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 맹자학당 벗들이 지난달 29~30일, ‘조선의 정신, 양백지간(兩白之間)에서 발흥하다’라는 주제로 역사 인문 기행을 다녀왔다. 이들은 경종대왕 태실을 시작으로 도담삼봉, 온달산성, 어의곡리 계곡, 소백산 트래킹, 베틀재, 마구령, 부석사, 성혈사, 소수서원 등 소백산 주변의 역사적 유적지를 두루 답사했다.
평소 맹자의 가르침을 함께 공부하던 도반(道伴)들은 29일 새벽 5시 30분, 시흥시청소년수련관에 모여 설레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들의 첫 번째 목적지는 충북 충주시 엄정면에 위치한 경종대왕 태실이었다.
| ▲ 서오릉에 있는 장희빈의 대빈묘 © 시흥시민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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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대왕’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교차하는 인물은 그의 어머니인 장희빈(희빈 장씨)이다. 조선시대 여성 중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높은 궁극의 자리까지 올랐던 여인이며, 그녀의 삶 자체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극적인 요소로 가득 차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시대를 대변하는 최고의 여배우들이 장희빈 역을 맡으며, 과거의 단편적인 ‘악녀와 요부’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가장 치열하게 개척해 나간 주체적인 여인’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앞으로도 우리 시대의 거울에 맞춘 또 다른 장희빈이 계속해서 재탄생할 것이다.
| ▲ 망초꽃이 흐드러지게 핀 경종대왕 태실 오르는 길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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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대왕 태실로 오르는 호젓한 산길은 온통 하얀 망초꽃밭으로 물들어 있었다. 경종대왕 태실은 1975년 8월 20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된 곳이다. 이곳 태봉(胎峰)에 안치된 조선 제20대 왕 경종(景宗, 1688~1724)의 태실은 그가 태어난 이듬해인 1689년(숙종 15) 10월에 건립되었다.
경종은 숙종의 맏아들이자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기사환국 등의 대격변을 몰고 온 장본인이기도 하다. 1688년에 태어나 이듬해 바로 원자로 책봉되었으며, 1720년부터 1724년까지 왕위에 재위했다.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이른 죽음을 맞이하자, 뒤를 이은 영조는 1726년(영조 2) 9월 8일 선왕의 태실을 더욱 웅장하게 중건했다. 태실비를 세우고 순호군(巡護軍) 16명을 배치해 이곳을 엄격히 지키게 했으며, 3년마다 안위제(安慰祭)를 지내며 선왕을 기렸다.
이후 1831년(순조 31) 한 차례 도굴되는 수난을 겪었고, 일제강점기인 1928년에는 조선총독부가 관리의 효율성을 핑계로 전국의 왕실 태실을 창경원(창덕궁) 안으로 강제 이전했다. 이때 경종의 태실 역시 처참히 파헤쳐져 태항아리는 수거되고 석조물들은 훼손된 채 방치되는 아픔을 겪었다. 현재의 모습은 1976년 당시 중원군(현 충주시)에서 흩어진 석재들을 모아 복원한 것이다.
태실의 구조는 원형 대석(臺石) 위에 종 모양의 탑신석을 놓고, 그 위에 모임지붕 형태의 팔각형 옥개석을 올린 전형적인 ‘석종형 부도(石鐘形浮屠)’ 양식을 따르고 있다. 옥개석의 낙수면에는 합각선이 뚜렷하며, 꼭대기에는 구슬 모양의 상륜부 장식인 보주(寶珠)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태실 주위에는 공들여 다듬은 석재로 짜 맞춘 팔각형 석조 난간이 둘러쳐져 호위하고 있다. 태실 바로 앞에는 1726년에 세워진 경종대왕 태실비가 서 있는데, 거북 모양의 받침돌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가 온전한 형태로 잘 갖추어져 있어 역사적 격조를 더한다.
다음 목적지인 도담삼봉으로 향하는 길에, 작사가 반야월 선생의 국민 애창곡 〈울고 넘는 박달재〉로 대중에게 친숙한 박달재 고개에 잠시 머물렀다.
박달재는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면 원박리와 백운면 평동리 경계에 걸쳐 있는 해발 500m의 고개다. 옛 문헌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문헌과 지도에는 박달산(朴達山), 박달치(朴達峙), 박달령(朴達嶺) 등으로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여지도서』에는 “현의 서쪽 35리에 있다. 주유산의 남쪽 줄기이며, 고려 시대에 김취려 장군이 거란군을 물리치고 험준한 요새를 구축해 막았던 역사적인 장소”라는 기록이 명시되어 있다.
‘박달’이라는 지명은 ‘밝은 산’을 뜻하는 우리말 ‘밝달’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유래한 이두식 지명으로 풀이된다. 이 고개에는 애틋한 박달 도령과 금봉 낭자의 전설이 살아 숨 쉰다.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던 경상도 선비 박달이 고갯마루 아래 농가에서 만난 금봉이와 사랑에 빠졌으나, 과거에 낙방한 부끄러움에 돌아오지 못하는 사이 금봉이는 상사병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뒤늦게 돌아와 이 사실을 안 박달 역시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생을 마감했다는 슬픈 이야기다. 오늘날 제천시는 이 박달 도령과 금봉 낭자를 시의 공식 캐릭터로 지정해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 ▲2012년 3월 30일 반야월 선생 장례 행렬이 '울고 넘는 박달재'에 잠시 머물었다.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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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갯마루에 오르니 사방에서 애달픈 〈울고 넘는 박달재〉 멜로디가 흘러나와 감흥을 자아냈다.
울고 넘는 박달재 / 박재홍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넘는 우리임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울었오 소리쳤오 이 가슴이 터지도록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는 임아
둘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가소
도토리 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울고 넘는 박달재〉는 대한민국 건국 직후인 1948년 박재홍이 부른 트로트 곡이다. 반야월 작사, 김교성 작곡의 곡으로, 발표했을 때부터 인기를 끌며 박재홍은 대스타가 되었고 노래에 담긴 서민적인 정서가 공감을 얻어 이후로도 오랫동안 애창되고 있다. 반야월이 악극단 지방순회 공연 중 충주에서 제천으로 가는 길에 농부 내외인 듯한 남녀의 이별 장면을 목격하고 즉석에서 노랫말을 썼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향후 제천시가 추진 중인 ‘한국 가요 100년사 기념관’이 완공되면 반야월 선생의 유골이 이곳 박달재 정상에 안치될 예정인데, 선생의 고향인 마산(현 창원시)에서는 수목장을 고향으로 모셔야 한다고 요구하는 등 여전히 뜨거운 관심이 이어지고 있다.
박달재를 뒤로하고 마침내 단양의 명소 도담삼봉에 닿았다. 남한강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세 개의 기암괴석인 도담삼봉은 단양 팔경 중에서도 제1경으로 손꼽히는 비경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강 한가운데 세 바위가 솟아 있고, 주변 돌 틈에서 고고하게 자란 측백나무와 마치 문(門)처럼 뚫려 있는 석문(石門)의 아름다움이 한 폭의 동천(洞天, 신선이 사는 곳)과 같다고 극찬해 놓았다.
강가를 기준으로 상류 쪽인 왼쪽 봉우리를 ‘첩봉(딸봉)’, 하류 쪽인 오른쪽 봉우리를 ‘처봉(아들봉)’이라 부르며, 한가운데 가장 높이 솟은 중봉을 ‘남편봉(아버지봉)’이라 부른다. 흥미롭게도 중봉의 웅장한 허리에는 ‘삼도정’이라는 아담한 육각 정자가 세워져 있어 한층 더 고풍스러운 멋을 풍긴다.
조선의 설계자이자 개국공신인 삼봉 정도전(鄭道傳)은 이 호방한 풍광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자신의 아호를 이 도담삼봉에서 따와 ‘삼봉(三峰)’이라 지을 만큼 이곳을 극진히 사랑했다. 이와 관련해 소년 정도전의 비범함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당시 도담삼봉은 원래 강원도 정선군의 삼봉산이 홍수 때 떠내려온 것이라 하여, 정선군이 단양군에 부당한 세금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에 어린 정도전이 “우리가 삼봉을 정선에서 떠내려오라고 한 것도 아니요, 오히려 물길을 막아 수해를 입고 있으니 그리 아깝거든 당장 도로 가져가시오”라고 당차게 반박한 이후부터 세금을 내지 않게 되었다는 통쾌한 전설이다.
정도전(1342~1398)은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대격변기에 이성계를 도와 새로운 왕조를 설계한 혁명가였다. 하지만 그가 꿈꾸었던 ‘신권(臣權) 중심의 성리학적 이상 국가’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정적이었던 이방원의 칼날에 피살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이후 오랫동안 역적의 누명을 쓰고 묻혀 있다가, 고종 대에 이르러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한양 도성과 궁궐을 최초로 설계한 정도전의 공을 인정하여 비로소 관작과 명예가 완전히 복원되었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2년(1865년) 9월 10일 자 기록을 보면, 대왕대비(신정왕후)가 전교를 내려 정도전의 천년 문장과 건국 공로를 치하하며 특별히 훈봉을 회복시키고 시호를 추증하도록 명한 기록이 생생히 남아 있다.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 권근 등과 학문을 토론하며 성장한 정도전은 한때 부모상을 당해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 단양과 영주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정몽주가 보내준 『맹자』를 하루에 단 한 장, 혹은 반 장씩 깊이 씹어 읽으며 주자학 이념에 기반한 혁명의 칼날을 갈았다. 우왕 시절 친원파와의 대립으로 유배 생활을 겪는 동안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는 고전 명작인 『불씨잡변』 등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해 줄 영웅으로 이성계를 선택했고, 위화도 회군 이후 마침내 새 왕조의 기틀을 닦았다. 한양 천도를 주도하고 국가의 대헌장인 『조선경국대전』을 저술하여 조선의 문물제도를 완성한 이가 바로 그다. 급진적인 사상과 타협 없는 성정 탓에 수많은 유배와 투옥을 반복하면서도 시대의 과제를 정면으로 돌파했던 인물, 삼봉 정도전. 단양읍 상진리 근린공원에는 오늘날에도 그의 드높은 뜻을 기리는 ‘삼봉정도전선생숭덕비’가 웅장하게 서 있어 답사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도전의 복원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高宗 2卷, 2年(1865 乙丑 / 청 동치(同治) 4年) 9月 10日(壬申) 3번째기사
대왕대비가 정도전에게 공로를 회복시켜주고 시호를 추증하라고 명하다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법궁(法宮)의 전각(殿閣)들이 차례로 완성되었다. 정도전(鄭道傳)이 전각의 이름을 정하고 송축한 문구를 생각해보니 천 년의 뛰어난 문장으로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무학 국사(無學國師)가 그 당시 수고를 한 사실에 대해서는 국사(國史)나 야승(野乘)에 자주 보이는데, 나의 성의를 표시하고 싶어도 할 곳이 없다. 봉화백(奉化伯) 정도전에게는 특별히 훈봉(勳封)을 회복시키고 시호(諡號)를 내리도록 하라. 그리고 해조로 하여금 봉사손(奉祀孫)의 이름을 물어서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으로 의망하여 들이도록 하라.”하였다.
정도전은 자신을 한 그루 소나무에 비유하며 이성계에게 개국에 참여 의사를 비쳤다는 시가 한 수 전해온다.‘창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청산에 자라서 몇 만 겹인가? 다른 해가 있다면 서로 만날 수 있을까? 인간사는 곳이면 어디든 따르리(蒼茫歲月一株松 生長靑山幾萬重 存在他年相見否 人間府伊使陳從
다음 행선지인 온달산성으로 향했다. 온달과 평강공주의 이야기를 삼국사기에 실린 대로 읽는 재미는 남달랐다. 온달전의 전문을 옮겼다.
三國史記 卷第四十五 列傳 第五 온달(溫達)전에 의하면
온달 (溫達 은 고구려 평강왕 (平岡王:평원왕) 때의 사람이다. 용모가 못 생겨서 우스울 정도였지만, 마음속은 환하고 똑똑했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항상 음식을 구걸해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해진 신발을 신은 채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왔다 갔다 하였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보고 ‘바보 온달 (愚溫達)’이라고 하였다. 평강왕 의 어린 딸은 잘 울었다. 왕이 놀리며,“너는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는구나. 어른이 되면 사대부(士大夫)의 아내가 되기는 어렵겠다. 마땅히 ‘바보 온달 ’에게 시집가야겠구나.”라고 하였다. 왕은 늘 이처럼 말하였다. 왕의 딸이 16세가 되자, [왕은 그녀를] 상부(上部) 고씨(高氏)에게 시집보내려고 하였다. 공주(公主)가 대답하였다.
“대왕(大王)께서는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온달 의 아내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어찌 그 말씀을 고치려 하십니까? 평범한 사내도 말을 반복하지 않는데, 하물며 임금께서는 어떻겠습니까! 그러므로 ‘임금은 실없는 말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대왕의 명령은 잘못되었습니다. 저는 감히 명령을 받들 수 없습니다.” 왕이 화를 내며, “네가 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고 한다면, 진실로 나의 딸일 수 없다. 어찌 같이 살 수 있겠는가! 마땅히 네 갈 곳으로 가거라.”고 하였다. 이에 공주(公主)는 값비싼 팔찌 수십 개를 팔꿈치에 걸고서 궁을 나와 홀로 갔다.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나 온달 의 집을 물었다. 이에 온달 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온달의] 장님인 늙은 어머니를 보고, 가까이 다가가 절을 하고, 그 아들이 있는 곳을 물었다. 노모가 대답하였다.
“내 아들은 가난하고 또한 누추합니다. 귀한 분께서 가까이 할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지금 당신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로운 것이 범상하지가 않고, 그대의 손을 만져보니 부드러운 것이 마치 솜과 같습니다. 반드시 천하(天下)의 귀한 분이실 겁니다. 누구의 속임수에 빠져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아마도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산 속으로 느릅나무 껍질 을 가지러 간 듯한데,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공주(公主)는 집에서 나와서 산 아래로 갔다. 느릅나무 껍질을 메고 오고 있는 온달 을 보고, 공주(公主)는 그에게 [자신이] 품은 생각을 이야기하였다.
온달은 얼굴빛을 바꾸며,
“이는 어린 여자가 마땅히 할 행동이 아니니, 분명히 사람이 아니고 여우귀신일 것이다. 나에게 다가오지 마라!”고 말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갔다. 공주는 홀로 돌아와 사립문 아래에서 묵었다. 아침이 밝자,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 온달 과 그 어머니에게 자세히 말하였다. 온달 이 우물쭈물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그 어머니가 말하였다.
“제 자식은 매우 누추해서 귀하신 분의 배우자가 되기에 부족하고, 저희 집은 지극히 가난하여 진실로 귀하신 분이 계실 곳이 되지 못합니다.” 공주가 대답하였다.
“옛 사람들의 말에 ‘한 말의 곡식이라도 찧을 수 있고, 한 척의 베라도 꿰맬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마음을 같이 할 수 있다면, 어찌 반드시 부귀해진 다음에야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값비싼 팔찌를 팔고 농지와 집, 노비 및 소와 말 그리고 그릇붙이를 구입하여 살림살이에 필요한 물품을 모두 갖추었다. 처음 말을 살 적에 공주(公主)가 온달에게 “시장 사람들의 말을 사지 말고, 반드시 국마(國馬) 중에서 병들고 쇠약해 내놓은 말을 골라서 사 오세요.”라고 하였다. 온달 은 그 말대로 하였다. 공주가 매우 열심히 기르니 말은 날마다 살찌고 건장해졌다. 고구려에서는 매년 봄 3월 3일 [註 001] 마다 낙랑 (樂浪)의 언덕에 모여 사냥하였는데, 잡은 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山川)에 제사를 지냈다.
그날이 되자, 왕이 사냥을 나갔고, 여러 신료와 5부(五部)의 병사가 모두 왕을 따랐다. 이때 온달 도 그동안 기른 말을 가지고 따라갔다.
온달은 말을 타고 달리는 데 항상 앞에 있었고, 사냥으로 잡은 동물 또한 많아서 [참석자 중] 비견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왕이 불러와 성명(姓名)을 묻고는 놀랐고, 또한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이때 후주 (後周) 무제 (武帝) 가 군사를 내어 고구려 (遼東) 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이산 (肄山)의 벌판에서 맞아 싸웠다. 온달은 선봉(先鋒)이 되었는데 힘을 다해 싸워서 참수(斬首)한 것이 수십 급(級)이었다. 여러 군사들이 이긴 틈을 타서 맹렬히 공격해서 크게 이겼다. 전공을 평가하게 되자, 온달 을 첫 번째로 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왕이 기뻐하며
“이 사람이 내 사위다!”고 말하고, 예의를 갖추어 온달 을 맞이하였으며, 관작(官爵)을 주어 대형(大兄) 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온달은 왕의 총애를 받아 부귀영화가 날로 더해갔고, 위엄과 권세가 매일처럼 높아졌다. 양강왕 (陽岡王:영양왕)이 즉위하자, 온달 (溫達)이 왕께 아뢰었다.
“생각컨대 신라가 우리 한북(漢北)의 지역을 빼앗아 군현(郡縣)으로 삼으니, [註 002] 백성은 몹시 가슴아파하며, 지금껏 부모의 나라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저를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고 군대를 주신다면, 한 번 가서 반드시 우리의 땅을 되찾아 오겠습니다.” 왕이 허락하였다. 온달은 출정하기에 앞서 맹세하기를
“계립현 (鷄立峴)· 죽령 (竹嶺)의 서쪽 지역을 되찾아오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였다. 드디어 가서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웠는데, 온달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쓰려져 죽었다.온달을 장사 지내고자 하였지만, 관(柩)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관(棺)을 어루만지며“죽음과 삶이 결정되었습니다. 돌아가시지요!”라고 하자, 드디어 [관을] 들어 묻을 수 있었다. 대왕이 이를 듣고 비통해 하였다.
《삼국사기》에 실린 온달전을 읽으면서 새로움이 느껴졌다. 바보스러워 보이지만 마음속은 환하고 똑똑했던 온달, 그리고 공주를 처음 보고는 "어린 여자가 할 일이 아니다"라며 단호하게 돌아섰던 온달의 모습이 떠올랐다. 또한 아들보다 과분한 여인이 며느리로 들어오는 것을 보며 두려워하는 온달의 어머니, 농담으로 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 바보 온달에게 딸을 시집보낸 평원왕, 아버지의 놀림을 그대로 믿고 바보 온달에게 시집가서 자신의 의지로 그를 장군으로 새롭게 탄생시킨 평강공주의 서사도 흥미로웠다. 온달이 장군이 되어 장렬히 전사했으나, 그의 어머니는 장군보다 그저 '바보 온달'로 오손도손 살기를 원하지 않았을까 하는 등 많은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사적 제264호로 1979년에 지정된 온달산성은 성의 둘레 683m, 동쪽 높이 6m, 남북쪽 높이 7~8m, 서쪽 높이 10m, 성의 두께 3~4m에 이르는 석성이다. 영춘면을 휘돌아 흐르는 남한강 남안의 산에 길이 70cm, 너비 40cm, 두께 5cm 크기의 얄팍한 돌로 축성한 성으로, 약 100m 정도가 붕괴된 것 외에는 대체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동·남·북 3문(門)과 수구(水口)가 지금도 남아 있으며, 성내에는 우물이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매몰되어 물이 조금 나올 정도다. 성 내부 곳곳에서는 삼국시대 및 고려 시대의 토기 조각들을 찾아볼 수 있다.
온달산성에서 내려오는 길에 무지개를 만났다. 온달산성에서 쏟아진 소낙비는 마음속 근심들까지 모두 깨끗이 씻어내 주는 듯했다. 여행의 즐거움은 이렇게 예견되지 않은 대자연과의 뜻밖의 만남이 아닐까 싶었다.
| ▲ 충북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리의 계곡에 입수하다 ©하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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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산성에서 만난 소낙비 덕분에 일행의 옷이 모두 젖어 곧장 숙소로 이동했다. 충북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리의 계곡물은 맑고 시원했다. 옷이 젖은 김에 일행들은 계곡물에 시원하게 입수했다. 도반들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청량한 계곡을 잠시 뒤흔들었다. 소백산 자락의 밤하늘은 별이 총총하게 박혀 있었고, 살랑이는 바람은 무척이나 청량했다.
2013년 7월 30일 새벽 5시, 일찍 일어난 일행과 함께 소백산 연화봉에 위치한 천태종의 총본산 사찰 구인사로 향했다. 구인사에 들어서면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선 듯한 묘한 느낌이 든다. 중국의 대형 사찰에 온 듯 단층이 아닌 3~4층 규모의 웅장한 전각들이 늘어선 모습이 일반 사찰과는 사뭇 달랐다. 이른 새벽임에도 사찰 안은 생동감과 활기로 가득 차 있었으며, 특히 규모가 큰 구인사 도서관이 인상 깊었다.
천태종은 고려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중국에서 들여온 선(禪)과 교(敎)를 종합한 종파다. 구인사는 현대에 이르러 상월원각 대조사에 의해 중창되었으며, 사찰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대조사전에 그의 존영이 모셔져 있다.
| ▲ 숙소인 자연의 집의 자연식 아침식사 ©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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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심 넉넉한 ‘자연의 집’ 여주인은 일행을 위해 토종닭으로 정성껏 백숙을 고아주었다. 아침 식사는 이곳으로 우리를 안내해 준 일행과 주인이 직접 텃밭과 소백산에서 채취한 산나물과 야채들로 차려내어 신선하고 담백했다. 일행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 다음 여정에도 꼭 다시 머물고 싶은 따뜻한 숙소였다.
다음으로 백두대간 마구령으로 향했다. 마구령은 부석사 인근 임곡리에서 남대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충북 단양군 영춘면과 강원 영월군 김삿갓면의 경계를 마주하고 있다. 옛날 장사꾼들이 말을 몰고 다녔던 고개라 하여 마구령(馬驅嶺)이라 부르며, 경사가 워낙 심해 논을 매는 것처럼 힘들다 하여 ‘매기재’라고도 불린다. 그 이름에 걸맞게 고갯길은 무척 험했다. 길은 겨우 차 한 대가 지나갈 만큼 좁고 발밑으로는 깎아지른 벼랑이 아슬아슬하게 이어졌다. 돌고 도는 굽이마다 푸른 하늘이 맞닿아 있고, 돌아서면 좌우가 온통 벼랑이었다. 한 고비를 넘으면 하늘에 성큼 다가서고, 한 굽이를 돌면 하늘 끝에 닿는 듯해 마구령은 마치 ‘하늘로 오르는 고개’처럼 느껴졌다.
험난한 고개를 넘어 하늘에서 내려가는 풍경은 오르는 길보다 훨씬 수려했다. 남대리에 내려서면 옛 주막거리를 알리는 커다란 표지석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마구령을 넘어 다니던 행상과 선비들이 쉬어가던 주막이 과거에 꽤 번창했음을 넌지시 알려주는 지명이다. 산 너머 마을에 장이 서는 날이면 단양과 영월 사람들이 나무와 약초 등을 지게에 지고 이 주막거리를 지나 고치령을 넘어 순흥장과 단산장을, 혹은 마구령을 넘어 부석장을 부지런히 오갔을 것이다.
이곳 남대리는 영주 순흥면에 유배 와 있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 운동’을 주도할 때 비밀리에 병사를 양성하던 곳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단종이 영월로 가는 길에 잠시 머물렀다는 빗적거리에는 단종 쉼터와 단종대왕비가 조성되어 있다. 단종 쉼터는 방 안에서 말하는 소리가 밖으로 새 나가지 않는 지형이라 하여 ‘생방터’로도 불리며, 단종의 수하와 금성대군 사이에 밀지가 은밀하게 오간 역사적 장소라는 말이 전해 내려온다.
이어서 영주 부석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부석사는 의상대사(625~702)가 신라 문무왕의 명을 받아 창건한 절이다. 그러나 창건 당시의 건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현재의 건물들은 대부분 고려 시대 이후에 중건되거나 복원된 것이다. 부석사(浮石寺)라는 이름에는 애틋한 전설이 전해온다.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하던 시절, 한 당나라 관리의 딸(선묘 낭자)이 그를 깊이 연모하게 되었다. 그녀는 의상에게 당나라가 곧 신라를 침공할 것이라는 극비 정보를 경고했고, 의상은 이를 고국에 알리기 위해 급히 귀국길에 올랐다. 선묘 낭자는 의상을 따라가기 위해 선착장으로 달려갔으나 배는 이미 떠난 후였다. 이에 그녀는 바다에 몸을 던졌고, 그 정성에 감명한 하늘은 그녀를 거대한 용으로 태어나게 했다. 이후 용이 된 선묘는 당나라의 해상 침략을 막아내고 의상대사가 무사히 이 절을 지을 수 있도록 수호신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전통 사찰 마당에서 진지하게 사진을 찍고 계시는 수녀님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종교의 경계를 넘어 서로의 문화에 경의를 표하는 듯한 수녀님들의 다정한 모습을 보니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현재의 부석사는 가파른 산비탈의 지형을 그대로 살려 골짜기 전체에 장엄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중 조사당(祖師堂)은 화엄종의 위대한 선사로 추앙받는 창건주 의상대사를 기리기 위해 지어진 전각이다. 1377년에 창건되어 1490년에 재건된 조사당은 고려 시대에 지어져 지금까지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소중한 목조 건물 중 하나다.
그러나 부석사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단연 무량수전(無量壽殿)이다. 무량수전에는 ‘무한한 수명을 누리는 부처님(아미타여래)을 모신 전각’이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기록에 의하면 현재의 우아한 목조 건물 역시 1377년에 중수된 것이지만, 전체적인 비례의 조화나 구조의 마감 등은 그 이전의 고전적인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화강암 기단 위에 장방형 다주식 전각을 올리고, 옆면에 박공이 있는 팔작지붕에는 기와를 정갈하게 덮었다. 기둥의 가운데가 볼록한 배흘림기둥 위로는 처마를 받치는 역피라미드 모양의 섬세한 주심포 공포를 얹었으며, 남쪽으로는 격자 창살의 창을 내어 세련미를 더했다. 무량수전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목조 건축물 중 하나로, 우리 선조들의 탁월한 목공 기술과 미학을 엿볼 수 있는 최고의 건축 문화재이다.
무량수전 안으로 들어서니, 국보 제45호로 지정된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이 동쪽을 향해 앉아 인자하면서도 근엄한 눈빛으로 참례객들을 내려다보고 계셨다.
조선 초기 목공예 기술의 진수를 간직한 성혈사(聖穴事) 나한전으로 이동했다.
신라 시대 의상대사가 소백산 기슭에 초암사를 지을 때의 일화가 전해진다. 매일 서까래가 조금씩 없어지는 이상한 일이 발생하자, 스님이 서까래를 찾아 인근 숲을 샅샅이 돌아다니다가 어느 바위 굴 앞에 나무가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스님은 서까래가 쌓여 있던 주변의 풀을 주워 모아 그 자리에 작은 초막을 지었는데, 그 초막이 바로 성혈사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스님이 초암사를 짓고 수행을 하다가 공간이 협소한 탓에 이 절을 새로 창건했다고도 전한다. 절 아래 약 300m 떨어진 곳에는 성인이 나왔다는 영험한 굴이 있어, 그 뜻 그대로 절 이름을 ‘성혈사’라 부르게 되었다.
성혈사는 신라 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전해진다. 지형의 흐름에 따라 건물을 자연스럽게 배치한 성혈사 나한전은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을 모신 신성한 곳이다. 그동안 임진왜란(1592) 이후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해 왔으나, 1984년 건물을 수리할 때 발견된 상량문 기록에 따르면 조선 명종 8년(1553)에 처음 지어졌고 인조 12년(1634)에 다시 지어졌음이 명확히 밝혀졌다. 건물의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1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을 한 깔끔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짜인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촘촘히 배치된 다포 양식으로 꾸며졌다. 특히 앞문 창살에 정교한 문양을 새겨 장식했는데, 가운데 칸 문짝에 투각된 물고기, 게, 동자상, 연꽃, 새 등의 문양은 조선 전기 소목 공예 기술의 극치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 ▲ 성혈사에서 주지 스님에게 차를 공양 받다 ©최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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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혈사 주지 스님이 따뜻한 차를 대접해 주시며 온화한 미소와 함께 질문을 던지셨다. "나한전 창살 문양에서 용이 쥐고 있는 여의주를 혹시 보셨습니까?" 일행들은 직접 찍은 사진들을 확대해 가며 유심히 살펴보았고, 날카로운 용의 발톱 앞에 정교하게 새겨진 작은 여의주를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 먼 길을 찾아온 여행자들에게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다상의 자리를 흔쾌히 펼쳐주신 주지 스님의 넉넉한 마음에 깊은 감사를 드렸다.
녹음이 우거진 여름날의 성혈사도 싱그럽지만, 스님의 말씀대로 이곳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은 가을인 10월이다. 예전에 가을철에 방문했을 때, 성혈사로 들어오는 길목마다 영주의 명물인 사과들이 붉게 익어가며 향긋한 사과 향으로 먼저 마중을 나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번 여정의 마지막으로 조선 유학 사상의 중심 보금자리인 소수서원을 찾았다.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의 유현(儒賢) 안향(安珦)의 사묘(祠廟)를 세우고 1543년(중종 38)에 학사(學舍)를 이건(移建)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이 서원의 시초이다. 그후 1544년 여기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1633년(인조 11)에는 주세붕을 추배(追配)하였다. 1550년(명종 5) 이황(李滉)이 풍기군수로 부임해 와서 조정에 상주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사액(賜額)과 《사서오경(四書五經)》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내사(內賜)를 받게 되어 최초의 사액서원이자 공인된 사학(私學)이 되었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철폐를 면한 47서원 가운데 하나로 지금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서원의 건물로는 명종의 친필로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편액(扁額)이 걸린 강당, 그 뒤에는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 동북쪽에는 학구재(學求齋), 동쪽에는 지락재(至樂齋)가 있다. 또한 서쪽에는 서고(書庫)와 고려 말에 그려진 안향의 영정(影幀:국보 111)과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보물 485)가 안치된 문성공묘(文成公廟)가 있다.
1박 2일의 모든 일정을 마쳤다. 돌아오는 길, 소백산 기행의 소감을 물었다.
서경옥 (시흥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은“새로운 추억과 함께 옛 인연의 향수를 즐길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김영자 (문화해설사)는 “온달산성에서 소낙비는 마음속까지 시원하게 하는 청량제 같았다. 함께한 벗님들과 물속에 풍덩 빠졌던 추억이 오래 갈 것 같다. 다음 기행이 기다려집니다.”
박종남 (자유기고가)는 “일상탈출, 자연이 주는 편안함과 역사유적지에서 느끼는 조상의 숨결이 새로운 에너지원이 되었습니다.”
문희섭 (경희고려한의원 원장)은 “월악산 모임을 마치고 소백산 계곡으로 찾아든 늦은 밤 열화와 같은 맹자 도반들의 환영에 감동했습니다. 그리고 밤하늘을 수많은 별과 은하수 불꽃놀이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소산서원, 부석사 성혈사 문화기행 무더운 여름 아랑곳없이 도반님들의 가슴이 더 뜨거웠음을 느꼈습니다.”
이상애 (소래고도서관 사서)는 “지난해 지리산 기행에서 재미와 공부 그리고 신나는 추억이 많아서 이번 기행은 그런 재미가 없으면 어쩌나 했었는데... 선생님이 준비를 많이 해선지 하늘이 도와선지 행복한 기행으로 기억될 거 같다. 개인적으로 정도전에 대해 알아야 할 것 같아 소설 정도전을 보면서 고려 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간언하신 이존오 조상님을 다시 생각하는 시간이 되어서 의미 있었고 기행을 즐기는 학우들을 보면서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조미경 (학우)는 “처음 가는 설레임과 걱정으로 고민했던 부분이 참 소인이다 싶을 정도로 즐거움이었습니다. 역사 기행이 주는 배움과 즐거움 속에서 피로감은 찾을 수 없었고 남는 자산을 쌓아온 듯합니다. 소수서원 문화해설을 들으면서 역사의 재미를 한층 더 상승 되었고 정도전의 새로운 사실과 이야기를 따라 기행하며 나누는 맛 또한 즐거움이었습니다. 성혈사 오름과 마구령의 지남 또한 모르고 지나는 시간 속에 알찬 소득이었습니다. 역사이야기와 멋진 여행 함께해 뿌듯함과 함께 감사를 드립니다.”
심우일 (맹자학당 훈장)은 “조선의 정신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12명의 맹자학당 벗들과 함께한 1박 2일의 역사기행은 온달산성에서 만났던 시원한 소낙비가 지나간 후 만난 무지개처럼 먼 훗날 이 날들을 떠올리면 빙긋 미소가 떠올려질 그런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