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교육의 선구자 최긍렬 선생<1>

떠난지 40년만에 재평가되는 민족교육자

김규성(한국효도회 시흥지역회장) | 기사입력 2013/10/06 [20:45]

시흥교육의 선구자 최긍렬 선생<1>

떠난지 40년만에 재평가되는 민족교육자

김규성(한국효도회 시흥지역회장) | 입력 : 2013/10/06 [20:45]
▲최긍렬(1901~1963) 선생
우리는 한 인물을 평가할 때 관 뚜껑에 못을 박고 난 연후에 시작되어야 한다고 한다.
주변에 죽음과 더불어 의미가 없어져 버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죽은 다음에 더욱 음미하며 평가되는 사람이 있으며, 또한 평가되어야 할 사람이 있기도 하다. 이가 곧 시흥의 민족교육자 최긍렬 선생이다.

그의 생애의 특질은 한명의 평교사로서, 학교설립자로서, 학교장으로서, 학교사환으로서 교육현장을 지켜왔다는 것이다. 민족교육자로 추앙받아야 할 분이 가신 지 40년만에야 재평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일제강점기 1920~1930년대만 하더라도 시흥지역은 빈곤과 무지에 허덕이는 시골 농촌마을이었으며, 교통 불통의 오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분처럼 정통적인 교사교육을 받지 않은 채 개인적 신념에 따라 농촌 청소년들을 깨우쳐 인격적 감화를 준 인물은 흔치 않다. 배움의 길이 막힌 가난한 농촌청소년교육에 전념한 그의 생애는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다.

세상을 떠나신지 40년이 되는 지금에야 일부제자들과 지역유지들의 힘을 모아 공적을 추모하는 운동으로 모교에 공적비를 세우고, 장학회를 만들어 후예들을 키우는 아름다운 행사들이 벌어져 시민의 한사람으로 박수를 보내고자 한다.
 
또한 시와 문화원이 함께 선생의 묘소를 이전하지 않고 묘역을 정비하여 지역문화유적지로 지정하고 공원화를 추진하고 있어 이제야 제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이다.
 
필자는 선생님의 생애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주기별로 분류하여 보았다.
 
 
최긍렬 선생의 생애분류
 
제1기는 일제 수난기다.(1901년 출생~서광잡지사 근무) 일제 강점기인 1901년 1월11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에서 출생하여 8살에 초등학교 들어가 4년제 과정을 졸업하고,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중고등과정) 에 입학했다. 어린학생의 몸으로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일경에 체포되어 수개월 만에 풀려나는 동시에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말았다. 이때가 3학년 18세 때로, 한창 공부할 청소년 나이에 강제로 쫒겨난 것이다.

당시 경성제일고보라면 전국의 수재들만 입학한다는 명문공립학교로 이름이 나 후에 경기고등학교가 된다. 일본의 강압으로 내 나라의 말과 글과 역사와 혼을 빼앗긴 젊은 학생들의 분노가 3.1독립 만세운동으로 점화된 것이었다. 이때가 최긍렬 선생에게는 가장 큰 충격의 시기였으며, 극일교육일념(克日敎育一念), 즉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는 교육의 길 밖에 없다’ 는 신념을 갖게 된 동기로 본다. 다음해에 ‘서광’ 사에 입사하여 2년 동안 근무하며 미디어의 중요성을 익히게 된다.
 
제2기는 교육준비실험기로 본다.(1921 군자학원~1945년 광복까지) 잡지사를 나와 시흥 군자지역을 선택하여 ‘학원’ 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는 밝혀진 바는 없으나, 당시 시흥은 농촌마을, 어촌마을이 산재한 전형적인 빈곤농촌의 오지였다. 교통수단이나 통신수단이 형편없었다. 경인선 개통이 1899년, 경부선 개통이 1905년, 수인선 협궤열차는 1937년에야 되었다. 1920년대 군자를 오려면 안양역이나 부천역에서 도보로 걸어 다닐 때이다.
 
군자학원은 문맹퇴치를 위한 작은 초등학교 수준의 공부방으로 시작하다가 당시 군자초등학교가 처음 개교하자 중단된 공부를 마치기 위해 배재고보(현재 배재고등학교)로 진학하여 1927년에 그의 나이 26살 만학으로 졸업하게 된다. 졸업후 ‘대조’ 잡지기자, 대성학원강사, 안양일동에서 학원설립운영 등 여러 곳을 전전하게 된 것은 3.1운동 불온사상의 요시찰인물로서 일본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게 된다. 탄압과 감시 때문에 젊은 패기와 꿈을 펼치지 못하는 암혹의 시기였다.
 
상당기간 방황과 혼란의 시기였지만 이를 극복하게 된다. 1945년 8.15 광복은 38년의 강압통치가 물러가고 우리 민족에게 광복의 기쁨을 안겨주었다. 청년 최긍렬에게는 새로 태어난 최대의 축복을 받은 셈이다.
  
제3기는 교육활동기였다.(1945년 광복에서부터 1950년 6.25 전쟁)
 
1940년부터 시흥논곡에 들어가 조그만 허름한 집을 얻어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가난한 농민들은 아이들을 가르칠만한 여유가 없었다. 근처에 안산초등학교가 있었지만 집에서 농사짓는 부모를 도와 농사를 익히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이긴다.’ 고 외쳐보지만 경제적 어려움은 여전했다.
 
교육이란 흐르는 물에 붓으로 글씨를 쓰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때에도 교사는 바위 위에 글씨를 새기는 심정으로 해야 하는 것이 교육자라는 것을 스스로 터득하면서 한 마을에서 민족교육에 전념했다. 이곳 논곡학원에서 오매불망 8.15해방을 맞았지만 아이들을 떠날 수 없었다. 논곡에 온지 7년 만에 이 학원도 아이들을 안산초등학교로 보낸후 문을 닫았다. 잠시 안산초등학교 임시교사로 있다가 시흥의 무지동 소송고등공민학교 교감으로 취임하여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더 이상 지속하기 어려웠다.
 
나라 없는 망국의 한이 사무쳤던 자유혼의 민족교육선구자 최긍렬 선생이 해방된 우리 땅에서 참교육을 시도했지만 또 다시 좌절을 맛보게 된다. 또한 아들을 극진히 사랑했던 교직자인 부친마저 별세하는 아픔을 겪게 된다.
 
제 4기는 교육결실기에 해당한다.(1950년 군자고등공민학교 설립부터 1954년 군자중학교인가)
 
당시 필자는 초등학교 4학년 때인데 새재마을(지금의 장현동)에 중학 과정을 배울수 있는 고등공민학교가 있다는 얘기는 들었다. 학교종이 울리는 소리가 바람결에 우리 삼거리마을까지 들릴 때가 많았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월곶 어느집 사랑방에서 시작한 학교가 학생들이 늘어나자 새재마을 학부모의 도움으로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를 빌려 교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학교형식을 갖춘 학년별 수업이 진행되고, 피난 왔던 젊은 교사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심혈을 기우렸다. 최긍렬 선생은 대표교사에서 어느 틈엔가 교장선생으로 호칭이 변하기도 했다.
 
그는 인생의 가장 소중하고 행복한 가정을 가져보지 못했다. 1951년 월곶동에서 50세 때에야 이화진 부인을 맞게 된다. 비록 셋방에 살 망정 사랑하는 부인을 맞아 학교건축에 더 신경을 써야하는 처지 때문에 만혼의 행복한 신혼도 누리지 못하는 듯 했다.

최 교장은 역사, 지리시간에 조그만 나라 스위스 내용이 나오자 “세계적으로 스위스의 최대 산물은 페스탈로찌이다” 라면서 교과서를 덮고 위대한 교육자 페스탈로찌 이야기로 시작하여 고조선, 대고구려, 세종과 한글, 이순신과 거북선의 역사이야기를 비롯하여 자연과 생명의 신비로운 이야기로 한없이 연결된 강의에 시간가는 줄 모랐다는 증언이다.

교육방법은 교육학자들의 이론만이 아니다. 학생들에게 자신을 알게 하고, 그의 영혼에 불을 심어주어 스스로 탐구하게 하는 구도적 자세를 지니게 하는 일일 것이다.
 
‘인격적인 만남에 의해서 새 사람이 되며 제자가 진리를 공동으로 생산하는 일, 만남에 의한 영혼의 전향, 진리의 공동생산, 이것이 교육이다’라고 프라톤은 교육을 정의했다.
 
참으로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최긍렬 선생 같은 진정한 교사는 드물 것이다. 그는 참으로 우리고장의 참교육 민족교육자였다.
 
이곳 새재마을 장현동의 학생수가 넘치고, 제대로 된 학교건물이 필요했다. 1952년 거모동 산 58번지에 유지들의 도움으로 부지를 마련했으나 건축할 비용이 없었다.
 
이때 최 교장의 머릿속에는 서울에 있는 마지막 남은 유산중에 옛 집터를 팔기로 했다. 유산까지 처리하여 학교 짓는데 들어갔지만 택도 없었다. 마을을 찾아다니며 ‘나무동냥’을 하게 된다. 논틀, 밭두렁에 높이 자라고 있는 포푸라나무 주인을 찾아 학교교실 기둥으로 쓸수 있도록 기증을 받는다. 사실 포푸라는 목재용이 아니다. 기둥목재로 쓰기에는 약하여 부적합하지만 목재가 부족했다. 2년만에 비록 흙바닥이지만 교실 4칸이 세워진다. 1954년 정규 공립 군자중학교로 인가받아 필기고사 면접고사 전형을 거쳐 선발할 정도의 군자면내 유일의 중학교가 탄생된 것이다. 
 
그러나 최긍렬 교장은 피땀 흘려 재산을 털어 세웠던 신설 군자중학교의 교단을 유유히 떠났다. 유지들과 교사들의 만류를 뒤로한 체 “내가 욕심을 가졌다면 다른 사업을 하였을 것이요. 가난한 아이들이 저렴한 공립학교 등록금으로 공부할 수 있으니 다행이요”
 
한 인물의 위대한 결정은 훗날 많은 사람들에게 가슴을 울리게 한다.
 
 
 
<2>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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