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아들 영응대군 묘에서 시제를 지내다

최영숙의 발길 따라가는 풍경

최영숙 | 기사입력 2015/12/30 [04:18]

세종대왕 아들 영응대군 묘에서 시제를 지내다

최영숙의 발길 따라가는 풍경

최영숙 | 입력 : 2015/12/30 [04:18]

 

▲ 영응대군 묘 앞에서 시제를 지내다     ©최영숙

 

 20151115일 군자동 산70번지에 위치한 영응대군 묘에서는 300여명 후손들이 모셔 시제를 지냈다.

 

영응대군(1434~1467)은 조선시대의 왕자로 자는 명지, 호는 서곡, 이름은 염이다. 세종의 8남으로 세종 23(1441)에 영흥대군, 세종 25(1443)에 역양대군, 세종 29(1447)에 영응대군으로 개봉되었다. 세조 12(1467) 22일에 서울 견지방 자택에서 사망하여 이해 319일에 양주 군장리에 예장을 치른 후, 연산군 4(1498)에 신도비를 세웠다.

 

▲ 시제를 드리기 위해 영응대군 묘로 오르다     ©최영숙

 

그 뒤 광무 4(1900) 917일에 대군의 첫 부인 춘성부부인 해주 정씨와 둘째 부인 대방부부인 여산 송 씨의 묘를 현 위치로 천장한 후 1968년에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에 있던 셋째부인 연안부 부인 연안 김씨 및 아들 청풍군과 손 화림정, 그리고 증손 흥선부정, 흥정부수의 묘를 옮겨 봉안하였다.

 

▲ 영응대군 묘 앞에 차려진 음식     ©최영숙

 

묘 입구에는 대군의 시호 명을 취한 재실(경효재, 1969년경 건립)과 사당(경효사, 1997년 건립)이 각각 위치해 있다. 영응대군 묘 및 신도비는 1988531일 시흥시 향토유적 제9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영응대군 탄생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세종실록 64, 세종 16415일 임술 1번 째 기사 1434년 명 선덕(宣德) 9년 왕자 영응 대군 이염이 탄생하다.”고 적었다.

 

▲ 영응대군 묘에 음식을 올리다     © 최영숙

 

 세종대왕은 "영응대군(永膺大君)이 항상 내 곁에서 밥을 먹었는데, 이는 그 소중함이 음식 먹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고 했다.

 

▲ 영응대군 묘에서 시제를 지내다     ©시흥시민뉴스

 

 영응대군의 졸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세조실록 41, 세조 1322일 무술 1번째 기사 1467년 명 성화 졸하였다.

 

 

 

▲ 1997년에 건립된 경효사     ©최영숙

 

"영응 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이 졸()하였다. ()은 세종(世宗)의 여덟째 아들로서, 겨우 말을 할 줄 알 적에 어린아이를 조각(雕刻)하여 만든 화촉(花燭)을 보고 놀라며 말하기를,

 

"[]가 타면 반드시 초에 조각한어린아이에게 미치게 될 것이니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니, 세종(世宗)이 이를 크게 기특하게 여기었다. 처음에 영흥 대군(永興大君)에 봉하였다가 뒤에 영응 대군(永膺大君)으로 고쳤다. 세종이 매우 사랑하여 일찍이 염()을 세조(世祖)에게 부탁하였으므로, 세조가 보살펴 주기를 여러 아우들보다 특별히 하였다. 염이 일찍이 병이 드니, 세조가 매우 염려하여 무릇 병이 나을 수 있는 것은 해 보지 않은 것이 없었고, 중사(中使)044) 의 왕래(往來)가 길에 끊이지 아니하였다. 염은 천자(天資)가 순후(醇厚)하고, 글씨와 그림에 뛰어나며, 음률(音律)에 밝았다. 세종이 일찍이 내탕고(內帑庫)의 진귀한 보물을 염에게 모두 주려고 하다가 이를 하지 못하고 훙()하였으므로, 문종(文宗)이 즉위(卽位)하고 얼마 있다가 내탕고의 보물을 내려 주어 그 집으로 다 가져갔다. 이로써 어부(御府)의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보화(寶貨)가 모두 염에게로 돌아가니, 그 재물(財物)이 누거만(累巨萬)이 되었다.

 

▲ 시제를 지내는 영응대군 후손들     ©최영숙

 

 그러나 자못 검소(儉素)하고 절약(節約)하여 사치를 일삼지 아니하고, 입시(入侍)하여서도 겸공(謙恭)하고 근각(謹恪)하여 조금도 과실(過失)이 있지 아니하므로, 세조가 매우 중히 여기었다. 세종이 일찍이 송복원(宋復元)의 딸을 택하여 배필(配匹)로 삼았는데, 송씨(宋氏)가 병이 있어서 세종이 명하여 그를 버리게 하고 정충경(鄭忠敬)의 딸에게 다시 장가들게 하였다. 세종이 승하(昇遐)하자, 염이 송씨를 그리워하여 정씨를 내쫓고 송씨와다시 합하여 살았다. 처음에 군부(君父)의 명령 때문에 송씨를 버렸고, 정씨는 또한 버릴 만한 죄()가 없는데도 사랑과 미움으로 내쫓고 받아들였으므로 당시의 의논들이 이것을 단점으로 삼았다. 시호(諡號)를 경효(敬孝)라 하였으니, 밤낮으로 경계(警戒)한 것을 경()이라 하고, 도덕(道德)을 지키고 어기지 아니하는 것을 효()라 한다. 측실(側室)에 아들 하나가 있다.“고 적었다.

 

▲ 이기장 회장이 인사말을 하다     ©최영숙

 

 이기창 회장이 인사말을 했다. “경향각지 원근에서 오신 여러 일가친척 분을 모시고 금년(을미년)에도 이렇게 성대하게 대군할아버님 묘제(시제)를 봉행하게 되어 정말 반갑고 고맙습니다. 저는 대군의 17대손 의춘부수파 기창이라고 합니다. 항렬은 상자(相子)입니다.

 

▲ 영응대군 묘 시제를 지내고 다음 시제를 지낼 자손이 정성스럽게 음식을 차리고 있다.     ©최영숙

 

제가 회장이 되고나서 대군 할아버님의 묘제를 봉행하게 된 것이 다섯 해가 됐습니다. 제가 2012년 묘제 시에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대군묘소주변 치산 사업과, 울타리 설치, 등산로 우회, 대군사당 내 감실제작도 설치하여 길제도 봉행하였습니다. 앞으로 주차장도 넓히고 진입로도 보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향토유적 문화재다운 면모를 갖추어 나가야 될 것입니다.”고 했다.

 

 

충남 당진에서 온 인간문화재 종묘제례 이수자 이재극(56년생) 씨는 영응대군 19대손이다. 이것은 감실이다. 돌아가신 분들의 신주를 모시는 것이다. 조상들을 바르게 모시기 위해서 2014년에 만들었다. 영응대군 할아버지는 부인이 세 분이어서 네 분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문이 4개이다. 신주를 내 모실 때 어려운데 한 번 더 열리게 해서 쉽게 했다. 위폐는 22일 기제 때 모신다. 고 속에 신주가 들어있다."고 했다.

 

▲ 시제를 모두 지내고 산을 내려가다     ©최영숙

 

또한 전통문화는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은 지켜야 한다. 이것은 모사다. 모사는 땅을 의미한다. 술을 먼저 붓는다. 띠는 붉은 색으로 쓴다. 모사에 술을 조금씩 붓는 것은 지신에게 고하는 뜻이다. 일반모래가 아니고 마사를 쓴다. 강모래는 좋은 것 나쁜 것을 접해서 산에서 깨끗한 마사를 썼다.”고 설명했다. 하나하나 전통과 현대가 조화롭게 맞게 하는 것이 귀하게 여겨졌다.

 

장곡동에 사는 이영희 씨는 구준물이 친정이다. 군자봉에 왔다가 친정 집안 분들이 시제를 지내는 것을 보고 반가워서 보러왔다. 나는 출가외인이라 참석하지 않는다.”고 했다.

 

▲ 단체사진을 담다     ©최영숙

 

 

기제에 임하는 영응대군 후손들을 보면서 왕손들의 품위를 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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