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묵 시인의 독자 리뷰
최분임 시집 『실리콘 소녀의 꿈』
최영숙 | 입력 : 2018/09/20 [06:56]
-최은묵 시인
∎ 시인의 말
타이르는 이 없는 습관의 거울 쩍쩍 금 간 말들 이 날카롭고 부끄러운 기록들
저수지의 구두
이 저녁이 저수지를 두레상으로 쓰나, 촉수 낮은 달맞이꽃들을 켜놓았어. 방죽을 뛰어다니는 잡풀들의 아우성 낯이 익어. 먼발치 순하게 엎드린 산들은 실업수당 받아온 오후처럼 늘어지자고 하네. 어느 여독이 발을 헛디디는지 풀벌레 울음이 높아지고,
하루에도 몇 번 앉은뱅이저울에 오르고 싶었어. 2단 햄버거처럼 두툼해진 어제를 덜어내 오늘을 달아보고 싶었어. 툭 하면 건너오던 구둣발, 시급의 노동엔 부르르 견디는 주먹이 발견되지. 인스턴트 웃음, 자동문은 벌린 아가리를 다물지 못했어.
혀 밑에 용모단정, 이란 말을 감춘 빌딩들은 귀를 열지 않더군. 변기에 기대앉은 청춘을 둘둘 말아 물 내리고 싶었어. 터벅터벅 걷는 가로등 불빛 따라가면 온몸이 녹아드는 고향에 닿을 것 같았지. 숨어들듯 고개를 숙이던 반지하방, 하룻밤 꿈처럼 아득하군.
이력 없는 청춘들은 어디를 서성이다 이 밤에 닿나. 방죽을 어슬렁거리던 나무들이 한 줌 어스름마저 털어 보일 무렵 수면 위로 거울 하나 둥실 떠오르네. 누가 빠져나오든 들어가든 묻지 않는 저 물의 입, 회전문을 옮겨다 놓은 것 같아. 그러고도 질질 끌리는 발걸음, 생각을 묶고 있는 이름 하나 풀어주고 싶군. 아래위로 날 훑던 면접관 같은 수면이 반짝이는 징검돌 몇 개 띄우고 하늘길을 밝히는데.
최분임 시집 『실리콘 소녀의 꿈』(문학의 전당)
최분임의 시는 편편마다 무채색 물감을 섞은 듯 화두가 지닌 겹이 짙다. “약 한 첩 써보지 못한 가난한 목숨이 다녀간 듯” 진술하는 시인의 입을 대신하여 그 짙음을 모두 말할 수는 없겠지만, 삶과 죽음이라는 근원적 물음을 향한 몸짓은 잔잔하다 못해 처연하다. 이런 그늘의 자리를 드러냄에 있어 많은 ‘꽃’을 가져온 것은 겉으로 보이는 꽃의 이미지가 아니라 속으로 품은 마음을 건드리고 싶었던 까닭은 아니었을지. 그래서 ‘눈물’이기도 하고, ‘통증’이기도 한 “꽃의 형량”은 유한한 우리네 삶을 대신한다. 하지만 최분임의 시는 거기에서 머물지 않고 “꿈”을 지향한다. 곳곳에 심어둔 “봄”은 일몰 이후의 내일처럼 “한사코 번지는” 무언가를 품고 있다. 그 목소리는 가까운 듯 먼 듯 들리는데, 그것이 속으로의 비명이 아니라 이따금 버럭 외침이라면 어떨까. 그럼에도 상관없겠다. “실리콘 소녀의 꿈”은 지금 이 순간에도 발굴중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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