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주년 4.19혁명 기념식이 2011년 4월 19일 10시, 서울 수유동 국립 4.19민주 묘지에서 열렸다.
4.19국립묘지 앞에서는 '독재자 유가족 성역 출입 반대'라는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는 분을 만났다. 이날 이승만 전 대통령의 아들 이인수 씨는 사과 성명을 발표하려다 유가족들의 제지로 발길을 돌렸다.
우리나라 헌정사상 최초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불의의 독재 권력에 항거한 '4.19의거'가 '4.19혁명'으로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공식 기록상으로는 오랫동안 '4.19의거'로 불리다 1993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4.19혁명'으로 격상되었다. 그 결과 서울시에서 관리하던 공원묘지도 성역화 사업을 거쳐 1995년 4월 19일 국립묘지로 승격되었다.
기념식이 끝나고 분향을 했다.
4.19 묘역에는 어머니들의 눈물이 넘쳐흘렀다. 아들 이기태의 묘 앞에서 김정연(95) 할머님을 뵈었다. "내가 죄가 많아서 얼른 가지도 못해. 졸업하면 어미 호강시킨다더니 자기 먼저 가면 어째. 어미 가슴이 숯덩이가 된다"며 가슴을 치셨다. 아들이 떠난 지 51년이 되었지만 어머님의 슬픔은 자식을 잃은 51년 전 4월 19일 그날 그 시간에 정지되어 있었다.
곁에 계시던 조카분이 말씀하셨다. "고모님이 남편 사별 후 포목 장사를 해서 외아들을 키웠는데 경희대 졸업을 1년 앞두고 24살 시위 중에 돌아가셨다. 그 뒤 혼자서 그 긴 세월을 살고 계신다. 고모님이 아들 졸업하면 장가보낸다고, 며느리가 혼수로 해올 텐데도 숟가락, 젓가락까지도 모두 사놓았었다. 돌아가신 아드님이 4.19혁명이 나기 1주일 전에 고향에 내려와 집안 선소들을 다 찾아 인사하고 집안 어른들도 모두 찾아뵙고 서울로 올라간 1주일 뒤 4월 19일에 돌아가셨다. 마치 당신이 돌아가실 것을 안 것처럼 했다."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마산 3.15의거에서 경찰 사격으로 학생과 시민들이 다쳤다. 4월 11일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었다. 그때쯤 서울은 폭풍전야였을 것이다. 4월 12일경에 고향으로 내려가 선산과 집안 어른들에게 인사를 드리면서 결심을 한 것은 아닌가 싶었다. 포목점을 하면서 홀몸으로 자식을 번듯하게 키워주신 어머님께 졸업해서 호강시켜 드린다던 그 귀한 아들은 24살에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어머님의 한과 함께 이곳에 묻혔다. 44살에 자식을 잃은 어머니는 51년간 그 깊디깊은 한을 안고 사셨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할 수 있는 것은 할머님 손을 잡아드리는 것뿐이었다. "고맙습니다." 할머님이 말씀하신다. 순간 부끄러웠다. 내가 무엇을 했길래 이 어르신에게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가 싶었다. "내년에 올까 모르겠다"며 친척의 부축을 받으시며 내려가셨다. 부디 건강하시길 기원했다.
학생모를 쓴 친구의 사진을 쓰다듬고 있는 노신사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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