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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15일, 시흥시 군자동 산70번지에 위치한 영응대군 묘역에서 300여 명의 후손이 모인 가운데 시제(묘제)가 엄숙하게 봉행되었다.
영응대군(1434~1467)은 조선 시대의 왕자로 자는 명지(明之), 호는 서곡(西谷), 이름은 염(琰)이다. 세종대왕의 여덟째 아들(적통 막내아들)로 세종 23년(1441)에 영흥대군, 세종 25년(1443)에 역양대군, 세종 29년(1447)에 영응대군으로 개봉되었다. 세조 12년(1467) 2월 2일 서울 견지방 자택에서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같은 해 3월 19일 양주 군장리에 예장(禮葬)을 치렀으며, 이후 연산군 4년(1498)에 신도비가 세워졌다.
그 뒤 광무 4년(1900) 9월 17일에 대군의 첫 번째 부인인 춘성부부인 해주 정씨와 두 번째 부인 대방부부인 여산 송씨의 묘를 현 위치로 천장(이장)하였다. 이어 1968년에는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에 있던 세 번째 부인 연안부부인 연안 김씨 및 아들 청풍군, 손자 화림정, 그리고 증손인 흥선부정과 흥정부수의 묘를 이곳으로 옮겨와 함께 봉안하였다.
묘역 입구에는 대군의 시호를 딴 재실 ‘경효재(敬孝齋, 1969년경 건립)’와 사당 ‘경효사(敬孝祠, 1997년 건립)’가 각각 위치해 있다. 영응대군 묘 및 신도비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8년 5월 31일 시흥시 향토유적 제9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영응대군의 탄생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세종실록》 64권(세종 16년 4월 15일 자 기사)에는 “왕자 영응대군 이염이 탄생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생전에 세종대왕은 “영응대군이 항상 내 곁에서 밥을 먹었는데, 이는 그 소중함이 음식 먹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막내아들을 몹시 아꼈다.
대군의 별세에 대해서는 《세조실록》 41권(세조 13년 2월 2일 자 기사)에 다음과 같이 그 생애와 성품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영응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이 졸(卒)하였다. 염은 세종(世宗)의 여덟째 아들로서, 겨우 말을 할 줄 알 적에 어린아이를 조각(雕刻)하여 만든 화촉(花燭)을 보고 놀라며 말하기를, ‘초[燭]가 타면 반드시 초에 조각한 어린아이에게 미치게 될 것이니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니, 세종이 이를 크게 기특하게 여기었다.
처음에 영흥대군(永興大君)에 봉하였다가 뒤에 영응대군으로 고쳤다. 세종이 매우 사랑하여 일찍이 염을 세조(世祖)에게 부탁하였으므로, 세조가 보살펴 주기를 여러 아우들보다 특별히 하였다. 염이 일찍이 병이 드니 세조가 매우 염려하여 무릇 병이 나을 수 있는 방도는 해보지 않은 것이 없었고, 중사(中使)의 왕래가 길에 끊이지 아니하였다. 염은 천자(天資)가 순후(醇厚)하고 글씨와 그림에 뛰어나며 음률(音律)에 밝았다.
세종이 일찍이 내탕고(內帑庫)의 진귀한 보물을 염에게 모두 주려고 하다가 이를 하지 못하고 훙(薨)하였으므로, 문종(文宗)이 즉위하고 얼마 있다가 내탕고의 보물을 내려주어 그 집으로 다 가져갔다. 이로써 어부(御府)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보화(寶貨)가 모두 염에게로 돌아가니, 그 재물(財物)이 누거만(累巨萬)이 되었다.
그러나 자못 검소(儉素)하고 절약(節約)하여 사치를 일삼지 아니하고, 입시(入侍)하여서도 겸공(謙恭)하고 근각(謹恪)하여 조금도 과실(過失)이 없었으므로 세조가 매우 중히 여기었다.
세종이 일찍이 송복원(宋復元)의 딸을 택하여 배필(配匹)로 삼았는데, 송씨(宋氏)가 병이 있어서 세종이 명하여 그를 버리게 하고 정충경(鄭忠敬)의 딸에게 다시 장가들게 하였다. 세종이 승하(昇遐)하자, 염이 송씨를 그리워하여 정씨를 내쫓고 송씨와 다시 합하여 살았다. 처음에 군부(君父)의 명령 때문에 송씨를 버렸고, 정씨는 또한 버릴 만한 죄(罪)가 없는데도 사랑과 미움으로 내쫓고 받아들였으므로 당시의 의론들이 이것을 단점으로 삼았다.
시호(諡號)를 경효(敬孝)라 하였으니, 밤낮으로 경계(警戒)한 것을 ‘경(敬)’이라 하고, 도덕(道德)을 지키고 어기지 아니하는 것을 ‘효(孝)’라 한다. 측실(側室)에 아들 하나가 있다.”라고 적었다.
시제가 진행되는 동안 영응대군기념사업회 이기창 회장이 일가친척들에게 인사의 말을 전했다. 이기창 회장은 “경향각지 원근에서 오신 여러 일가친척 분을 모시고 올해(을미년)에도 이렇게 성대하게 대군 할아버님의 묘제를 봉행하게 되어 정말 반갑고 고맙다. 저는 대군의 17대손 의춘부수파 기창(항렬은 '相'자)이다”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이 회장은 이어 “제가 회장이 되고 나서 대군 할아버님의 묘제를 봉행한 지 어느덧 다섯 해가 되었다. 지난 2012년 묘제 때 약속드린 바와 같이, 그동안 묘소 주변 치산 사업과 울타리 설치, 등산로 우회 작업을 마쳤고 대군 사당 내에 감실을 제작·설치하여 길제(吉祭)도 무사히 봉행했다. 앞으로는 주차장을 넓히고 진입로를 보수하여, 시흥시 향토유적 문화재다운 면모를 더욱 온전하게 갖추어 나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날 시제에는 충남 당진에서 온 국가무형문화재 종묘제례 이수자 이재극(1956년생) 씨도 참석했다. 영응대군의 19대손인 그는 사당 내 감실을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다.
“이것이 돌아가신 분들의 신주를 모시는 감실이다. 조상들을 바르게 모시기 위해 2014년에 새로 제작했다. 영응대군 할아버지는 부인이 세 분이셨기 때문에 네 분의 신주를 함께 모시고 있어 문이 4개다. 평소 신주를 내어 모실 때 어려움이 있어, 문이 한 번 더 넓게 열리도록 설계해 편리함을 더했다. 위패는 매년 2월 2일 기제사 때 이 문을 열고 정식으로 모신다”고 설명했다.
이재극 씨는 제례 절차에 숨은 전통 과학에 대해서도 덧붙였다. “전통문화 중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은 올바르게 지켜야 한다. 제단 앞에 놓인 이것은 땅을 상징하는 ‘모사(茅沙)’다. 신을 모시기 위해 강신주를 이 모사에 먼저 붓는데, 이때 사용하는 띠풀은 붉은색 실로 묶어 쓴다. 모사에 술을 조금씩 붓는 것은 지신(地神)에게 제사의 시작을 고하는 뜻이다. 이때 사용하는 모래는 일반 강모래가 아니라 산에서 나는 깨끗한 마사토를 쓴다. 강모래는 정형화되지 않은 여러 불순물이 섞일 수 있어, 가장 순수한 산마사를 고집해 온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하나하나의 절차에 전통과 현대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모습이 무척 귀하게 다가왔다.
한편, 장곡동에 거주하는 이영희 씨는 “친정 마을 이름이 ‘구준물’이다. 군자봉에 왔다가 마침 친정 종중 분들이 시제를 지내는 모습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달려왔다. 비록 출가외인이라 제사에 직접 동참하지는 못하지만 멀리서나마 조상님께 인사를 드릴 수 있어 뜻깊다”며 미소를 지었다.
정성으로 시제에 임하는 영응대군 후손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시대를 넘어 도도하게 흐르는 명문 왕손가 특유의 품위와 자긍심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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