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래염전 너 어디 갔니?

심우일 기자 | 기사입력 2007/06/24 [02:14]

소래염전 너 어디 갔니?

심우일 기자 | 입력 : 2007/06/24 [02:14]

2002년 1월27일 엄동설한이던 그 겨울에 난 수인협궤열차 흔적을 찾아 소래포구부터 안산 원곡동까지 걸어서 답사를 했다. 당시 철도는 모두 사라진 상태였지만 간혹 레일이 발견 될 때면 왜 이렇게 기뻤는지...배고픔도 잊었다. 추위도 잊었다. 하지만 그 때 잊고 싶지 않은 것이 있었다. 일제 수탈의 역사였다. 그것은 수인협궤열차와 소래염전이었다. 추억과 낭만의 꼬마열차와 소금창고가 나에겐 더 이상 아니었다. 내 곁에서 아니 우리 곁에서 역사의 거울로 계속 비쳐지는 소래염전이기를 바라지만 자꾸만 거울은 깨져만 가는 것 같다. 소래염전 너 어디 갔니?



 

▲ 월곶동에서 바라본 소래염전(중앙의 산은 소래산)     © 심우일



 

 

 

 

 

 

 

 

 

 




우리나라의 소금 역사 

소금은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으로 섭취해야 할 광물 자원의 하나로 옛날부터 이를 얻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 왔다. 소금의 산출지는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소금은 무역의 주요 품목이었다. 일상생활에서 소금은 곡식과 버금가는 가치를 지닐 정도로 커다란 위치를 점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소금에 관한 기록이 발견된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삼국시대 이전부터 해안가를 중심으로 하여 소금 생산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고려시대에는 도염원(都鹽院)을 설치하여 소금을 제조 및 판매를 국가가 관장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바다에 인접한 고을마다 염장(鹽場)을 설치하고 소금을 생산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과중한 염세 부과에 따라 조선 말엽에 이르러 쇠퇴의 길을 걷는다. 

소래염전 축조

우리나라에서 소금 생산은 고대에서 20세기 초까지는 전오법(煎熬法)을 사용하였다. 전오법이란 바닷물을 가마솥에 부어 불을 때서 끓여 소금을 생산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 방법은 막대한 연료(나무)와 인건비 때문에 판매가가 높았고 소량 생산이었다.

우리나라는 일제초기에 국내산 소금 부족으로 값싼 중국산 소금을 수입하여 충당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산 소금은 우리나라와 같은 전오법이 아니라 넓은 간사지에서 태양열을 이용하여 바닷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얻는 방식의 천일법(天日法)을 이용하여 소금을 생산하고 있었는데, 이 천일법은 재래의 전오법에 의한 소금 생산보다 대량으로 값싸게 공급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이에 우리나라에서도 1907년에 인천의 주안에 최초로 천일법의 시험용 [주안염전]을 축조하였다. 이후 광량만, 덕동, 남동, 귀성, 남시, 군자, 연백 등지에 연차적으로 천일 염전을 축조해갔다. [소래염전]도 마침내 이때 축조가 되었으니 일제시대인 1934년에 착공하여 1936년에 완성하게 된다. 소래염전은 천일염전으로 화력과 동력없이 태양열과 바람을 이용하여 해수를 증발 및 농축시켜 소금을 채취하였다.
 
소래염전이 축조된 지역은 천혜의 조건을 갖추었다. 자연조건으로 간사지가 발달되어 있고 경사도가 평탄하였으며, 기후 조건으로는 기온이 높고, 강수량이 적었다. 아울러 증발량 및 일조량이 많아 천일염의 최적지였던 것이었다. 

▲ 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염전인 주안염전(장서각 소장 자료)     © 심우일




 

 

 

 

 

 

 

 



소래염전 축조 관련 신문 기사 요약  
 1-(1934년 7월 4일 동아일보)

기상 및 토질이 적지에 356정보(1정보 3천평)의 소래염전 축조를 위한 기공식을 1934년 6월26일 하였다. 염전 공사는 간사(間社)에 청부를 맡겨서 하였다. 현재 공급이 부족하여 중국에서 소금을 수입하고 있는 상황으로 수입 부족분에 대한 소금 공급 확대는 물론 인부 사용으로 인한 실업구제의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다. 

 2-(1934년 10월 11일 동아일보)

소래염전 공사에 47만 여명의 노동자가 사역하고 있다. 조선총독부 전매국에서 중국산 호염 수입을 압도하기 위해 총공사비 60만원을 들여 공사기간 2년 반 예정으로 축조하고 있다. 

 3-(1934년 7월 11일 동아일보)

부천군 소래면에서 58만원으로 대염전을 기공하였다. 

 4 - (1934년 10월 12일 조선중앙일보)

바짝 마른 노동판에 일자리 또 하나 소래대염전 착공

소래염전 운영 

소래염전은 조선총독부 전매국 주안출장소 소래파출소(인천시 논현동 소재-현재 소래마을 풍림아파트 자리)소속의 염전으로 국가에서 운영을 담당하던 일종의 국영기업체라고 할 수 있다.
 
소래염전은 면적이 549정보(약170만평)였다. 염전 저수지의 바닥 높이가 증발지 최상단의 바닥 높이보다 낮아서 저수지로부터 물을 끌어 올려 증발지로 보내는 방식의 저지식 염전으로 인근의 군자염전(현재의 정왕동 시화공업단지 지역)의 고지식과는 달랐다.
 
염전은 4곳으로 크게 구별되었다. 첫째는 염전 저수지, 둘째는 제1증발지, 셋째는 제2증발지, 넷째는 결정지였다. 한 달에 1~2번 만조 때 바닷물을 염전 저수지로 끌어 들였다. 저수지로부터 결정지에 소금이 생산되기 까지 소요되는 총 일수는 일조량이 많은 5~6월은 7일, 가을은 10일 정도가 걸렸다. 증발되는 바닷물의 염도가 25도가 되면 소금꽃이 생기고 마침내 고무래로 걷어내어 소금을 생산했다.
 
소금이 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은 바닷물→염전 저수지→제1증발지→제2증발지→결정지→소금창고→포장 및 운송이라고 보면 된다. 매년 3월 준비작업(염전바닥 고르기, 제염기구 정비 등등), 4월부터 채염(오전 손질작업 및 함수 농축작업, 오후 1시경에 채염)을 시작하였다.
 
이런 작업을 하는 염부들은 약500여명 이었으며, 소래염전은 인근의 군자 및 남동염전과 더불어 남한 최대의 천일염전 지대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염전 축조가 완성되는 1936년에는 생산이 없었으며, 1937년에서야 비로소 356정보의 면적에서 5백92만3천근의 소금을 처음으로 생산해냈다.  

▲ 염전 모습(시흥갯골생태공원-2006년)     © 심우일




 

 

 

 

 

 

 

 

 

 



소래염전과 수인협궤열차 

지금의 소래포구에 가면 눈에 확 띄는 구조물이 하나 있다. 바로 철교이다. 바다위에 건설된 다리로 해가 서해바다로 넘어 갈 때면 더욱 낭만적으로 보인다. 이 철교로 바로 남한 유일의 협궤열차가 달렸다. 보통 수원과 인천 사이를 운행했다고 하여 수인(水仁)철도로 불렀는데, 처음에는 1937년8월6일부터 인천과 경기도 여주 사이에 운행되었다. 당시에 1년2개월의 공사 기간과 총연장 52km로 공사비는 260만원이 소요되었다. 협궤열차 공사시에는 서해안에 간사지가 많아 난공사였다고 한다. 소유권은 조선경동철도(주)와 조선철도(주)에 속해 있다가 1946년 5월 국유화되었다.
 
화물수송과 여객운송의 2가지 역할을 담당 하였다. 특히 화물수송에 있어 소금과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소래염전과 군자염전(현재의 시화공업단지), 그리고 남동염전(현재의 인천 남동공업단지)에서 생산되는 소금이 이 협궤열차를 통해 수송되었기 때문이다. 1977년부터 화물운송이 중단되었던 것으로 보아 이 시기부터 소금 운송기능이 철도에서 육상교통으로 넘어 갔다고 볼 수 있다. 1995년 12월 31일 철거되어 폐선되었다. 


▲ 소래철교를 달리는 협궤열차(협궤열차와 간이역 카페 소장 자료)     © 심우일






 

 

 

 

 

 

 

 


소래염전의 기억


1 - 시흥시 포동 거주(엄00, 82세)

시흥시 포동 앞의 염전에 나가 일을 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 초엽이다. 당시 나이는 18살로 사람들의 소개로 취직을 하였다. 포동 앞의 염전은 동쪽에 있다고 하여 ‘동부염전’이라고 불렀다. 4월에 첫 소금을 낼 때면 소금고사를 지냈다. 풍성한 수확을 비는 마음이었다. 점심 식사는 집이 가까워 집에 와서 먹었다. 고된 염전 일을 하는 과정에서의 휴식은 ‘뚝막’이라는 간이 시설에 취하였다.
 
염전 창고는 1호 마다 1개소씩 있어 염전에서 채취한 소금을 창고에 쌓아 놓았다가 포장하라고 지시가 내려지면 가마니나 포대에 담았다. 포장한 소금은 ‘가시렁차(조그만 화물 열차와 유사)’에 실어 소래지사(현재의 인천시 논현동 소래마을 풍림아파트 자리)로 보냈다. 염전에는 직책이 ‘감독’ ‘염부장’ ‘반장’순의 서열화 되어 있었다. 직원은 ‘상용’과 ‘임시’로 나뉘었다. 처음엔 임시로 일하다가 ‘염부장’이 추천하여 선발하였다.
 
염전일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목도질’과 ‘물질’이었다. ‘목도질’은 염전 바닥의 소금을 거두어 소금 창고로 옮기는 것을 말하며, ‘물질’은 증발시키고 있는 바닷물의 임시 저장소에서 다시 염전 바닥으로 물을 퍼 올리는 일을 말한다. 그래도 소래염전이 있어 먹고 살기 힘들었던 그 시절에도 현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 소래염전의 소금창고     © 심우일






 

 

 

 

 

 

 

 

 

 



2 - 시흥시 월곶동 거주(최00, 70세)

염전에서 20년을 일했다. 1970년대인 30대 후반에서 50대 후반까지다. 이 곳 염전지대를 소래염전, 동부염전, 서부염전, 포리염전으로 크게 불렀다. 내가 일 한 곳은 시흥시 월곶동 앞의 서부염전이었다. 월급을 현금으로 주었고, 돈이 많지는 않았지만 지체 없이 제 때에 잘 나와 좋았다. 이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소래염전 덕분에 먹고 살만 했다.
 
염전에서 채취한 소금은 소래지사의 창고로 ‘가시렁차’를 통해 보내졌다. 50kg이 1가마였다. 그곳에서 트럭에 실려 전국으로 수송되었다. 염전 일은 3가지가 제일 힘들었다. 첫째는 갑자기 비가 내려 한 밤중이라도 비 설거지를 하기 위해 염전에 가야하는 것이다. 둘째는 ‘목도질’하는 것이다. 셋째는 ‘바지가랭이를 푸는 것’이었다. ‘수차’를 이용하여 물을 퍼 올리는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염전에도 변화가 생겨 ‘목도’대신에 ‘인력거’가, ‘수차’ 대신에 ‘발동기’가 등장하여 훨씬 일이 편해졌다.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염전 일을 그만 두었다.


▲  염전의 수차(시흥갯골생태공원-2006년)     © 심우일










 

 

 

 

 

 

 



소래염전의 변천 배경과 폐전


1930년~45년 : 염수이입관리령(鹽輸移入管理令)과 조선염전매령에 의해 소금의 생산과 공급을 국가가 독점 장악하였다.

1945년~56년 : 해방이후 소금이 절대 부족하여 민간에게도 염전 개발 허용하고 염증산5개년계획(1952-56)을 수립하여 시행하였다. 그 결과 자급자족은 물론 수출도  하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소금의 과잉생산에 따라 수급 안정책의  일환으로 민간 염전을 폐전하는 고육책을 쓰기도 하였다.

1962년 : 국유염전의 적자누적에 따라 염전매법은 폐지되고 염사업 완전 민영화를 추진했다.

1963년 : 대한염업주식회사법 공포(법률 제1421호)에 의해 대한염업주식회사가 국유염전 을 관리하게 되었고 이에 소래염전도 대한염업주식회사 소유가 되었다.

1971년 : 대한염업주식회사는 정부소유 주식 매각을 통해 완전 민간기업체로 전환하였다.

1992년 : 대한염업주식회사에서 주식회사 성담으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1996년 : 주식회사 성담 소래지사가 폐쇄되었다. 즉 소래염전이 염전의 기능을 상실하고 폐전 된 것이다.

▲ 폐전된 소래염전 모습(부서진 소금창고)     © 심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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