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우리가 그날 그 자리에 있었다면…

3·1 만세운동 100주년

박종남(문화관광해설사) | 기사입력 2020/03/02 [23:07]

100년 전 우리가 그날 그 자리에 있었다면…

3·1 만세운동 100주년

박종남(문화관광해설사) | 입력 : 2020/03/02 [23:07]

 

▲ 시흥의 함성 100주년  © 시흥문화원 제공

 

2019년은 임시정부 수립과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으로부터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의미 있고 뜻 깊은 해를 맞아 시흥문화원에서는 시흥지역의 3·1운동과 독립지사이야기를 담은 시흥의 함성 100(부제_시흥지역의 3·1운동과 독립지사 이야기)’을 발간했다.

책에는 191931일을 기점으로 민족독립을 위해 분연히 일어났던 시흥지역 민중의 만세운동과 일제의 위협과 탄압에 굴하지 않고 만세시위로 맞섰던 독립지사 5인의 활동을 담았다.

수록된 내용 중 잊어서는 안 되는 독립지사들의 업적과 잊지 않도록 새겨야 할 그들의 행적을 따라가 보자.

 

▲ 3.1절 기념식     ©시흥문화원 제공

 

시흥시 지역의 3·1운동(소래면, 수암면, 군자면)

시흥시 지역의 3·1운동은 3월 말부터 4월 초에 집중되었다. 소래면 만세운동은 324일자 기록에 등장한다. “324일 부천군 계남면 소사리 부근 6개 마을에서 산 위에 화톳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심곡리에 있는 소사경찰주재소의 주재순사가 출동하여 해산시켰다. 이날 부천군 계남면과 소래면 등지에서 약 750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우시장으로 유명했던 뱀내장(사천장-현 신천동 문화의거리 일원)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31일 부천군 남동면 서창리 송윤중의 집에서 같은 마을 송성용이 구창조를 시켜 ‘41일 소래면 사천시장으로 주민을 모아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는 내용으로 남동면내 각 마을 구장 앞으로 보내는 통지서를 여러 장 작성하게 했다. 송서용은 김춘근, 윤영택, 박중일과 협의하여 통지서를 각 마을 구장에게 배부했다. 41일 사천장날에 80~300명가량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42일에는 사천장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한 80여 명의 주민들에게 발포를 했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군자면에서는 46일 장현리에 살던 스무 살의 권희 지사가 비밀통고(秘密通告)’라는 제목의 격문을 작성하여 각 동리마다 회람하도록 했고, 이 격문을 마을 주민들에게 돌려가며 볼 수 있도록 했던 장수산 지사의 용기 있는 행동이 있었다.

죽율리에 살던 김천복은 일제의 잔인한 총부리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주민을 모아 약속된 장소로 나가 만세운동에 가담했다.

수암면에서는 현 안산시 안산농협 수암지점 뒤편에 위치한 비석거리를 중심으로 마을 관공서를 돌며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앞장서서 군중을 이끌며 지휘를 했던 20대 청년이 바로 윤동욱 지사다.

능곡리에서 농업에 종사했던 윤병소 또한 스물일곱의 나이로 시위를 주동하며 윤동욱과 함께 만세운동을 펼쳤다.

 

독립지사 5인의 기념비 건립

시흥시는 일제의 탄압과 총부리 앞에서도 당당하게 독립만세를 외쳤던 애국지사들에 대한 연구와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자 기념비를 건립하고 있다.

20187월 김천복지사의 기념비를 필두로 20194월에는 윤동욱 지사, 20196월에는 장수산 지사의 기념비를 세웠다. 장현택지개발지구 조성이 완료되는 2020년에는 장현동 안두일에 살았던 권희 지사와 능곡동 출신의 윤병소 지사의 기념비를 생가 부근 공원에 건립할 예정이다.

 

▲ 독립지사김천복지사 기념비 제막식  © 시흥문화원 제공

 

두려움 떨치고 나아가 만세를 외쳤던 김천복

김천복은 죽율리에서 농사를 짓던 스물 셋 청년이었다. 191944일 군자면 죽율리 주민을 모아 거모리로 향하던 중 총소리에 군중이 흩어지자 남은 주민들을 모아, 면사무소와 주재소 부근에서 만세운동을 벌이던 군중에 합세해 독립만세를 외치다 주동자로 체포돼 징역 1년의 선고를 받은 인물이다.

가족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후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한 차례 더 옥고를 치르고 고향에 돌아 왔으나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행방불명이 됐다고 한다.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로 모두가 물러날 때 앞으로 나아가 만세를 외쳤던 그의 기개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안타까움이 있었는데 마침내 2008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2018년 가장 먼저 생금어린이공원(죽율로 45-23)에 지사의 기념비가 건립됐다. 지사의 자녀들은 무덤조차 없는 부친이기에 기념비를 무덤인 냥 반기며 자주 찾고 있다.

 

▲ 독립지사 윤동욱 기념비  © 시흥문화원 제공

 

평화적 만세시위를 주도한 윤동욱

독립지사 윤동욱은 산현동 주민으로 1919330일에 능곡리 주민으로부터 비석거리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가 합세했다.

흥분한 군중이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불태우자고 외칠 때 독립을 하면 관공서는 국가의 재산이니 국가재산을 털끝만큼도 상하게 하지말자며 군중을 만류하여 평화시위를 이끈 인물이다. 또한 시위 도중에 조선인 순사에게 당신도 조선인이니 만세를 부르라고 했다는 일화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평화적 만세운동 뒤 주동자 색출에서 일경에 체포된 윤동욱은 징역 7개월을 선고 받았고 재심결과 태형 90대를 맞고 풀려났다.

참혹한 형벌로 여생을 고문 후유증으로 시달렸던 그는 1968년 타계했다. 이후 1996년 만세운동에 이바지한 공로가 인정되어 대통령표창이 수여됐다. 시흥문화원은 시흥의 인물 선양사업을 펼치면서 2009년 윤동욱을 시흥의 인물로 선정했다. 2011년 항일 애국지사 윤동욱 선생 기념비 건립에 이어 관내 독립지사 기념비 건립 계획에 따라 20193월 산현공원(목감남서로 15)에 또 하나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 독립지사 장수산  © 시흥문화원 제공

 

해방된 조국에서는 후학양성에 힘쓴 장수산

2019614일 장곡동 매꼴공원에서 열렸던 장수산(장순한) 지사의 기념비 제막식에는 지사의 두 딸을 비롯한 유족들과 덕수 장씨 종친회, 장곡동 주민과 시민들이 참석해 그가 품었던 정의로움과 참된 뜻 그리고 독립정신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장수산은 권희 지사가 작성한 ‘47일 태극기를 가지고 구 장터에 나가서 독립만세를 부르자라는 내용이 담긴 비밀통고를 돌려 인근 주민들의 독립의지를 한 곳으로 모으고자 했던 인물이다. 장곡리와 장현리는 물론 월곶리까지 격문을 전달하였던 그는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10개월의 옥고를 치러야했다. 해방 후 장곡국민학교 건립을 비롯한 후학 양성에 힘썼던 그는 1981년 작고했다. 고인의 공훈을 기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자유를 잃은 삶을 살다 간 권희

스무 살 청년 권희는 장현리 두일 사람이다. “일제의 학정에 대해 항거하기 위하여 47일 군자면 구 장터에서 독립만세시위를 하니 참가하라는 비밀통고를 작성하여 주민들에게 회람시키다가 적발되어 체포된 인물이다.

결국 47일 지금의 군자초등학교 부근의 석곡 산대장에서 벌이려던 만세운동은 비밀통고를 압수한 일본 경찰에 의해 사전 발각됐고 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체포된 권희 지사는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징역 1년형을 살았다.

고문의 후유증을 심하게 겪던 그는 설상가상 경찰의 감시대상이 되어 자유를 잃은 삶을 살다가 후손도 없이 5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나라사랑 정신이 후대 사람들에게 온전히 계승되기를 바라는 친족들의 마음이 하늘에 닿아 1986년 대통령표창에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그의 묘는 원래 장현동 안두일에 있었으나 2016년 문중의 뜻에 따라 국립현충원 충혼당으로 모셔졌다. 권희 지사의 기념비는 2020년 장현택지개발지구 내에 세워질 예정이다.

 

▲ 군자초등학교에 2015년 건립된 삼일독립운동 기념비. 시흥시는 매년 3월1일 이곳에서 기념행사를 갖는다.     ©시흥문화원 제공

 

굳건한 신념의 소유자 윤병소

비석거리에서 2천여 민중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외치다 붙잡혀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윤병소는 능곡리 출신이다. ‘330일 비립동(비석거리)에서 만세운동 시위가 있으니 그곳에 모이라는 소문을 들었던 차에 자신의 부친에게도 같은 격문이 전달되었음을 동생에게 전해 듣고 이튿날 현장으로 향했다. 스물일곱 살의 청년 윤병소는 앞장서 군중을 이끌고 학교, 주재소, 면사무소를 차례로 행진했으며 경찰의 사격 위협이 있자 군중들에게 자진 해산하도록 지휘했다.

이에 시위 주도자로 지목되어 검거되었고 10개월의 형을 받았다. 신문조서에 자신은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고 있는 자로서 그 독립을 얻기 위해 위의 운동을 했다고 답하며 굳건한 독립의지와 만세운동의 신념을 보여줬다. 하지만 결국 그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그의 공훈을 기려 1968년 대통령표창이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그의 기념비 또한 곧 세워질 예정이다.

 

  

 

이 글은 '시흥문화 2019 Vol.22'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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