아와 심문하는데 그 말과 행동이 전일과는 아주 딴판으로 혹은 압제도 주고 혹은 억설도 하고 또 혹은 능욕하고 모멸도 하는 것이라,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검찰관의 태도가 이렇게 돌변한 것은 아마 제 본심은 아닐 것이요, 어디서 딴 바람이 불어 닥친 것이리라, 소위 道心(도심)은 희미하고 인심은 위태롭다더니 빈 문자가 아니로구나.“ 하고 분하게 여겨 대답하기를, “일본이 비록 백만 명의 군사를 가졌고 또 천만 문의 대포를 갖추었다 해도, 나 안응칠의 목숨 하나 죽이는 권세밖에 또 무슨 권세가 있을 것이냐.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한번 죽음을 맞이하면 그만이요, 또 무슨 걱정이 있을 것이냐. 나는 더 이상 대답할 것이 없으니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고 적었다."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은 법제 국가의 당연한 권리이다. 일본 당국은 처음에는 안중근이 변호사를 고용하는데 동의했다. 안중근의사는 이를 두고 “이는 과연 일등 국가의 행동이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내가 오해해서 이 같은 과격수단의 망동을 자행한 셈은 아닌가.”하고 너무도 의심스럽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일본은 후에 영국, 러시아, 한국의 명변호사들이 몰려 오자 일본은 강한 압박을 느꼈다. 안중근을 지지하는 이유를 반박할 근거가 없음을 의식하였다. 그리하여 이유도 설명하지 않은 채 “외국변호사들의 법정변호를 일률로 불허하며 이곳의 당국 변호사를 선임할 수 밖에 없다.”고 선포한 것이다.
일본은 안중근이 법원에서 진술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안중근이 몇 가지 목적 한바를 설명하려하자 방청객의 방청을 금지시키고 “다시는 그 같은 말을 하지 마라.”고 했다.
"이때 나는 얼마 동안 묵묵히 앉아 스스로 생각하며 혼자 되뇌었다.
오늘 내가 당하는 이 일이 생시인가 꿈속인가, 나는 당당히 대한국의 국민인데 왜 오늘 나는 일본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인가. 더구나 일본 법률로 재판을 받게 되니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내가 언제 일본에 귀화했던가. 판사도 일본인, 검사도 일본인, 변호사도 일본인, 통역관도 일본인, 방청인도 일본인! 이것은 정녕 벙어리 연설회, 귀머거리 방청회가 아닌가. 이것이 정녕 꿈속의 세계냐, 만일 이것이 꿈속이라면 어서 빨리 깨어나거라! 어서 빨리 깨어 나거라!“ 그러나 이러한 때에 더 설명을 해서 무엇 하랴. 아무런 이야기도 소용이 없었다."
안중근의사가 혼자서 겪어 낸 법정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전쟁터에 그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철저히 혼자였다.
| ▲ 안중근 의사의 공판이 열렸던 법원 건물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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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의사는 1920년 2월 7일부터 14일까지 이 법원 제1호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사형이 언도되었다.
“사형보다 더한 극히 중한 형벌은 없는가.”그는 일갈했다.
세계 각국의 신문잡지는 이 공판의 정황을 모두 광범하게 보도하였다. 영국기자 잘스 머리모는 “이 세계적인 판결에서 승리자는 안중근이며 그는 영웅의 월계관을 쓰고 자랑스럽게 법정을 떠났다. 그의 입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는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하였다.”고 보도했다.
그는 사형 판결을 받고 감옥으로 돌아와 홀로 생각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예로부터 허다한 충의로운 지사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충간하며 일을 도모한 것이 뒷날 역사에 맞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제 내가 동양의 대세를 걱정하여 정성을 다하고 몸을 바쳐 대책을 세우다가 끝내 허사로 돌아가니 통탄한들 무엇하리요. 그러나 일본국 사천만 민족이 ‘안중근의 날’을 크게 외칠 날이 멀지 않을 것이다. 동양의 평화가 이렇게 깨어지니 백년 풍운이 어느 때에 그칠 것인가. 지난 1895을미년에 한국에 와 있던 일본공사 미우라가 병정을 몰고 대궐을 침입하여 한국의 명성황후 민씨를 시해했으되, 일본 정부는 미우라를 아무런 처형도 하지 않고 석방했는데, 그것은 분명 누군가 위에서 명령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오늘 나의 일로 말한다면, 비록 개인 간의 살인좌라고 할지라도, 미우라의 죄와 나의 죄를 견주어 어느 누가 중하며 어느 누가 경한가, 그야말로 머리가 깨어지고 쓸개가 찢어질 일이 아니야, 내가 무슨 죄가 있느냐, 내가 무슨 죄를 범했단 말이냐.“하고 천번 만번 생각하다가 나는 문득 크게 깨달은 뒤에 손뼉을 치며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과연 큰 죄인이구나. 이는 바로 다른 죄가 아니라, 내가 어질고 힘없는 한국의 인민 된 죄로구나.’
이렇게 생각하니, 마침내 의심이 풀리고 안심이 되었다."
사형 선고를 받고 그 어두운 감옥에서 죄란 것이 어질고 힘없는 한국의 인민 된 죄라며 손뼉을 치고 웃고 있는 안중근의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100년 후의 사람은 가슴이 콱 막혀왔다.
| ▲ 옥중에서 집필된 안중근의사의 자서전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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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선변호사 카마다는 변론을 통해 "본건의 경우에 적용될 실체적 형벌법은 한국법인 것이 명백하나. 한국형법은 섭외적 형벌법규가 없으므로, 법의 불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무죄라고 변론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의 가문은 검찰관이 논고한 바와 같이 그 지방에서는 명문입니다. 피고는 조부로부터 교육을 받아 통감 제8권까지 읽었고, 종교에 대한 신앙심 또한 깊습니다. 게다가 검찰관에 대한 그의 답변하는 태도를 보면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학식있는 사람으로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형법 제 199조의 범위에서 형의 양정을 하신다면, 요컨데 가볍게 징역 3년에 처한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변호인의 요구는 실로 징역 3년입니다."라고 했다. 그로서는 최선의 변론을 한것이었다.
그러나 재판장 마나베는 "피고가 이토 공을 살해한 행위는 그 결의가 개인적인 원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치밀한 계획 끝에 감행한 것이므로 살인죄에 대한 극형을 과하는 것이 지당하다고 믿고, 피고 안중근을 사형에 처한다."고 판결했다.
징역3년과 사형의 간극은 너무 컸다.
국선변호사는 안중근의사에게 항소를 권유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는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단지 항소를 포기하면서 동양평화론 저술을 위해 형 집행을 한 달 남짓 늦춰달라고 했다.
히라이시 고등법원장이 대답하기를 “어찌 한 달뿐이겠는가, 설사 몇 달이 걸리더라도 특별히 허락하겠으니 걱정하지 마라.”하므로 참으로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돌아와, 항소권을 포기했다. 설사 항소를 한다 해도 아무런 이익도 없을 것이 분명할 뿐 더러, 고등법원장의 약속이 과연 사실이라면 굳이 더 생각할 것도 없어서였다. 그래서 [동양평화론]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그때 법원과 감옥소의 일반관리들이, 내 손으로 쓴 글을 기념으로 갖고 싶다하여 비단과 종이 수백 장을 사 넣고 부탁하므로, 나는 하는 수 없이 글씨를 잘 쓰지도 못하면서 또 남의 웃음거리가 될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매일 몇 시간씩 글을 쓰면서 시간을 보냈다."
자서전을 읽으면서 가장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끝까지 항소해서 일본을 국제사회에서 압박하고 그의 정정당당한 담론을 더 펼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양평화론을 좀 더 쓸 시간이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컸던 것이다.
일본은 안중근의 존재와 그가 집필할 동양평화론이 완성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사상이란 영원한 동력을 얻기 때문이었다.
일본여순고등법원장 히라이시는 동양평화론을 다 쓴 다음에 사형하겠다고 하였으나 일본의 위약으로 항소 했을 때보다 더욱 빨리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의 위대한 사상이 담긴 '동양평화론'은 미완인 채로 끝났다.
‘안응칠 역사’는 고향의 홍신부가 감옥을 찾아와 마지막 성사를 하고 떠난 것으로 끝을 맺는다.
. "인자하신 천주님께서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요, 반드시 거두어 주실 것이니 안심하고 있어라.” 하시며 손을 들어 나를 향하여 강복하신 뒤 떠나가시니, 때는 1910년 경술년 2월 초하루 오후 4시쯤이었다.
이상이 안중근의 32년 동안의 역사, 그 대강이다.
1910년 경술년 음력 2월 초5일 (양력 3월 15일)
여순옥중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쓰다."
미완으로 끝난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의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중국 뤼순을 동양평화의 근거지로 만들고
2. 한. 중. 일 공동의 군대를 편성하며
3. 한. 중. 일이 동양평화회의를 창설하고
4. 한. 중. 일 공동은행을 만들어 공용화폐를 발행하고
5. 동아시아 곳곳에 동양평화회의 지부와 공동은행 지점을 설치하며
6. 로마 교황 사절을 초빙하여 평화를 위해 중재하도록 하자는 제안이다.
동양평화론은 세 나라가 서로 자존과 독립을 유지하며 거시적으로 동양 평화를 이루자는 선구적인 사상이었다.
100년 후의 EU 를 보는 느낌이었다.
개인 생사를 염두에 두지 않는 안의사의 투쟁정신과 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그의 인품으로 당시 법원과 감옥의 많은 관리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보물 제569-23호로 지정된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나라 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사형직전에 헌병 치바 도시치에게 써준 유묵이었다. 사형 직전이었음에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의병참모중장으로 나라 위해 헌신한 충심을 밝혔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집행 5분 전 안중근의사는 모친이 보내온 한복을 정히 갈아입고 교형실에서 마지막 유언을 했다.
“나는 대한독립을 위해 죽고 동양평화를 위해 죽는 것이니 죽어도 유감이 없다.” 말을 마치고 순국하니 그때 그의 나이 32세였다.
| ▲ 안중근의사가 유언으로 "하얼빈공원 옆에 뼈를 묻어 주고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했던 하얼빈공원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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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는 1910년 3월 10일 두 동생과 홍신부를 만난 자리에서 <동포에게 고함>과 <최후의 유언>을 남겼다. 안중근이 순국하기 전날인 1910년 3월 25일 [대한매일신보]에 이글이 실렸다.
"<동포에게 고함>
내가 한국 독립을 확보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삼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도달치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
<최후의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르빈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포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고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어머님 전상서>
예수를 찬미합니다.
불초한 자식은 감히 한 말씀을 어머님 전에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인사 못 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감정에 이기지 못하시고 이 불초자를
너무나 생각해 주시니 훗날 영원의 천당에서 만나 뵈올 것을 바라오면 또 기도하옵니다.
이 현세의 일이야말로 모두 주님의 명령에 달려 있으니 마음을 평안히 하옵기를 천만번 바라올 뿐입니다. 분도는 장차 신부가 되게 하여 주기를 희망하오며, 후일에도 잊지 마옵시고 천주께 바치도록 키워 주십시오. 이상이 대오이며, 그밖에도 드릴 말씀이 허다하오나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운 뒤 누누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위아래 여러분께 문안도 드리지 못하오니, 반드시 꼭 주교님을 진심으로 신앙하여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은 정근과 공근에게 들어 주시옵고, 배려를 거두시고 마음 편안히 지내시옵소서.
아들 도마 올림
<분도 어머니에게 부치는 글 (안중근 의사의 아내) >
예수를 찬미하오.
우리들은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천주의 안배로 배필이 되고 주님의 명으로 이제 헤어지게 되었으나 또 머지않아, 주님의 은혜로 천당 영복의 땅에서 영원에 모이려 하오. 반드시 감정에 괴로워함이 없이 주님의 안배만을 믿고 신앙을 열심히 하고 어머님에게 효도를 다하고 두 동생과 화목하여 자식의 교육에 힘쓰며 세상에 처하여 심신을 편안히 하고 후에 영원의 즐거움을 바랄뿐이오. 장남 분도를 신부가 되게 하려고 나는 마음을 결정하고 믿고 있으니 그리 알고 반드시 잊지 말고 특히 천주께 바치어 후세에 신부가 되게 하시오. 많고 많은 말을 천당에서 기쁘고 즐겁게 만나보고 상세히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것을 믿고 또 바랄 뿐이오.
1910년 경술 2월 14일
장부 도마 올림"
동포에게 고함과 최후의 유언, 어머님과 아내에게 쓴 유언은 각기 다르지만 그의 심중이 들어있는 유언장과 마지막 편지들을 보았다. 그의 모습이 더욱 확연히 들어섰다.
안중근 의사의 순국 후 안중근의 두 동생이 안중근의 시신을 넘겨 달라고 요구하였으나 그들을 강제로 조선으로 압송했다.
일본은 한국인들이 안중근 기념비를 만들고 안중근의 무덤이 한국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안중근의 시신을 비밀리에 여순의 어느 곳에 묻어 버렸다. 근 몇 년간 중국, 조선, 한국의 인사들이 안중근의 유골을 찾으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의 후손으로써 안타깝고 진정 부끄러운 일이었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던 독립된 조국에서 잘 지내고 있는가? 싶었다. 그분이 지금의 분단된 조국을 본다면 하늘에서도 땅을 치고 통탄하실 듯했다.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황제를 폐위시킨 일본까지를 포함해서. 중국. 한국의 동양평화론을 주창하셨던 안중근 의사였다.
그런 분이 한민족이 전쟁을 치루고 분단의 고착화를 지켜보고 있으니 유해를 찾지 못한 죄송함에 더욱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앞에는 안중근의사의 자서전을 따라서 걸었다. 이제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예수살이공동체 이름으로 안중근의사의 발자취를 따랐다.
| ▲ 3월 23~ 27일까지 하얼빈역 화물 하역장의 이등박문의 저격장소를 갈 수 없다는 통고가 붙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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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가 순국한지 100년 후 그를 존경하는 순례단이 이곳을 찾았다. 그러나 이곳에는 또 다른 한. 중. 일의 전선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얼빈에는 일본 자본들이 많이 들어와 있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이곳을 찾을 많은 한국인들을 의식해서인지 하얼빈역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안중근이 저격한 장소를 들어갈 수가 없었다. 매표소에는 통고문을 통해 3월 24~ 27까지 들어갈 수 없다는 표시만 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장소를 볼 수 없었다.
| ▲ 하얼빈 공원(조림공원) 문 닫히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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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공원은 안중근 순례 길에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곳이었다. 이곳은 블라디보그토크에서 하얼빈으로 온 안중근의사가 거사를 이틀 앞두고 우덕순과 함께 하얼빈 공원을 거닐며 거사 계획을 검토했다. 그 뒤 안중근 의사는 유언으로 자신이 죽으면 뼈를 이곳에 묻었다가 독립이 되면 고국으로 반장해 달라고 유언했던 곳이다. 지금 이곳에는 항일 영웅이었던 이조린 장군의 유해를 안장하고 장례를 치뤘으며 1946년부터 자오린 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안중근 장군이 묻히기를 원했던 유서 깊은 하얼빈 공원도 문이 굳게 닫혔다. 이유는 얼음축제를 했기 때문에 동절기에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겨울에 들어갈 수 없는 공원도 있는가 싶었지만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하얼빈에서 손과 발이 묶인 느낌이었다. 그 먼 길을 안중근의 발자취를 따라 왔는데 이곳에서 그분의 인기척을 느낄 수 있는 장소들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함께 순례를 왔던 젊은이들은 분한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
할 수 있는 것은 하얼빈공원을 밖에서 사진에 담는 것과 하얼빈역 플랫폼에서 사진을 담는 일뿐이었다. 사진기를 보면 반사적으로 웃는 어머니들과 달리 저격한 장소를 갈 수 없음에 아쉬움과 분함에 눈물이 그렁한 젊은이들은 어찌 마음을 다스릴지 몰랐다.
| ▲ 안중근의사의 기념실이 있는 조선민족예술관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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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 기념실이 있는 조선민족예술관으로 갔다. 이곳에는 안중근 기념실이 있었다.
이곳에서도 제지가 있었다. 단체사진을 담는데 어떤 프랭카드도 펼칠 수 없다고 했다. 아, 그렇구나 이곳이 사회주의국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중국은 안중근을 존경하지만 이런 기념일 기해서 소수민족의 힘이 결집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했다. 그런 통제중에서도 안중근의사가 중국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존경을 받는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중국정부에서 안중근의사의 거사 100주년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이런 일은 안중근의사이기에 가능하다고 했다.
2010년 3월 26일 천주교 다롄 성당에서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추모 동양 평화 기원미사’가 봉헌되었다.
이용훈 주교와 다까미 미쯔아끼 대주교, 타니 다이지 주교의 한.중.일 사제단 공동 집전으로 봉헌되었다.
시작 성가는 ‘선구자’였다.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강한 기개를 가지고 이국 땅의 강가를 달리는 독립군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안중근 도마는 천주교에 대한 신심이 깊었다. 아들 분도가 신부가 되기를 원했고 젊은 시절 10년 여년을 전교활동을 했다.
안중근연구소의 신운용 연구원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한국(각국)독립‘과 ’동양(세계) 평화의 구현‘이 하늘의 뜻이라고 믿는 종교적 확신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 ▲ 일본 전국에서 모여 순례단에 온 일본의 천주교 신자들 미사가 끝난 후 기념사진을 담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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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에서 순례단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천주교 신자 50여명과 한국에서 온 신자들이 성당을 가득 메웠다. 일본 사이타마 교구장 따니 다이지주교는 강론을 통해 “저희는 조선병합 이후 1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 중국의 대련으로 평화 순례단으로서 일본에서 왔습니다. 저희는 중국, 조선반도, 그리고 여타 아시아의 국가들의 여러분께, 침략, 식민지 정책을 행한 것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반성하며, 사죄를 드립니다. 많은 이들의 생명, 생활, 문화를 파괴하고 고통스럽게 했다는 것을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저희는 이 대련에서 중국의 모든 분들, 한국의 모든 분들과 함께 평화의 결의를 새롭게 하고자 합니다. 특히 중국. 한국. 일본이라는 나라와 교회가 협력해서 나아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평화의 길을 개척해 나아가는 것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한국어와 일본어로 강론이 번갈아 통역되었다.
수원교구장 이용훈(마티아)주교는 강론을 통해 “오늘 우리가 안중근(도마)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이하여 이곳 대련성당에서 한중일 교회의 사제들과 교두들이 한 자리에 모여 미사를 봉헌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대단히 뜻 깊은 은총의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안중근 의사께서도 오늘 한중일 교회의 신자들이 함께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는 모습을 하늘에서 지켜보시며 매우 기뻐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 열심히 전구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오늘 안의사께서 어떻게 천주교 신앙을 통해서 한 개인이 변화되고 동양의 백성들까지도 사랑하게 되었는지, 그분의 신앙과 생애에 대하여 함께 추모하며 동양평화사상의 유지를 실천해 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다.
여순 감옥은 중국 랴오닝성 다롄시 뤼순에 있는 일제 시대의 형무소이다. 독립운동가 안중근과 신채호가 수감되었던 곳이다. 1902년 러시아가 동북 3성에 항의하는 중국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건축하였으나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뤼순을 점령한 뒤에 1907년 현재 형태의 규모로 확장되었다.
주로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인이 수감되었고 1906~1936년 사이 수감자는 연간 약 2만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1942년에서 1945년 8월 사이에 약 700여명의 수감자가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처형당했던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걸어가는 길이었다. 타국의 땅에서 마지막으로 이길을 걸었을 우리의 선조들을 생각하니 숙연해졌다.
이곳에서는 1934년 이후부터 사용된 사형장이라고 했다. 사형을 시키고 아래 통나무통으로 시신이 떨어지면 다른 절차없이 매장했다고 한다. 한국, 중국, 러시아의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숨졌다. 가슴이 아파왔다. 이곳에서 사람들이 묵념을 드렸다.
공동묘지가 발굴되고 통나무관에 있는 무덤들이 발견되었다. 안중근의사가 순국하고 관에 모셔졌다고 했다. 가족의 인도 요구를 묵살하고 일본은 비밀리에 안중근의 시체를 여순의 어딘가에 묻었다. 이곳은 변하고 있었다. 공동묘지도 기념관이 되었는데 어느 땅 속에 안중근의사의 무덤이 있단말인가? 어디서부터 찾는단 말인가 싶어 가슴이 답답해졌다.
| ▲ 여순감옥의 안중근 전시관을 보는 사람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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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 감옥에서의 국제지사들 기념관’에는 안중근 의사 순국100주년을 맞아 많은 추모객들이 있었다. 안중근의사의 흉상이 자신을 기리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는 듯했다. 이곳은 한국의 자본이 많이 들어왔다고 했다. 이곳의 분위기는 하얼빈과는 완연히 달랐다. 안중근의사가 수감되었던 감옥 앞에는 한국어로 번역된 안내문이 적혀있었고, 여순 감옥에서의 국제지사들 기념관에는 안중근, 신채호등의 독립운동가의 전시관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안중근의사가 순국한 장소로 왔다. 이 장소를 여순 재단에서는 관련 도서관의 자료들을 찾아서 이곳이 안중근의사가 순국한 장소를 찾아냈다.
| ▲ 안중근의사가 순국한 장소를 찾은 한국인 노력을 만나다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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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가 순국한 장소를 찾던 중 지하설계도를 바탕으로 1907년부터 1934까지의 사형장은 이곳이라는 것을 찾았다. 국가가 아닌 개인의 노력이 컸던것이다.
같은 국가인 중국의 하얼빈과 여순 이었지만 그 지역에 어느 국가의 기업들이 많이 진출되어 있느냐에 따라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가 어린 곳의 위상은 달라졌다.
안중근의사가 순국한 장소는 한 사학자의 노력으로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분들이 안중근의사의 무덤을 찾기위해 얼마나 더 많은 사료들을 찾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중근의 국가 조선, 지금은 갈라졌지만 남.북한 모두는 지금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 ▲ 신채호선생이 수감되었던 35호 감방과 복도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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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감옥 35호 감방에 수감되었던 신채호 선생의 감방도 보존되어 있었다.
| ▲ 여순 감옥 내의 수감자들을 고문하던 형기구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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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감자들을 고문하던 형기구들이 있었다. 100년이 흘렀건만 고문을 받는 수감자들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여순감옥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은 이 지옥에서 벗어나 얼마나 저 밖으로 나가고 싶었을까 ? 저 햇살을 받지 못하고 돌아간 영령들이 얼마나 많을까 싶어 마음이 저려왔다.
안중근의 거사는 일본 침략을 받고 있었던 중국을 격동시켰다.
손문은 “중, 한 양국은 동문동종이며 본래 형제지방이었다. 한국독립에 중국은 원조의 의무가 있다.”고 했다.
안중근 기념관에는 주은래총리의 어록이 적혀있었다. “중일 갑오전쟁 후,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등박문을 결살 한 때부터 양국인민이 공동으로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은 시작되었다.”고 했다.
안중근의사처럼 갈라진 한민족과 중국까지를 아우를 수 있는 인물이 있는가 싶었다.
| ▲ 100년 후 한국인들이 법정을 가득 메우고 안중근의사의 일대기를 보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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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가 재판을 받았던 법원은 병원으로 바뀌었던 것을 한국의 여순재단에서 구입하여 법원 기념관으로 바꾸었다.
안중근 의사가 일본인의 판사, 검사, 방청객 속에서 “내가 언제 일본에 귀화했냐고. 벙어리와 귀머거리의 재판이라고” 했던 법정에는 이제 한국인이 방청석을 가득 메우고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를 보고 있었다.
안중근의사는 한,중,일의 공동의 평화를 유지하는 동양평화론을 외쳤지만 아직도 여전히 각국의 영향력에 따라 유적의 위상도 바뀐다는 생각을 했다.
| ▲ 윤보선 대통령이 훈장을 추서하다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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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장군이 옳으냐. 안중근의사가 옳으냐는 호칭문제가 요즘 거론되고 있다.
사카이 요시이키의 심문보고에서 안중근의 답변을 보면 “어떤 사람은 나를 암살자객이라고 하는데 이는 너무 무례하다. 내가 정정당당하게 포진하고 이등의 한국점령군을 대항한지 벌써 3년이 된다. 각지에서 의군을 조직하여 고전하는 동안 할빈에서 성공적으로 이등을 죽인 나는 독립군의 주장이다. 만인이 보는 앞에서 달성한 승리는 독립군의 광명정대한 행동이며 세인이 공인하는 사실이다. 나의 염원의 나의 시체를 할빈에 묻어 유지를 관철하며 태극기가 하늘에 높이 휘날리게 하는 것이다.”(동상서 제452페이지)
그는 독립군의 의병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이등박문을 처단한 것이었다. 그의 호칭이 안중근장군이라고 하는 것은 맞는 것이다.
그러나 좀 더 큰 의미로 부른다면 안중근의사가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서전 ‘안응칠역사’를 보면 그가 거사 후 미조부찌 검참관의 심문에서 이등박문이 죽어야할 15가지 죄명을 천명했을 때 검찰관의 첫 반응에서 나타난다.
“당신은 참으로 동양의 의사 (義士)라 할 수 있겠소. 의사를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법은 없으니 염려하지 마시오.”라고 했다.
안중근의사는 중대한 국사정치범이었기에 일본형법에 의해 사형에 처 할 수 없었다. 검찰관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사를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법은 없다.’고 한 것이었다.
동양평화라는 대의명분을 가지고 이등박문을 제거했던 것이다. 겨레, 더 나아가 인류평화를 위해 의거를 했기에 의미 확장이 더욱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동양평화론이 지금에 다시 주목받는 것은 완결을 못했지만 그의 원대한 구상은 1세기가 지나도 현시점에서도 더욱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 ▲ 여순 감옥내에 마련된 안중근의사의 기념실 © 시흥시민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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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멸망과 회복, 조선의 독립과 분단 상황, 중국과 대만이 있는 현시점에서도 동양평화론을 주창했던 그의 사상은 더욱 확장되기 때문이다.
전옥 구리하라가 사형집행문을 낭독한 후 소노키가 통역했다. 유언이 없냐고 했을 때 안의사는 대답했다.
“나의 행동은 본시 동양평화를 위함인즉 다시 한할 바 없으나 다만 여기 모여선 일본 관헌은 이후 한일친선과 동양평화에 진력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3분을 기도한 후, ‘동양평화만세’를 외치고 순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