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값이 그렇게 올라도 내 주변에 부동산으로 돈 번 사람 못봤어

대야동 사람들 구술생애사

민정례 | 기사입력 2019/07/09 [12:14]

땅값이 그렇게 올라도 내 주변에 부동산으로 돈 번 사람 못봤어

대야동 사람들 구술생애사

민정례 | 입력 : 2019/07/09 [12:14]

제정구 의원 대단했지. 시흥 발전을 위해 무척 노력한 사람이에요

제정구 의원이 아마 마포에서 철거당해서 왔지? 그쪽에서 살다가 철거 당해서 이리로 온거야. 나도 여러번 만나봤는데 인간성이 좋아. 서민적이고. 그날도 면장 와서 식사들 하고 그랬는데 바빠서 밥먹을 시간도 없다고. 만두 몇 개 싸달래서 만두만 몇 개 싸준 적 있어요. 사람이 서민적이고 좋드만. 

 

제정구 의원이 대단했지 그때. 시흥의 발전을 위해 무척 노력한 사람이에요. 사람이 욕심이 없어. 자기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람이 아니에요. 대중을 위해서 봉사하는 정신이 깊은 사람이야. 그때 사람들 집이라곤 하는데 지금은 아파트가 다 들어섯지만 집이 좀 그냥 이런 보통 단층집들을 짓고 살고 그랬는데. 집이 좀 빈약하다면 빈약했지. 고 다음에 빌라 식으로 아마 들어섰지.

 

제정구 의원이 돌아가기 전에 계수리 안골에다 집을 지었어요. 안골 뒤 산에다가 제정구 의원이 자택을 지어놓고 몇 년 안되서 돌아가셨어요. 거기 절도 있어요. 보금자리 살다가 그리 이사갔지. 김윤식 시장이 처음에 와서 계수리 우리 너머 동네인데 내 친구네 집에서 세들어서 살았다고. 이0식이라고 그 사람네 집 사랑채에서 김윤식 시장이 살았다고. 그때가 제정구 의원 살아있을 당시지. 80년대 중반쯤이었을걸.

 

땅값이 그렇게 올라도 내 주변에 부동산으로 돈 번 사람 못봤어

북시흥 옛날에는 지금 농협앞에 길이잖아요. 2차선 도로. 그것을 통해서 부천 넘어가는 길이 그거 하나 밖에 없어요. 그리고 수인선. 수원서 인천가는거 지금 문화의 거리 그게 수원서 인천가는 길이거든. 뒤로 크게 났지만. 그 문화의 거리 삼거리에서 인천 쪽으로 빠져가고 우측으로 가면 부천으로 가고.

 

문화의 거리가 중심 거리죠. 그 위에는 주택이 없었어요. 그 당시에. 다 농경지였지. 삼미시장은 당시 논이에요. 그게 인제 장마나 져야 모내는데 권해서. 물이 없어서. 그런 데에요. 거기 땅값도 되게 쌌죠. 우체국 주변 다 논밭. 높은 자리는 밭이고 깊은 자리는 논이고. 근데 그게 대야동은 다 보건소 좌측으로는 배밭이고 보건소 앞으로는 복숭아 밭이고. 과수원이 많았죠. 높은 자리는 과수원이었어요. 그때는 한참 읍이 되면서 구획정리를 했지. 그때 집터 구획정리한거 땅 산 사람들은 부자됐고, 그냥 농사짓고 가만히 있던 사람들은 아닌거고.

 

은행지구 대우3차, 대우4차, 대우1차 있는데 그게 전부 모래밭이었어. 고구마도 안되는 땅이었었는데. 수분이 없으니까. 고구마를 심어 놓으면 죽어요. 참 쌌지. 땅이. 그때 땅이 엄청 쌌어. 지금은 금싸라기 땅이 돼서. 지금은 평당 3천만원이라고 그러대. 아파트는 3억, 3억 5천.

 

내 주변에서는 부동산으로 돈 번 사람은 별로 못봤어.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투기해서 그 사람들이 돈을 벌었지. 본토 사람들은 팔아먹기 바빠서 그걸 몰랐어요. 돈을 못벌었어.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돈을 벌고. 부동산 가격 오를 때 아유 후회 많이 했죠. 여기 영남아파트가 우리 땅이에요. 구천 서른 여섯 평이라고 만 평에서 조금 빠져요. 

 

잔치하면 거지가 떼로 왔어. 거지잔치지.

63년도에 제대해서 68년도에 했구만. 결혼을. 내가 스물 아홉에 했으니까. 우리가 가난해가지고 장가를 생각도 못했어요. 그러다 우리 누이가 중매를 해가지고 결혼을 했지. 우리 누이가 아는 여자 통해가지고. 파주 여자랑 결혼했어요. 집으로 직접 가서 봤어요. 만나서 삼사개월 있다가 결혼. 거기가서 하고 여기서도 하고 두 번.

옛날에는 구식으로 했지. 우리 대만해도. 신부집에 가서 거기서 제를 지내고 집에서는 잔치만 했지. 잔치하면 거지가 10여 명이 왔지. 거지 잔치지 거지 잔치. 개울 밑에가 거지들이 차지하고 있었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가마니 같은 걸로 쳐놓면 그래도 통풍이 덜 되니까. 초가집들이 전부 나무 떼서 밥할 때니까 거지들이 자고 나면 “아 우리 며느리가 내 밥 한다”고그랬는데.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에 갈 곳이 시흥에 없어

걱정이 되는건 시흥에 화장장이 없어. 여기는 보통 인천으로 가는데 거기 사람들은 화장비가 10만원 정도인데 외지 사람들은 1백만원이야. 그게 죽어서도 자식들에게 부담이 될까봐 걱정돼. 요즘 화장터는 연기도 안나요. 유원지고 관광지야. 근데 그걸 왜 반대하냐고. 

 

화장터에서도 인천 사람은 오전에 하고 우리는 늦으면 밤 늦게까지 하잖어. 밤 6시까지 하는데. 다니기도 불편하고. 지금은 인제 매장을 일체 못하게 하니까. 애들한테 그랬어. 화장해서 우리형 밑에 묻으라고. 형님도 화장했어요. 

 

결혼식이나 돌잔치 그런 것들 삶의 중요한 순간을 기념할 수 있는 공간이 이 동네에서 자꾸 없어져. 동네 사람들도 외지로 나가고. 왜 자꾸 없어지는지 몰라요. 건물들이 구형이 돼서 그런지. 음식도 그렇고. 지금은 결혼식장이. 옛날에 5만원 들고가면 괜찮았는데 지금은 5만원 들고 가면 얼굴 들지 못한다고. 음식값이 5만원이 넘는데가 있으니. 시골에서 10만원 들고 가면 우리네는 부담간다고. 매주 있잖아. 예식장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신천감리교회에서 많이 하잖아. 사랑스런 교회에서도 많이 하고.

 

난 종교가 없고. 우리 아들 며느리 손녀딸 우리 할머니 동생들 다 성당에 다녔어. 내 막내동생 아들이 하난데 신부여, 신부. 자식이라곤 딸 하나 있고 아들 하나 있어. 그런데 신부를 만들었어. 그래서 내가 욕을 했다고. 아들 하나 있는걸 신부 만들면 나중에 너 죽으면 장사지내줄 사람 없는데 어떡할려고 그랬냐고. 그랬더니 “아휴 형님은. 자식이 신분데 뭘 그런걸 걱정하느냐”고. 신부 아버지가 돌아가면 교인들이 다 자식들이라는 거야.

 

*구술자 소개

이관영

39생. 북시흥농협 인근에 살면서 6.25를 겪었고, 군 제대 후 계수동 땅을 사서 포도농사와 목장을 운영했다. 새마을지도자로 활동하면서 고소득 마을지도자 22명에 선정되어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이 원고는 '대야동 구술생애사 잠깐만 살다가 이사가려고 했지'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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