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의 인간상록수 崔容信 선생

"잠자는 자 잠을 깨고, 눈먼 자 눈 떠라, 배워야 한다"

김규성 | 기사입력 2013/03/17 [23:05]

안산의 인간상록수 崔容信 선생

"잠자는 자 잠을 깨고, 눈먼 자 눈 떠라, 배워야 한다"

김규성 | 입력 : 2013/03/17 [23:05]
샘골 찾아 참배하는 젊은이들 

그러니까 필자가 20대도 안된 젊은 시절 능곡마을에서 농촌청소년 4-H크럽을 할 때였다.

우리집 사랑방에 도서실을 만들어 심훈의 ‘상록수’를 돌려가며 읽고, 또한 류달영 교수가 쓴 ‘최용신 양의 생애 소전’을 읽으며 뜨거운 감명을 받았다.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이 바로 최용신이 었으며, 그가 농촌에서 계몽운동을 하다 쓰러진 샘골을 방문하기로 했다. 

친구 상복이, 영학이와 함께 한번도 가보지 않은 화성군 반월면 천곡리를 찾아 나섰다. 지금은 교통수단이 좋아 가까이 있지만, 당시는 수원 근처라는 것만 알고 무택대고 물어물어 걸어서 아침 일찍 떠나 오후 3시쯤 도착할 수 있었다. 

50여년 전이니 40여 호쯤 되는 농촌마을 언덕 위에 붉은 벽돌 천곡교회가 있었고, 바로 옆에는 최용신 선생 강습소 교실 한칸에, 초라한 함석지붕이 덮혀 있었다. 그 앞에는 향나무 2그루가 싱싱하게 상록수로 자라고 있다. 

교실이 좁아 들어가지 못한 어린아이들이 상록수에 매달려 선생님이 크게 외치는 소리를 받아, “가갸 거겨....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잠자는 자 잠깨고, 눈먼 자 눈떠라” 복창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솔밭 언덕아래 작은 무덤 앞에는 ‘농촌계몽운동가 최용신 선생의 묘’라는 1미터 크기의 작은 묘비가 서 있다. 우리 일행은 들국화를 꺽어 묘비에 올려놓고 머리숙여 묵념으로 참배하였던 기억이 새롭다.

필자가 훗날 고향마을에서 농촌청소년들에게 교육을 시작한 것도 최용신의 상록수 정신에 영향을 받은바 크다고 하겠다. 

농촌교육은 민족운동이었다.

대한민족 말살의 암울한 일제강점기에 한줄기 빛이 된 상록수! 국권상실기의 암울했던 시기에 농촌계몽운동으로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 최용신(1909-1935)선생은 협성여자신학교 농촌지도사업과에 재학 중이었다. 선생은 1931년 10월 YWCA교사로 샘골(泉谷)마을에 (지금의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파견되어 마을 사람들과 YWCA 지원으로 1933년 1월 천곡학원 건물을 건축한다. 

한글 문맹퇴치, 생활개선, 수예, 재봉, 역사, 성경 등 민족혼과 애국심을 심어주는 교육에 헌신하였으나, 1935년 1월 23일 과로와 영양실조로 인한 장중첩증(장이 겹쳐꼬인 증상)으로 향년 26세의 처녀의 몸으로 유명을 달리 하였다

고인의 숭고한 삶에 감동한 주민들에 의해 ‘사회장’으로 110명의 어린이와 주민 1000여명의 애도 속에 치루어져,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 3대언론에 시골 마을 기사가 보도된바 있다.

학교가 잘 보이고 종소리가 들리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일리 공동묘지에 묻었다가, 다시 이장하여 안산시 향토유적 18호로 지정됐다.

선생의 농촌계몽과 독립을 위한 눈물겨운 행적은 심훈(沈熏)의 소설 상록수(常綠樹)에서 실제화되어 농촌운동의 귀감이 되었으며, 정부에서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기도 했다. 

추모비에는 ‘황혼이 머무는 길목에서 선생님의 가르침의 글귀를 다시 한번 되새겨 봅니다. 잠자는 자 잠을 깨고, 눈먼 자 눈떠라. 살길을 닦아보세. 조선의 부흥은 농촌에 있고, 민족의 발전은 농민에 있다(최용신 선생)’ 라고 새겨져 있다.

항상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선생의 유훈 중에는 ‘겨례의 후손들아 위대한 사람이 되는데 4가지 요소가 있나니, 첫째는 가난의 훈련이요. 둘째는 어진 어머니의 교육이요. 셋째는 청소년 시절에 받은 큰 감동이요. 넷째는 위인의 전기를 많이 읽고 분발 함이다.’ 라고 했다. 

그녀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결국 선생은 과로와 굶주림으로 교단에서 쓰러져 1935년 26세의 꽃 같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남기고 간 것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한다면 시골마을의 초라한 학원 건물이나 몇 사람 안 되는 시골 학생이 전부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소중한 가치를 남겼다.

‘희생과 봉사의 정신, 나라 사랑의 정신’ ‘늘 깨어서 거짓을 이겨내고 옳은 길을 추구하는 산 정신, 늘 푸른 정신’ ‘죽음에 이르러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희망의 정신’ ‘아름다운 조국 해방의 대망’ 을 남겨 주었다. 

이러한 불굴의 정신을 초지일관 실천한 선생의 전 생애가 하나로 응축되어 '상록수 정신'으로 형상화되었다. 이는 자랑스러운 민족의 유산으로 민족사 위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상록수 정신'이 그 가치를 온전히 드러낸다면 자랑스러운 민족의 유산으로, 미래의 조국의 역사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나갈 '민족정신'으로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예수는 하나의 불행한 시골 목수에 불과한 했으며, 페스탈로치는 초라한 고아원의 원장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영원히 미래를 제시하는 존재가 되어 있다.

최용신 선생의 짧은 생애는 현대적 의미에서 소외된 지역사회에 뛰어들어 복지인의 삶을 불태운 아름다운 상록수로 부활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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