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5일, 서오릉을 다녀왔다. 서오릉은 도성 서쪽에 명릉, 익릉, 경릉, 홍릉, 창릉 등 다섯 개의 능이 모여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입구에 들어서니 경릉의 홍살문이 반긴다. 홍살문은 궁전이나 능, 묘 앞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으로, 신성한 공간으로 진입하기 전 경건하고 참된 마음을 가다듬으라는 뜻을 담고 있다.
경릉은 의경세자(추존 덕종)와 소혜왕후 한씨의 능이다.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는 20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그의 죽음에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전해온다. 세조가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기로 마음먹은 날 꿈을 꾸었는데,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가 나타나 세조를 꾸짖었다고 한다.
“네가 나의 아들을 죽이니, 나도 네 자식을 살려두지 않겠다.”
잠에서 깨어난 세조에게 동궁 내시가 달려와 세자의 위독함을 알렸으나, 세조가 도착했을 때 의경세자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 ▲ 의경세자 (추존덕종)의 대군묘 형태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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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에 능했던 세조가 친히 택지로 정한 이곳에 의경세자가 안장되었다. 그는 소혜왕후와의 사이에서 월산대군과 성종, 명숙공주를 두었다. 훗날 성종이 왕위에 오르며 그는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이곳의 형식은 독특하다. 덕종은 세자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기에 대군묘의 제도에 따라 난간석, 망주석, 무인석 없이 문인석 한 쌍만이 배치되었다.
| ▲ 왕릉의 형식을 갖춘 소혜왕후의 능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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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소혜왕후는 아들 성종 대에 인수대비로서 권력의 중심에 있었고, 연산군 대에 이르러 승하했을 때는 대비의 신분이었다. 따라서 그녀의 능은 왕릉의 격식에 맞춰 석물들이 화려하게 배치되었다. 특히 왕릉제의 전통인 ‘우상좌하’의 원칙을 깨고 왕비릉이 오른쪽 언덕에 조성된 점이 눈에 띈다.
소혜왕후 능의 호석은 머리에 눈을 이고 있는 모습이 마치 익살스러운 애완동물처럼 다정해 보였다. 사나운 기상으로 잡귀를 쫓기보다는, 찾아오는 이들과 함께 놀아줄 것만 같은 친근함이 느껴져 한참을 바라보았다.
| ▲ 소혜왕후릉에서 덕종의 능을 바라보다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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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혜왕후의 능에서 내려다본 덕종의 능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성종이 왕이 되지 못했다면 소혜왕후 역시 덕종 곁에 소박한 대군 묘의 형태로 묻혔을 것이다. 그러나 인수대비로서 삶을 마감한 그녀는 왕릉 중 유일하게 남편을 왼편에 둔 주인이 되었다. 인생의 결과는 결국 ‘관 뚜껑을 닫아봐야 안다’는 식상한 진리가 이곳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 ▲ 사도세자의 생모 선희궁 영빈 이씨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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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오릉의 능과 원, 묘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서려 있다.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가 묻힌 수경원이 그중 하나다. 아들을 영조에게 고발했고 그 아들의 비극적인 죽음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봐야 했던 어머니의 고통스러운 삶이 눈 덮인 묘역 위로 겹쳐 보였다.
수경원을 지나면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김씨의 익릉이 나타난다. 숙종과 그의 여인들만큼 극적인 삶을 산 이들도 드물 것이다. 인현왕후와 장희빈, 숙빈 최씨까지, 그녀들은 권력과 자식의 안위를 위해 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사투를 벌였다. 그러나 이 모든 비극을 냉철하게 조정하고 이용했던 이는 다름 아닌 숙종이었다. 그의 계산은 늘 정확하고 냉혹했다.
| ▲ 명릉-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민씨,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능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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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들에게 변덕스러웠던 숙종과 인현왕후가 잠든 명릉에 도착했다. 숙종의 의중에 따라 장희빈은 왕후가 되었다가 사약을 받았고, 인현왕후는 폐비가 되었다가 복위되는 등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숙종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국모들을 철저히 이용하고 사지로 내몰았던 냉혈한 군주라는 생각이 들었다.
| ▲ 정자각에서 바라본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의 쌍릉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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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각에서 바라본 두 봉분은 죽어서야 비로소 다정해 보였다. 인현왕후는 평생 바람 잘 날 없게 했던 남편 곁에서 이제야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었다.
눈 덮인 호석의 뒷모습은 수줍은 여인을 닮았다. 사방을 지켜야 할 커다란 눈망울도 잠시 감은 채 쉬어가는 듯했다.
문인석과 무인석, 석마와 장명등도 흰 눈에 덮였다. 저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 ▲ 숙종의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능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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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의 제2계비 인원왕후는 영조 33년에 승하하여 왕릉의 서쪽 언덕에 따로 조성되었다.
경종을 낳고 궁녀에서 왕후까지 올랐다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한 장희빈의 대빈묘는 서오릉 한 귀퉁이에 자리하고 있다. 대빈묘 앞에 서면 마음이 한없이 쓸쓸해진다. 극 중의 표독한 모습이 아닌, 남자의 얕은 사랑에 인생을 걸었던 한 여인의 삶이 애처롭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녀의 라이벌이었던 숙빈 최씨의 소령원은 명당 중의 명당으로 불리지만, 이곳 대빈묘는 다른 곳에서 이장되어 온 탓인지 안쓰러움이 더했다.
300년 전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아는지 모르는지, 문인석은 녹아내리는 눈을 진땀처럼 흘리고 있었다.
평일임에도 산책하는 시민들을 만났다. 서울 근교에 이토록 아름다운 숲길이 있다는 것은 역대 왕들이 후대 백성들에게 베푸는 성은이 아닐까 하는 싱거운 상상을 해보았다.
| ▲ 홍릉-21대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의 능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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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오릉에서 풍광이 가장 좋다는 홍릉에 도착했다. 이곳의 정성왕후는 오늘도 오른쪽 자리를 비워둔 채 영조를 기다리고 있다. 영조는 생전에 정비 옆에 자신의 자리를 미리 마련해 두었으나, 사후에는 66세에 맞이했던 15세의 왕비 정순왕후와 함께 동구릉의 원릉에 안장되었다.
살아서 누린 권력과 의지가 죽은 뒤 옆자리에 누가 누울지를 결정했다. 영원히 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정성왕후의 홍릉 아래로는 군부대의 우렁찬 구호 소리가 들려왔다. 고요해야 할 왕릉과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 소리를 듣는 무인석의 표정만큼은 온화했다.
정자각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눈을 치우는 관리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분들의 노고 덕분에 험한 눈밭을 편안히 다닐 수 있다는 생각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제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능인 창릉은 공사가 한창이었다.
| ▲ 괭이를 머리에 기대고 있는 호석의 모습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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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이 처진 공사장 안의 호석은 눈 대신 괭이를 머리에 기대고 있었고, 밖의 석마 역시 괭이를 옆구리에 찬 이채로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변해도 왕명을 받들어 능을 지키는 석상들은 여전히 경건하게 홀을 받들고 있거나 부릅뜬 눈으로 왕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능과 원, 묘마다 각자의 역사를 품고 있는 서오릉 탐방을 마쳤다.
그들의 삶은 역사였고, 시대에 따라 그 삶을 바라보는 해석도 달라진다. 무덤을 통해 역사의 행간을 읽는 즐거움은 남달랐다. 고요한 풍경과 소복이 쌓인 눈이 그들의 고단했던 삶을 따뜻하게 다독여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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