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에서 뤼순까지, 안중근 의사의 100년의 길을 걷다

안중근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그의 발자취를 따라 가다

최영숙 | 기사입력 2010/03/31 [15:04]

하얼빈에서 뤼순까지, 안중근 의사의 100년의 길을 걷다

안중근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그의 발자취를 따라 가다

최영숙 | 입력 : 2010/03/31 [15:04]

 

▲ 안중근 의사의 모습     © 최영숙

   
 2010년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지인이 예수살이공동체에서 안중근 순국 100주년 기념 순례를 떠난다고 동행을 권했다. 다행히 2010년 3월 23일부터 27일까지 4박 5일 일정에 합류할 수 있었다.

 

▲ 안중근의사의 젊은 시절     ©최영숙

 
안중근 의사가 여순(뤼순) 감옥에서 쓴 자서전 『안응칠 역사(安應七歷史)』와 객관적인 사실을 기록한 당시의 문헌들을 바탕으로 그의 삶을 따라가 보았다.
 

▲ 안중근의사가 수감되었던 감방의 안 풍경     ©최영숙


이 독방에서 안중근 의사의 자서전 『안응칠 역사』가 집필되었다.

“나는 1879년 기묘년 7월 16일, 대한국 황해도 해주보 수양산 아래에서 한 남아로 태어났다. 나의 성은 안이요, 이름은 중근, 어릴 적의 이름은 응칠이다. (나의 타고난 성질이 가볍고 급한듯하여 이름을 중근이라 짓고, 가슴과 배에 일곱 개의 검은 점이 있어 어릴 적의 이름을 응칠이라 하였다 한다)." 
안중근의 조부 안인수는 진해현감을 지냈고, 부친 안태훈은 문필이 출중한 지사였다.

 

안중근 의사는 어려서 사냥을 좋아했는데, 이를 걱정하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옛날 초나라의 패왕 항우가 말하기를 ‘글이란 이름이나 적을 줄 알면 족하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만고영웅 초패왕의 명예는 오히려 천추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 나는 학문으로써 세상에 유명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항우가 장부라면 나도 또한 장부이러니 너희들은 다시는 이런 말 하지마라.” 고했다."

 자서전 속 안중근 의사는 근엄한 모습뿐 아니라 솔직담백하고 기개가 넘치는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17~18세의 젊은 시절, 그가 즐겨하던 일은 네 가지였다.

"첫째는,  친구와 의를 맺는 것이오, 친우결의(親友結義)
둘째는,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것이오, 음주가무(飮酒歌舞)
셋째는, 총으로 사냥하는 것이요, 총포수렵(銃砲狩獵)
넷째는, 날랜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이다. 기치준마(騎馳駿馬)였다." 

 이처럼 호방하고 무인적인 성향이 강했던 그는 1905년 12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대한 독립의 날까지 술을 끊기로 결심했다.
 

▲ 2010년 3월 26일 다롄성당에서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추모 미사를 드리다     © 최영숙


그는 17세 때 프랑스인 홍석구(빌렘) 신부로부터 '도마'라는 세례명을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 후 10년간 황해도 각 지방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파했다.

 

또한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홍 신부와 함께 서울의 뮈텔 대주교를 찾아가 대학 설립을 의논했다. 그러나 뮈텔 대주교는 “한국인이 만약 학문을 하게 되면 신앙생활에 좋지 않을 것이니 다시는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마라.”고 했다.

이에 안중근은 “천주교의 진리는 믿을지언정 외국인의 심정은 믿을 것이 못된다.”하고 프랑스어를 배우던 것도 내던지고 말았다. 친구가 묻기를, “무엇 때문에 배우던 것을 포기하였느냐.” 라고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일본말을 배우는 자는 일본의 종놈이 되고, 영국 말을 배우는 자는 영국의 종놈이 된다.  내가 만약 프랑스 말을 배우다가는 프랑스의 종놈을 면치 못할 것이기에 내던져 버린 것이다. 만일 우리 한국이 세계에 위력을 떨친다면 세계 사람들이 모두 한국말을 배우게 될 것이니 너는 조금도 걱정하지 마라.”고 하였다. 그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물러갔다."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100년 전, 안중근 의사가 "한국이 세계에 위력을 떨치면 세계가 한국말을 배우게 된다"고 했던 당당함과 한국의 저력을 믿는 깊은 자부심을 보며 그의 깊은 내면세계를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 후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설립하고 국채보상운동에 투신하였다.

 

1907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이범윤, 김두성과 함께 의병을 조직하였고,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의병을 거느리고 경흥과 회령 등지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1909년 1월에는 러시아 카리(연추)에서 11명의 동지와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하고 맹주가 되어, 조국과 민족을 위해 한 몸 바칠 것을 맹세하였다.

 

▲  철도역     ©최영숙


 그에게 선지자적인 예감이 있었던 것일까? 그의 자서전을 보면 거사가 운명적이었다고 느껴지는 대목이 있다. 


    "1908년 9월이었다. 그때 나는 연추 방면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하루는 갑자기 아무 까닭도 없이 마음이 울적해지며 초조함을 이길 수 없고 스스로 진정하기 어려워 친구 몇 사람더러'나는 지금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려고 하오.’하였더니 그 사람들 말이‘왜 그러는 것이오. 아무런 기약도 없이 졸지에 가려는 것이오.’하므로 나는 말하되‘나도 그 까닭을 모르겠소. 저절로 마음에 번민이 일어나서, 도저히 이곳에 더 머물고 있을 생각이 없어, 떠나려는 것이오.’하였다. 그들은 다시 묻기를 ‘이제 가면 언제 오는 것이오.’하므로, 나는 무심중에 갑자기 대답하기를‘다시 안돌아 오겠소.’하자 그들은 무척 괴상히 생각했을 것이오, "

▲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저격한 하얼빈역 전경     © 최영숙


그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이등박문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해 소원하던 목적을 이제야 이루게 되었다니! 이놈의 늙은 도둑을 이제야 내 손으로 끝장내는구나!” 기뻐했다.

1909년 10월 22일 하얼빈에 도착했다.

거사를 앞두고 여관방 등불 밑에서 그는 '장부가(丈夫歌)'를 지어 결연한 의지를 다졌다.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음이로다
천하를 응시함이여 어느 날에 업을 이룰꼬
동풍이 점점  참(차가움)이여 장사의 의기가 뜨겁도다
분개히 한 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쥐도적 이등이여 어찌 즐겨 목숨을 비길꼬
어찌 이에 이를 줄을 헤아렸으리요.
사세가 고연하도다.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만세 만세여 대한 독립이로다.
만세 만만세 대한 동포로다."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은 예정된 것이었다. 10월 24일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조도순)은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가 차이자거우역에 오전 6시경 중간 정차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안중근의 지략은 이곳에서 빛났다.

“모레 아침 여섯 시쯤이면 아직 날이 밝기 전이니 이등박문이 반드시 정거장에 내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요. 또 설사 차에서 내려 시찰한다 하여도 어둠 속이라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분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내가 이등박문의 모습을 모르는 데야 어찌 일을 치를 수가 있을 것이랴.”

“나는 오늘 하얼빈으로 돌아가서, 내일 두 곳에서 일을 치르면 충분히 유리할 것이다. 만일 우동지가 일을 성사시키지 못한다면 내가 꼭 성사시킬 것이요, 만일 내가 일을 성사시키지 못한다면 우동지가 꼭 일을 성사시켜야 할 것이다. 또 만일 두 곳에서 다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다시 자금을 마련해서, 다시 상의해서 거사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완전한 방책일 것이다.”하였다."

안중근의 예측은 정확했다. 그는 문무를 겸비한 지장이었다.  10월 26일 거사 당일 차이자거우역에서 우덕순일행은 수상히 여긴 러시아 경비경에게 잡혀 역구내 여관에 감금되었다.  열차는 정차하지 않고 안중근이 기다리는 하얼빈으로 직행했다.

안중근의 혜안으로 두 겹으로 겹쳐진 그물망을 이등박문은 피할 수 없었다.
 

▲ 하얼빈역의 의거 현장은 화물 하역장에 위치해 있다.     © 최영숙


 안중근은 이등박문의 얼굴을 몰랐다. 그러나 그는 직감적으로 이등박문을 알아보았다.

”러시아 관리들이 호위하고  오는 무리 중에 맨 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한 일 개 조그마한 늙은이가 이같이 염치없이 감히 천지 사이를 활보하고 있지 않은가. ‘저 자그마한 늙은이가 분명 노적 이등박문일 것이다.’ 나는 곧 단총을 뽑아들고, 그 오른쪽을 향하여 4발을 쏘았다.“ ”그때가 바로 1909년 음력 9월 13일 오전 9시 반쯤이었다. 그때 나는 하늘을 향하여 목이 터져라 큰 소리로 ‘대한 만세’를 세 번 부른 다음, 정거장 헌병 분파소로 붙잡혀 들어갔다.“

 

그의 의거는 성공했다. 세계는 경악했다. 조선 황실과 동아시아, 그리고 구미 각국이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보인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조선의 반응 
 
"태황제(고종)는 말하기를 이등은 동양의 인걸이고 동양평화를 관심하는 사람이다. 그는 아국에 충실하고 정의로우니 실로 아국의 慈父(자부)이다. 그의 죽음은 일본뿐만 아니라 아국 및 동양의 불행이다. 이등통감이 재임할 때 한 번도 통감부를 방문하지 않았던 것이 유감스럽다. 나는 11월 4일 통감부 이등의 원 거소로 가서 조문을 하려고 한다. 한국인이 이등을 살해했다니 나의 얼굴이 붉어진다. 그를 죽인 사람은 이등공의 진의를 모르는 해외류랑자로 한국사회의 파괴자이고 가증스런자이다.

태황제는 일본에 있는 황태자에게 상복을 입고 이등공의 장례에 참가하여 석 달 간의 상기(喪基)를 지키라고 지시하였다.

또한 태황제는 한황(순종)이 이등에게 문충 (文忠)이란 익호를 내릴 것을 결정하였다.


태황제와 엄비는 눈물을 흘리면서 일본에서 공부하는 황태자(실은 인질, 고종의 셋째아들)의 안전과 전도를 걱정하였다.

민영휘: 친족들에게 말하길 당년 민비가 한국주재 일본공사 미우라고로에게 살해당한 것은 기실 일본정부가 지시 한 것이다. 오늘 안중근이 일본정부를 대표하는 이등을 죽였으니 나라 위해 복수 한 것이고 우리의 쌓인 원한도 풀었다. 안중근은 이미 체포되었다. 이후 만약 사형에 처해지면 그는 스스로 깨달아 유감이 없을 것이다.

이완용: 자신의 안전을 걱정하여 외출을 삼갔고 심지어 방문객을 거절하였다.

대한매일신보: 유생, 반일단체 및 열혈청년들은 몹시 기뻐하였다. 이등의 죽음은 한국의 사기가 완전히 죽지 않았음을 증명하며 그릇된 통감정책이 낳은 결과라고 하였다. 양기탁, 신채호등은 소식을 들은 후 연회를 차려 축배를 들면서 대한만세를 외쳤다.

학생들은 이등의 추도회에 참가하길 거부하였다. 서북학회 간부 이도원 및 소속 학생들은 한황이 일본에 사죄하러 가면 목숨으로 저지하겠다고 결심하였다.
외국선교사들이 정부가 조직한 이등공추도회에 참가하려고 하자 한인교도들은 만약 정말 참가하면 우리 전부 퇴교하겠다고 반항하였다.

천도교주 손병희는 이등은 위인이며 공헌이 크다. 그의 죽음은 동양의 불행이요 한국은 곧 망국을 불러 올 것이라고 말하였다. "

미주 한인 동태

"신한국보(11월2일)자 ‘한국침략원흉 이등의 죽음’이란 제목으로 장편사론을 발표하였다. “천하에 열사가 많으나 안중근 같은 의사는 고금 이래 없었다. 그는 이천만동포가 질타하는 이등을 죽였다.”

일본의 민심 동태

"동경의 모 단체는 이등공의 장례에 한인을 죽여 제사 지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선동하였다."

중국의 반응


중국의 혁명가 손문은 안중근의사에게  제사를 썼다.

“공은 삼한을 뒤덮고 이름은 만국에 떨쳤으니
살아 백세가 아니라도 죽어 천추에 빛나리
약국의 죄인이 강국의 재상보다 강하여
분연히 타향에서 이등후작을 베였노라“

러시아의 반응

 
 "<할빈일보(10월27자)및 원동보>: 대정치가 이등은 국가위해 목숨 바친 위인이다. 러시아는 그의 피살에 동정을 표시한다. 하지만 그는 한국에서 저지른 과분한 죄행에 대해 책임이 있다. 때문에 한국인의 증오가 그에게 집중되었다.

<하얼빈의 로씨신문 10월 28자 사론>: "한인들은 고국의 독립을 상실한 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나라 위해 복수할 기회를 찾던 한 한국인이 과감하게 이등을 격살하였다. 타국에 피비린 탄압을 가한 자는 이 사건에서 교훈을 섭취해야 할 것이다. 러시아도 만주에서의 현상을 총결하여 반항자의 총소리가 나타나는 것을 방지해야 할 것이다.“

러시아 정부는 이 문장에 노하여 이 신문의 총편을 투옥하고 오백루블의 벌금까지 안겼다.

러시아황제 니콜라2세는 동경에 보내는 조전에 저명한 정치가 이등공은 일로간의 평화와 우의를 실현하기 위해 할빈에 갔는데 불행하게 야수 같은 음모에 살해 되였다고 하였다."

프랑스

 
  "<애국파>신문은 “이등의 과격하고 독단적인 한국경영은 실책이었으며 피살 당한것은 마땅한 징벌이다.”

영국

 
 "이등은 건설적대정치가의 특징을 구비했다. 그는 정의와 온건한 정책을 옹호하며 평화를 지도하는 위인이었다."

미국 

"뉴욕의 신문: 이등이 한국주권을 강탈하였기에 한국인은 그를 원수로 여긴다. 그래도 요행 5년이나 살고 오늘에야 살해되었다."

"시카고의 신문 : 이등의 죽음은 그의 악정을 시행한 보응이다. 일본은 한국에 대한 착오적 정책을 반성해야한다."
 
 각국의 반응은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미묘한 힘의 균형과, 그 속에서 독립을 갈망하던 한민족의 처절한 외침이 세계에 어떤 방식으로 전달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 안중근의사가 의거 직후 수감된 옛 일본 총영사관 자리 (현재는 소학교가 들어서 있다)     © 최영숙


  안중근 의사가 의거 직후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되어 이송되었던 옛 일본 총영사관 자리에는 2002년부터 소학교(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이곳에서부터 안중근 장군의 두 번째 의거라 불리는 '옥중 투쟁'과 역사에 길이 남을 '동양평화론'의 서막이 올랐다.


"미조부찌 검찰관이 이등박문을 가해한 까닭에 대하여 묻기에,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이등박문을 저격한 까닭은 이등박문의 가공할 죄악 때문이다. 그 죄악은 다음과 같다.

1. 한국 민 황후(명성황후)를 시해한 죄요,
2. 한국 황제를 폐위한 죄요,
3. 의사 5조약과 정미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요,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케 한 죄요,
8. 군대를 해산시킨 죄요,
9. 교육을 방해한 죄요,
10.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요,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요,
13. 현제 한국과 일본 간에는 분쟁이 끊이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도, 마치 한국이 무사태평한 것처럼 위로는 천황을 기만한 죄요,
14. 동양평화를 파괴한 죄요,
15. 일본 천황폐하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때문이다.“ 라고 답했다.

검찰관이 나의 진술을 다 듣고는 깜짝 놀라면서,

“이제 말을 듣고 보니, 당신은 참으로 동양의 義士(의사)라 할 수 있겠고, 의사를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법은 없으니 염려하지 마시오.” 하는 것이었다. 나는 답변하기를,

“내가 죽고 사는 것은 논할 것 없고 이 뜻을 속히 일본 천황폐하에게 아뢰어라 그래서 속히 이등박문의 옳지 못한 정략을 고쳐서, 동양의 위급한 대세를 바로잡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고 했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죽어야 하는 15가지 죄목 중 첫 번째로 "한국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를, 두 번째로 "한국 황제를 폐위한 죄"를 꼽았다. 반면 고종황제는 안중근을 향해 "그를 죽인 사람은 이토 공의 진의를 모르는 해외 유랑자로, 한국 사회의 파괴자이며 가증스러운 자이다"라고 평했다.

 

안중근 의사는 자신의 심중을 당당히 밝힐 수 있었으나, 아내인 명성황후가 비참하게 피살되고 자신마저 일본에 의해 폐위당한 고종은 차마 속내를 드러낼 수 없었던 것이다.

 

▲ 안중근의사가 수감되었던 감방과 간수장 방     © 최영숙

 

안중근 의사 등 9명은 1909년 11월 1일 오전 11시 25분, 하얼빈역에서 출발하는 기차에 태워져 12명 헌병의 감시 하에 11월 3일 뤼순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안중근의 자서전을 보면 뤼순의 일본 관원들은 그를 상당히 존중해주었다. 감옥장은 그의 생활 여건을 돌봐주었으며, 검사관도 예의를 갖추어 대했다.

 

뤼순 감옥으로 압송된 사흘 뒤인 1909년 11월 6일, 안 의사는 서면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을 침략한 15개 조의 죄목을 공소하는 동시에, 그를 처단한 행위의 정당성을 피력하였다.

 

  “나는 의병참모중장의 신분으로 각지에서 전투를 벌였고 이번 거사도 한국독립전쟁의 일부분이다.” “본 사건은 정치문제이며,”  “ 검찰관과 변호사들은 모두 이등통감의 정치방침은 완벽무결한데 내가 오해를 한 거라고 하지만 그건 잘못이다. 난 오해를 하지 않았을 뿐더러 너무 똑똑히 알고 있다.” “나는 한국 독립을 위해 동양평화를 위해 이등을 제거하였다.” “나는 적군에 잡힌 포로다.” “ 때문에 응당 국제공법에 의해 처벌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일본 당국은 안중근 의사가 중대한 국사범(정치범)이기에 일본 형법으로는 사형에 처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 법원 모습     ©최영숙


 일본 정부의 강경파는 재판에 직접 간섭하려 했다.

 

당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는 안중근 의거의 정당성을 일부 이해하고 무기형(무기도형) 판결을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동향을 탐지한 일본 외무성은 12월 2일, "안중근을 극형에 처하라"는 비밀명령을 내렸다.

 

당시 안중근 의사는 이러한 내막을 자세히 알 수는 없었으나, 재판 과정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기류를 『안응칠 역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하루는 검찰관이 다시 찾아와 심문하는데 그 말과 행동이 전일과는 아주 딴판으로 혹은 압제도 주고 혹은 억설도 하고 또 혹은 능욕하고 모멸도 하는 것이라,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검찰관의 태도가 이렇게 돌변한 것은 아마 제 본심은 아닐 것이요, 어디서 딴 바람이 불어 닥친 것이리라, 소위 道心(도심)은 희미하고 인심은 위태롭다더니 빈 문자가 아니로구나.“ 하고 분하게 여겨 대답하기를,  “일본이 비록 백만 명의 군사를 가졌고 또 천만 문의 대포를 갖추었다 해도, 나 안응칠의 목숨 하나 죽이는 권세밖에 또 무슨 권세가 있을 것이냐.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한번 죽음을 맞이하면 그만이요, 또 무슨 걱정이 있을 것이냐. 나는 더 이상 대답할 것이 없으니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고 적었다."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은 법치 국가의 당연한 권리이다. 일본 당국도 처음에는 안중근 의사가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에 동의했다. 안 의사는 이를 두고 "이는 과연 일등 국가의 행동이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내가 오해하여 이 같은 과격한 수단으로 망동을 자행한 셈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을 만큼 의외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영국, 러시아, 한국의 유능한 변호사들이 안 의사를 변호하기 위해 몰려들자 일본은 강한 압박을 느꼈다. 안중근을 지지하는 논리를 반박할 근거가 없음을 의식한 것이다. 그리하여 일제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외국 변호사의 법정 변호를 일절 불허하며, 이곳의 관선 변호사를 선임할 수밖에 없다"고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일본은 안중근 의사가 법정에서 진술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다. 안 의사가 거사의 목적을 설명하려 하자 방청을 금지시키고 "다시는 그와 같은 말을 하지 마라"며 입을 막기에 급급했다.

 

"이때 나는 얼마 동안 묵묵히 앉아 스스로 생각하며 혼자 되뇌었다.

오늘 내가 당하는 이 일이 생시인가 꿈속인가, 나는 당당히 대한국의 국민인데 왜 오늘 나는 일본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인가. 더구나 일본 법률로 재판을 받게 되니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내가 언제 일본에 귀화했던가. 판사도 일본인, 검사도 일본인, 변호사도 일본인, 통역관도 일본인, 방청인도 일본인! 이것은 정녕 벙어리 연설회, 귀머거리 방청회가 아닌가. 이것이 정녕 꿈속의 세계냐, 만일 이것이 꿈속이라면 어서 빨리 깨어나거라! 어서 빨리 깨어 나거라!“ 그러나 이러한 때에 더 설명을 해서 무엇 하랴. 아무런 이야기도 소용이 없었다."

    안중근의사가 홀로 견뎌낸 '법정'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전쟁터에는 그의 편이 아무도 없었다. 그는 그곳에서 철저히 혼자였다.

 

▲ 안중근 의사의 공판이 열렸던 법원 건물     © 최영숙



안 의사는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까지 이 법원 제1호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고, 결국 사형이 언도되었다

 

“사형보다 더한 극히 중한 형벌은 없는가.” 그는 일갈했다.


  세계 각국의 신문과 잡지는 이 공판의 정황을 광범위하게 보도하였다. 영국 기자 찰스 머리모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세계적인 판결에서 승리자는 안중근이며 그는 영웅의 월계관을 쓰고 자랑스럽게 법정을 떠났다. 그의 입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는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하였다.”고 보도했다.

    그는 사형 판결을 받고 감옥으로 돌아와 홀로 생각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예로부터 허다한 충의로운 지사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충간하며 일을 도모한 것이 뒷날 역사에 맞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제 내가 동양의 대세를 걱정하여 정성을 다하고 몸을 바쳐 대책을 세우다가 끝내 허사로 돌아가니 통탄한들 무엇하리요. 그러나 일본국 사천만 민족이 ‘안중근의 날’을 크게 외칠 날이 멀지 않을 것이다. 동양의 평화가 이렇게 깨어지니 백년 풍운이 어느 때에 그칠 것인가. 지난 1895을미년에 한국에 와 있던 일본공사 미우라가 병정을 몰고 대궐을 침입하여 한국의 명성황후 민씨를 시해했으되, 일본 정부는 미우라를 아무런 처형도 하지 않고 석방했는데, 그것은 분명 누군가 위에서 명령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오늘 나의 일로 말한다면, 비록 개인 간의 살인좌라고 할지라도, 미우라의 죄와 나의 죄를 견주어 어느 누가 중하며 어느 누가 경한가, 그야말로 머리가 깨어지고 쓸개가 찢어질 일이 아니야, 내가 무슨 죄가 있느냐, 내가 무슨 죄를 범했단 말이냐.“하고 천번 만번 생각하다가 나는 문득 크게 깨달은 뒤에 손뼉을 치며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과연 큰 죄인이구나. 이는 바로 다른 죄가 아니라, 내가 어질고 힘없는 한국의 인민  된 죄로구나.’

이렇게 생각하니, 마침내 의심이 풀리고 안심이 되었다."


사형 선고를 받고 그 어두운 감옥에서, 죄란 것이 다름 아닌 '어질고 힘없는 한국의 인민 된 죄'라며 손뼉을 치고 웃었을 안중근 의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100년 후를 사는 사람으로서 가슴이 콱 막혀왔다.
 

▲ 옥중에서 집필된 안중근의사의 자서전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     © 최영숙

  
    국선변호사 카마다는 변론을 통해  "본건의 경우에 적용될 실체적 형벌법은 한국법인 것이 명백하나. 한국형법은 섭외적 형벌법규가 없으므로, 법의 불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무죄라고 변론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의 가문은 검찰관이 논고한 바와 같이 그 지방에서는 명문입니다. 피고는 조부로부터 교육을 받아 통감 제8권까지 읽었고, 종교에 대한 신앙심 또한 깊습니다. 게다가 검찰관에 대한 그의 답변하는 태도를 보면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학식있는 사람으로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형법 제 199조의 범위에서 형의 양정을 하신다면, 요컨데 가볍게 징역 3년에 처한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변호인의 요구는 실로 징역 3년입니다."라고 했다. 그로서는 최선의 변론을 한것이었다.
 
그러나 재판장 마나베는 "피고가 이토 공을 살해한 행위는 그 결의가 개인적인 원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치밀한 계획 끝에 감행한 것이므로 살인죄에 대한 극형을 과하는 것이 지당하다고 믿고, 피고 안중근을 사형에 처한다."
고 판결했다.
 
  징역 3년과 사형의 간극은 너무나 컸다.

 

국선 변호사는 안중근 의사에게 항소를 권유했다. 그러나 안 의사는 항소가 목숨을 구걸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는 항소를 포기하는 대신, 『동양평화론』 저술을 위해 형 집행을 한 달 남짓 늦춰달라고 요구했다.


 히라이시 고등법원장이 대답하기를  “어찌 한 달뿐이겠는가, 설사 몇 달이 걸리더라도 특별히 허락하겠으니 걱정하지 마라.”하므로 참으로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돌아와, 항소권을 포기했다.  설사 항소를 한다 해도 아무런 이익도 없을 것이 분명할 뿐 더러, 고등법원장의 약속이 과연 사실이라면 굳이 더 생각할 것도 없어서였다. 그래서 [동양평화론]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그때 법원과 감옥소의 일반관리들이, 내 손으로 쓴 글을 기념으로 갖고 싶다하여 비단과 종이 수백 장을 사 넣고 부탁하므로, 나는 하는 수 없이 글씨를 잘 쓰지도 못하면서 또 남의 웃음거리가 될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매일 몇 시간씩 글을 쓰면서 시간을 보냈다."

  자서전을 읽으며 가장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끝까지 항소하여 일본을 국제사회에서 압박하고, 그의 정당한 담론을 더 펼칠 수도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양평화론』을 집필할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컸던 것이다.

 

일본은 안중근이라는 존재와 그가 집필할 『동양평화론』이 완성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사상이란 일단 정립되면 영원한 동력을 얻기 때문이다.

 

히라이시 뤼순 고등법원장은 『동양평화론』을 다 쓴 다음에 사형을 집행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일본은 이를 어기고 항소했을 때보다 오히려 더 서둘러 사형을 집행했다. 결국 그의 위대한 사상이 담긴 『동양평화론』은 미완인 채로 끝을 맺고 말았다.

 

자서전 『안응칠 역사』는 고향의 홍 신부(빌렘 신부)가 감옥을 찾아와 마지막 성사를 마치고 떠난 것으로 끝을 맺는다.

 

. "인자하신 천주님께서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요, 반드시 거두어 주실 것이니 안심하고 있어라.” 하시며 손을 들어 나를 향하여 강복하신 뒤 떠나가시니, 때는 1910년 경술년 2월 초하루 오후 4시쯤이었다.

이상이 안중근의 32년 동안의 역사, 그 대강이다.

1910년 경술년 음력 2월 초5일 (양력 3월 15일)

여순옥중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쓰다." 
 
    미완으로 끝난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의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중국 뤼순을 동양평화의 근거지로 만들고
2. 한. 중. 일 공동의 군대를 편성하며
3. 한. 중. 일이 동양평화회의를 창설하고
4. 한. 중. 일 공동은행을 만들어 공용화폐를 발행하고
5. 동아시아 곳곳에 동양평화회의 지부와 공동은행 지점을 설치하며
6. 로마 교황 사절을 초빙하여 평화를 위해 중재하도록 하자는 제안이다.


 『동양평화론』은 세 나라가 서로 자존과 독립을 유지하며, 거시적으로 동양의 평화를 이루자는 선구적인 사상이었다. 100년 후의 EU(유럽연합)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 안중근 의사의 유묵들     © 최영숙


    개인의 생사를 염두에 두지 않는 안 의사의 투쟁 정신과 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인품은 당시 법원과 감옥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자아냈다.

 

보물 제569-23호로 지정된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은 사형 집행 직전, 헌병 치바 도시치에게 써준 유묵이다.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이었음에도 필체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자 했던 그의 충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 안중근의사가 순국한 곳     © 최영숙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사형 집행 5분 전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보내온 흰색 한복으로 정갈하게 갈아입고 교형실에 서서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나는 대한 독립을 위해 죽고 동양 평화를 위해 죽는 것이니, 죽어도 유감이 없다."

말을 마친 후 순국하니, 그때 그의 나이 서른둘이었다.

 

▲ 안중근의사가 유언으로 "하얼빈공원 옆에 뼈를 묻어 주고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했던 하얼빈공원     © 최영숙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10일, 두 동생과 홍 신부를 만난 자리에서 「동포에게 고함」과 「최후의 유언」을 남겼다. 이 글은 그가 순국하기 전날인 1910년 3월 25일 자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되어 온 국민의 심금을 울렸다.

"<동포에게 고함>

내가 한국 독립을 확보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삼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도달치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

<최후의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르빈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포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고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어머님 전상서>

예수를 찬미합니다.

 
불초한 자식은 감히 한 말씀을 어머님 전에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인사 못 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감정에 이기지 못하시고 이 불초자를
너무나 생각해 주시니 훗날 영원의 천당에서 만나 뵈올 것을 바라오면 또 기도하옵니다.

이 현세의 일이야말로 모두 주님의 명령에 달려 있으니 마음을 평안히 하옵기를 천만번 바라올 뿐입니다. 분도는 장차 신부가 되게 하여 주기를 희망하오며, 후일에도 잊지 마옵시고 천주께 바치도록 키워 주십시오. 이상이 대오이며, 그밖에도 드릴 말씀이 허다하오나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운 뒤 누누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위아래 여러분께 문안도 드리지 못하오니, 반드시 꼭 주교님을 진심으로 신앙하여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은 정근과 공근에게 들어 주시옵고, 배려를 거두시고 마음 편안히 지내시옵소서. 

아들  도마 올림

<분도 어머니에게 부치는 글 (안중근 의사의 아내) >

예수를 찬미하오.

우리들은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천주의 안배로 배필이 되고 주님의 명으로 이제 헤어지게 되었으나 또 머지않아, 주님의 은혜로 천당 영복의 땅에서 영원에 모이려 하오. 반드시 감정에 괴로워함이 없이 주님의 안배만을 믿고 신앙을 열심히 하고 어머님에게 효도를 다하고 두 동생과 화목하여 자식의 교육에 힘쓰며 세상에 처하여 심신을 편안히 하고 후에 영원의 즐거움을 바랄뿐이오. 장남 분도를 신부가 되게 하려고 나는 마음을 결정하고 믿고 있으니 그리 알고 반드시 잊지 말고 특히 천주께 바치어 후세에 신부가 되게 하시오. 많고 많은 말을 천당에서 기쁘고 즐겁게 만나보고 상세히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것을 믿고 또 바랄 뿐이오.

1910년 경술 2월 14일

장부 도마 올림"

「동포에게 고함」과 「최후의 유언」, 그리고 어머니와 아내에게 쓴 편지는 제각기 대상은 다르지만, 그 안에는 안중근 의사의 깊은 심중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마지막 글들을 대하며 인간 안중근의 모습이 더욱 확연히 가슴에 새겨졌다.

 

안중근 의사의 순국 후, 두 동생이 시신을 넘겨달라고 간곡히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거절하고 그들을 강제로 조선으로 압송했다.

 

일본은 한국인들이 안중근 기념비를 세우고 그의 무덤이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안 의사의 시신을 비밀리에 뤼순 감옥 인근 어느 곳에 묻어버렸다. 근래 몇 년간 한국과 북한, 그리고 중국의 인사들이 안 의사의 유해를 찾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으나, 안타깝게도 아직 그 행방을 찾지 못했다.

 

그의 후손으로서 참으로 안타깝고 진정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정작 독립된 조국에서 우리는 잘 지내고 있는가 싶었다. 그분이 지금의 분단된 조국을 본다면 하늘에서도 땅을 치며 통탄하실 듯했다.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황제를 폐위시킨 일본을 포함하여, 중국과 한국이 상생하는 '동양평화론'을 주창하셨던 안중근 의사가 아니었던가.

 

그런 분이 한민족의 전쟁과 분단의 고착화를 지켜보고 계실 것을 생각하니, 유해조차 찾지 못한 죄송함에 더욱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는 안중근 의사의 자서전을 따라 걸어왔다. 이제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예수살이공동체'의 이름으로 그의 발자취를 본격적으로 따라가 보았다.

 

▲ 3월 23~ 27일까지 하얼빈역 화물 하역장의 이등박문의 저격장소를 갈 수 없다는 통고가 붙다.     © 최영숙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지 100년 후, 그를 존경하는 순례단이 이곳을 찾았다. 그러나 현장에는 또 다른 의미의 '한·중·일 전선'이 형성되어 있었다.

 

하얼빈에는 일본 자본이 상당수 유입되어 있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이곳을 찾을 수많은 한국인을 의식해서인지, 하얼빈역 내 이토 히로부미 저격 장소는 출입이 통제되어 있었다. 매표소에 붙은 통고문에는 3월 24일부터 27일까지 들어갈 수 없다는 표시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결국 안중근 의사의 의거 현장을 직접 확인하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 하얼빈 공원(조림공원) 문 닫히다     © 최영숙


  하얼빈 공원은 안중근 순례 길에서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곳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 의사는 거사를 이틀 앞두고 우덕순과 함께 이곳을 거닐며 거사 계획을 최종 검토했다. 또한, 자신이 죽으면 유해를 이곳에 묻어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반장해달라는 유언을 남긴 곳이기도 하다.

 

현재 이곳은 항일 영웅이었던 리자오린 장군의 유해를 안장하고 장례를 치른 뒤, 1946년부터 '자오린 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안중근 의사가 묻히기를 원했던 유서 깊은 하얼빈 공원조차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겨울철 얼음 축제로 인해 시설물이 위험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겨울에 들어갈 수 없는 공원도 있는가 싶어 의구심이 들었으나, 끝내 안으로 발을 들일 수는 없었다.

 

하얼빈에서 손과 발이 묶인 기분이었다. 그 먼 길을 안중근의 발자취를 따라왔건만, 그분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장소들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함께 순례를 온 젊은이들은 북받치는 분함에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 하얼빈역에서 사진을 담다     © 최영숙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얼빈 공원 밖에서 사진을 찍거나, 하얼빈역 플랫폼의 풍경을 사진에 담는 일뿐이었다. 카메라만 보면 반사적으로 환하게 웃으시는 어머니들과 달리, 저격 장소에 가볼 수 없다는 아쉬움과 분함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젊은이들은 어찌할 줄 모르며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 안중근의사의 기념실이 있는 조선민족예술관     © 최영숙


  우리는 안중근 의사 기념실이 마련된 '조선민족예술관'으로 향했다. 다행히 이곳에는 안중근 의사의 생애와 의거를 기리는 기념실이 조성되어 있었다.

 

▲ 안중근기념실     © 최영숙


  이곳에서도 제지가 있었다. 단체 사진을 촬영할 때 그 어떤 현수막(플래카드)도 펼칠 수 없다고 했다. 아, 이곳이 사회주의 국가라는 사실이 그제야 실감 났다. 중국은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면서도, 이러한 기념일을 기점으로 소수민족의 힘이 결집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고 했다.

 

그런 통제 속에서도 안중근 의사가 중국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존경받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중국 정부가 외국인인 안중근 의사의 거사 100주년 기념우표를 발행한 것만 보더라도 그렇다. 이런 예우는 안중근 의사였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 손을 맞잡다     © 최영숙


  2010년 3월 26일, 천주교 다롄 성당에서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추모 및 동양 평화 기원 미사'가 봉헌되었다.

 

이 미사는 한국의 이용훈 주교와 일본의 다카미 미쓰아키 대주교, 타니 다이지 주교를 비롯한 한·중·일 사제단의 공동 집전으로 거행되었다. 과거의 상처를 넘어 평화를 염원하는 세 나라 사제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감동이었다.

 

미사의 시작을 알리는 성가는 '선구자'였다. 성당 가득 울려 퍼지는 선율 속에 안 의사의 숭고한 넋이 함께하는 듯했다.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강한 기개를 품고 이국땅의 강가를 달리는 독립군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안중근 도마는 가톨릭 신앙에 대한 신심이 매우 깊었다. 아들 분도가 신부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으며, 젊은 시절 10여 년 동안 전교 활동에 매진하기도 했다.

 

안중근연구소의 신운용 연구원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각국의 독립'과 '세계 평화의 구현'이 곧 하늘의 뜻이라고 믿는 종교적 확신에서 나온 것"이라고 평가했다. 

 

▲ 일본 전국에서 모여 순례단에 온 일본의 천주교 신자들 미사가 끝난 후 기념사진을 담다     © 최영숙

 

일본 전역에서 순례단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가톨릭 신자 50여 명과 한국에서 온 신자들이 성당을 가득 메웠다. 일본 사이타마 교구장 타니 다이지 주교는 강론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희는 조선병합 이후 1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 중국의 대련으로 평화 순례단으로서 일본에서 왔습니다. 저희는 중국, 조선반도, 그리고 여타 아시아의 국가들의 여러분께, 침략, 식민지 정책을 행한 것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반성하며, 사죄를 드립니다. 많은 이들의 생명, 생활, 문화를 파괴하고 고통스럽게 했다는 것을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저희는 이 대련에서 중국의 모든 분들, 한국의 모든 분들과 함께 평화의 결의를 새롭게 하고자 합니다. 특히 중국. 한국. 일본이라는 나라와 교회가 협력해서 나아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평화의 길을 개척해 나아가는 것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한국어와 일본어로 강론이 번갈아 통역되었다.

▲ 안중근의사 추모미사를 드리다    © 최영숙


    수원교구장 이용훈(마티아)주교는 강론을 통해 “오늘 우리가 안중근(도마)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이하여 이곳 대련성당에서 한중일 교회의 사제들과 교두들이 한 자리에 모여 미사를 봉헌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대단히 뜻 깊은 은총의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안중근 의사께서도 오늘 한중일 교회의 신자들이 함께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는 모습을 하늘에서 지켜보시며 매우 기뻐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 열심히 전구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오늘 안의사께서 어떻게 천주교 신앙을 통해서 한 개인이 변화되고 동양의 백성들까지도 사랑하게 되었는지, 그분의 신앙과 생애에 대하여 함께 추모하며 동양평화사상의 유지를 실천해 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다.

▲ 여순감옥으로 오다     © 최영숙


 중국 랴오닝성 다롄시 뤼순에 위치한 뤼순 감옥은 일제강점기의 형무소이다. 이곳은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와 신채호 선생이 수감되었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본래 1902년 러시아가 동북 3성에서 항거하는 중국인들을 탄압하기 위해 건축하였으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뤼순을 점령한 뒤 1907년 현재의 대규모 형태로 확장하였다.
 

▲ 사형장으로 가는 길     ©최영숙


   이곳에는 주로 한국인과 중국인, 러시아인이 수감되었는데, 1906년부터 1936년 사이의 수감자는 연간 약 2만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특히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2년부터 1945년 8월 사이에는 약 700여 명의 수감자가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그들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걸어갔을 형장으로의 길. 타국 땅에서 끝내 고국의 땅을 밟지 못한 채 이 길을 걸었을 우리 선조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하고 숙연해졌다.

 

▲ 1934년이후 사용된 사형장     © 최영숙


  이곳은 1934년 이후부터 사용된 사형장이라고 했다. 사형 집행 후 시신이 아래에 놓인 통나무통으로 떨어지면, 별도의 절차 없이 그대로 매장했다고 한다. 한국과 중국, 러시아의 수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저려왔다. 순례단은 그들의 넋을 기리며 깊은 묵념을 올렸다.
 

▲ 공동묘지에 묻힌 수감자들 무덤     © 최영숙


   인근 공동묘지가 발굴되면서 통나무관에 담긴 무덤들이 여럿 발견되었다. 안중근 의사 또한 순국 후 관에 모셔졌다고 전해진다. 당시 일제는 가족의 시신 인도 요구를 묵살하고, 비밀리에 안 의사의 유해를 뤼순의 어느 땅에 묻어버렸다.

 

세월이 흘러 이곳도 변해가고 있었다. 공동묘지였던 터는 기념관으로 바뀌었는데, 대체 이 넓은 땅 중 어느 곳에 안 의사의 무덤이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몰라 가슴이 답답하고 먹먹해졌다.

 

▲ 여순감옥의 안중근 전시관을 보는 사람들     © 최영숙

 

'뤼순 감옥 구지(舊址) 국제지사 기념관'에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많은 추모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흉상은 자신을 기리러 온 사람들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듯했다. 이곳은 한국 측의 지원과 자본이 많이 투입되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분위기가 하얼빈과는 완연히 달랐다.

 

안 의사가 수감되었던 감방 앞에는 한국어로 번역된 안내문이 정갈하게 적혀 있었고, 기념관 내에는 안중근, 신채호 등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전시관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 그들의 생애와 투쟁을 깊이 있게 돌아볼 수 있었다.

 

▲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곳     ©최영숙

 

우리는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신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순 재단에서는 관련 도서관의 자료들을 면밀히 추적하고 연구한 끝에, 안 의사가 마지막으로 순국하신 정확한 지점을 찾아냈다고 한다.
    

▲ 안중근의사가 순국한 장소를 찾은  한국인 노력을 만나다     ©최영숙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신 장소를 추적하던 중, 지하 설계도를 바탕으로 1907년부터 1934년까지 사용된 사형장이 바로 이곳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아닌, 한 사학자의 헌신적인 개인 노력이 일궈낸 결실이었다.

 

같은 중국 땅인 하얼빈과 뤼순이었지만, 어느 나라의 기업이 더 많이 진출해 있느냐에 따라 안 의사의 발자취가 서린 장소들의 위상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순국 장소조차 한 사학자의 고군분투 끝에 겨우 찾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저려왔다. 안 의사의 유해를 찾기 위해 이분들이 얼마나 더 많은 사료를 뒤적이며 애를 썼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안 의사가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 비록 지금은 갈라졌으나 남과 북 모두는 과연 지금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하는 회한이 밀려왔다.

 

▲ 신채호선생이 수감되었던 35호 감방과 복도     ©최영숙


뤼순 감옥 35호 감방에 수감되었던 신채호 선생의 거처도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숨결이 서린 이곳에 또 다른 민족의 등불이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뜨겁게 했다. 좁고 어두운 그 감방 안에서 끝까지 꺾이지 않았던 선생의 결연한 기개가 벽면마다 배어 있는 듯했다.
 

▲ 여순 감옥 내의 수감자들을 고문하던 형기구들     © 최영숙


  수감자들을 고문하던 형기구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10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흘렀건만, 고초를 겪던 수감자들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여 몸서리가 쳐졌다.

 

▲ 감방에서 바라본 창밖의 풍경     © 최영숙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던 이들은 이 지옥 같은 공간을 벗어나 얼마나 저 밖으로 나가고 싶었을까. 따스한 햇살 한 줄기 온전히 받지 못한 채 스러져간 영령들이 얼마나 많을까 싶어 마음이 저려왔다.

 

▲ 법원의 분향소     © 최영숙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일본의 침략을 받고 있던 중국 사회를 크게 격동시켰다.

 

중국의 국부 쑨원(손문)은 “중·한 양국은 글과 인종이 같은 동문동종(同文同種)이며 본래 형제와 같은 나라였다. 그러므로 한국의 독립을 돕는 데 중국은 원조의 의무가 있다”라고 역설했다.

 

안중근 기념관에는 저우언라이(주은래) 총리의 어록도 새겨져 있었다. 그는 “중일 갑오전쟁 이후,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때부터 양국 인민이 공동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은 시작되었다”라고 평가했다.

 

안중근 의사처럼 남북으로 갈라진 한민족은 물론, 중국까지 아우르며 존경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인물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100년 후 한국인들이 법정을 가득 메우고 안중근의사의 일대기를 보다     © 최영숙


   안중근 의사가 재판을 받았던 관동주 고등법원은 한때 병원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나, 한국의 뤼순재단이 이를 매입하여 현재는 '안중근 의사 법원 기념관'으로 탈바꿈했다.

 

일본인 판사와 검사, 그리고 일방적인 방청객들로 둘러싸인 적진 한복판에서 안 의사는 외치셨다. “내가 언제 일본에 귀화했느냐. 이것은 벙어리와 귀머거리의 재판이다!”라고 일갈했던 그 역사적인 법정. 이제 그곳의 방청석은 한국인들로 가득 메워졌고, 사람들은 숙연한 마음으로 안 의사의 일대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는 한·중·일 세 나라의 공존과 화합을 도모하는 '동양평화론'을 설파하셨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각국의 이해관계와 영향력에 따라 유적지의 위상이 좌우되는 현실을 마주하며, 그분이 꿈꿨던 진정한 평화의 길이 얼마나 멀고도 험난한지 새삼 절감했다.

 

 

▲ 윤보선 대통령이 훈장을 추서하다     © 최영숙

 

최근 안중근 의사를 '의사'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장군'이라고 불러야 할지를 두고 호칭 문제가 거론되고 있다.

 

사카이 요시이키의 심문 보고서에 기록된 안중근 의사의 답변을 보면, “어떤 사람은 나를 암살자객이라고 하는데 이는 너무 무례하다. 내가 정정당당하게 포진하고 이등의 한국점령군을 대항한지 벌써 3년이 된다. 각지에서 의군을 조직하여 고전하는 동안 할빈에서 성공적으로 이등을 죽인 나는 독립군의 주장이다. 만인이 보는 앞에서 달성한 승리는 독립군의 광명정대한 행동이며 세인이 공인하는 사실이다. 나의 염원의 나의 시체를 할빈에 묻어 유지를 관철하며 태극기가 하늘에 높이 휘날리게 하는 것이다.”(동상서 제452페이지)


 그는 독립군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를 '안중근 장군'이라 호칭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타당한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를 '안중근 의사'라 부르는 것이 더 크고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서전인 《안응칠역사》를 보면, 거사 후 미조부치 검찰관의 심문 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죽어야 할 15가지 죄명을 천명했을 때 검찰관의 첫 반응이 이를 뒷받침한다.

“당신은 참으로 동양의 의사(義士)라 할 수 있겠소. 의사를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법은 없으니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안중근 의사는 중대한 국사 정치범이었기에 당시 일본 형법으로는 사형에 처할 수 없었다. 검찰관 또한 그 법리를 알고 있었기에 '의사를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법은 없다'고 말한 것이었다.

 

그는 동양 평화라는 거대한 대의명분을 실현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했다. 우리 겨레를 넘어 인류 전체의 평화를 위해 의거를 감행했기에, 그 의미의 확장이 더욱 크고 숭고하게 다가온다. 그가 비록 '동양평화론'을 미완으로 남긴 채 떠났으나, 1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의 원대한 구상이 더욱 빛을 발하며 주목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여순 감옥내에 마련된 안중근의사의 기념실     © 시흥시민뉴스


   일본의 멸망과 회복, 조선의 독립과 분단, 그리고 중국과 대만이 대립하는 현시점에서도 '동양평화론'을 주창했던 그의 사상은 세월을 뛰어넘어 더욱 큰 울림으로 확장되고 있다.

전옥 구리하라가 사형집행문을 낭독한 후 소노키가 이를 통역했다. 마지막 유언이 있느냐는 물음에 안 의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의 행동은 본래 동양 평화를 위함이었으므로 다시 한탄할 바 없으나, 다만 여기 모인 일본 관헌들은 이후 한일 친선과 동양 평화에 진력하기를 바란다.”

 

그는 약 3분간 기도를 올린 후, 마지막으로 ‘동양 평화 만세’를 외치고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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