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여기저기서 꽃들이 피어난다. 목련꽃이 피는 것을 보면 가슴 한 켠으로 서늘한 바람이 지나간다. 2019년 4월 19일 대야동 목련나무를 이식한지 꼭 1년째 되는 날이다. 목련나무의 지난 시간을 사진으로 복기한다. 누군가 “시흥에 아름다운 나무가 어디에 있나요?” 물었다. 시흥시에 있는 아름다운 나무를 이야기할 때 꼭 빠지지 않는 나무들이 있었다. 포동 새우개 마을의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도리재의 느티나무, 둔터골의 회화나무, 대야동의 목련나무 등이었다. 그러나 2019년 현재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둔터골 주민들이 600여 년 살던 터전을 떠나면서도 회화나무를 살리기 위해 마음을 모아 탄원서를 올렸다. 그러나 600년을 무탈하게 살았던 회화나무는 보호 수목이라는 목패를 달았음에도 어느 날 불에 타서 사라졌다. 도리재의 느티나무도 건물이 들어서면서 한 그루가 고사했다. 대야동 아래 방아다리길 7번지에 있었던 대야동의 목련나무는 천신만고 끝에 이식했으나 2019년 4월 19일 이식 1주년을 맞았지만 공사 중임에 만나볼 수 없다. 다만 2019년 1월 3일 본 나무의 상태로는 생사를 기약할 수가 없다.
시흥의 사라지는 마을을 기록하면서 옴치고 뛸 수 없는 생명들이 근간을 이루던 삶의 자리가 무덤이 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현재 시흥은 100년에서 600년을 살아낸 나무들의 죽음을 일상사로 지켜보게 되었다. 그것도 개발이 본격화된 근래 10여 년 안에 생긴 일들이다.
현재는 39번 도로가 우회해서 가지만 2018년도 까지는 시흥에서 부천을 운행하는 015 버스를 타고 대야동을 지나다 보면 봄이면 백만 송이의 꽃을 피워내는 100여 년 된 대야동 목련나무가 있었다. 봄이면 타동의 주민들도 목련나무의 꽃이 폈음을 말하고 또는 근황을 물어왔다. 대야동 목련나무가 있었던 시흥시 대야동 303번지 일원은 2013년 12월 11일 시흥시 고시 제 2013-98호로 주택재개발정비사업으로 시행인가 고시되었다. 현재 극동아파트 아래 마을은 두산 위브에서 “소래산을 품은 1382세대 초역세권 대단지 대야역 두산위브 더파크”라는 이름으로 분양을 시작하고 건설 중이다. 아파트 건설로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마을 주민들과 목련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목련나무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대야동 목련나무라는 이름으로 가장 먼저 기록된 것은 주간시흥 2013년 4월 14일자 “일만 송이 목련나무 화려한 꽃 만개” 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개발예정지로 지정되어 있어 향후 귀한 거목인 일만 송이 목련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 체계적인 관리 방안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라는 취지의 기사가 안시헌 전 시흥시의회의장이 제공한 목련나무 사진과 함께 실린 것이 처음이었다.
그 후 목련나무가 있는 곳의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시흥장수신문 2017년 12월 24일자 “대야동 재개발 지구에 남겨진 목련나무를 살려야 한다.”는 제목으로 목련나무 기사가 실렸다. 이후 목련나무를 살리기 위한 자발적인 시민들의 운동이 일어났다. 2017년 12월 25일 오후 5시 소래산 극동아파트 아래 ‘이데아 커피숍’에서 안시헌 전 시흥시의회 의장, 이지선 시흥자치신문 편집위원, 박영규 주간시흥 발행인, 심우일 시흥역사문화연구회 한개 회장, 임경묵 배곧고 교사, 최분임 시인, 김종환 사진작가. 최영숙 소래문학회 회장이 참석 [시흥시대야동백만송이목련지키기시민모임] 이후 ‘시대백목지키모’라 칭한다. 1차 모임을 가졌다. 그 후 이귀훈 전 시흥시의회 의장, 김상신 도시재생지원센터장, 윤창렬 목사 등이 합류했다.
위원장 안시헌, 부위원장 이지선, 박영규, 사무국장 최영숙, 집행위원 김종환, 최분임, 심우일, 임경묵 이귀훈, 김상신, 윤석창이 맡았다.
이후 2018년 1월 3일 시흥시청에서 시흥시와 두산관계자, 조합관계자, ‘시대백목지키모’가 모여 목련나무 이전에 관한 논의를 했다. 그 후 시흥시와 두산 과의 협의 끝에 2018년 1월 9일 “시흥시와 두산건설(대야동 주택재개발사업 시공사)이 사업지역 내 자생하고 있는 수령 100년(추정) 이상 된 토종 목련 나무를 보존하기로 해 지역주민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라는 시흥시 보도 자료가 배포되었다.
2018년 1월 12일 노을이 지고 있었다. 대야동 명문연립 앞, 아래 방아다리길 7번지에 있는 목련나무는 집 마당을 그득 메우고 있었다. 다정한 노부부가 살았고 안주인은 정갈하고 조용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노부부가 떠난 집은 우울했다. 목련나무 앞에 있던 명문주택은 철거가 반쯤 되었다. 대야동 목련나무를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위치는 명문주택의 주민들일 듯했다. 아이들은 층계를 오르내리고 사부작사부작 고양이들 담 지나가던 그때 거실에서 목련나무를 바라보면 소래산을 배경으로 봄이면 흰 꽃 연등, 여름의 푸름, 가을 단풍, 겨울의 풍광까지 한 폭의 그림처럼 눈에 보이는 듯했다.
1월 31일 블루문과 슈퍼문이 뜬다고 했다. 대야동의 목련나무가 궁금해서 그곳으로 갔다. 푸른 밤 우뚝하게 서 있는 나무를 만났다. 멀리 은행동의 아파트들이 보였다. 이전될 것은 알지만 건물 잔해에 둘러 쌓여있는 나무가 애처로웠다.
2018년 3월 26일 대야동 목련나무가 꽃을 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살면서 봄이 오는 것이 기쁘지 않고 불안했던 해는 2018년이 처음이었다. 이미 이식 날짜가 늦었는데 여러 번의 번복으로 늦어지고 있었다. 이미 많이 늦춰지고 있는데 계절에 맞게 꽃 피고 있는 목련나무를 지켜보는 일은 불안과 조바심이 동반되었다.
4월 3일 이식을 위해 만개한 목련나무를 전지했다. 조금이라도 몸살을 덜 앓게 하려면 꽃송이를 다 따줘야 한다는 부탁도, 마음이 다급한 것은 아랑곳없이 시간은 그렇게 화살처럼 흘렀다. 이왕 옮기기로 결정이 된 것을 적어도 단 1%라도 확률이 높을 때 이식해야 하는데 똑같은 비용을 들일 것인데 왜 이토록 마음을 애타게 하는지 몰랐다.
4월 13일 드디어 이식한다는 연락을 받고 오전 7시부터 시작하는 분 뜨기를 기록하기 위해 목련나무에게 갔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안시헌 ‘시대백목지키모’위원장의 안내 문자가 도착했다. “이제야 통화가 되었네요. 오늘 저녁부터 다시 비가 올 거라고 날짜를 변경하게 되었답니다. 18일(수) 오전 7시부터 분 뜨고, 19일(목) 00시에 옮기기로 했답니다.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미리 전지 하고, 분 뜨는 작업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최대한 이식 후 생존율을 높여야 하지 않겠냐고 전달했습니다. 안타깝습니다.”는 문자였다. 또 연기되었다. 마음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밝은 날 이식하기 위해 일하던 모든 사람들은 떠나고 목련나무만이 오롯이 남겨졌다. 오전 11시 대야동 목련나무가 소래산 자락에 이식되기 위해 옮겨졌다. 목련나무의 생존을 높이기 위해 영양제, 살균제, 살균 흙 등을 넣었다. 관리단에서도 목련나무가 잘 살 수 있도록 기원하는 의식을 위해 북어포, 사과, 배, 막걸리 등을 준비했다. 또한 부활의 의미로 계란을 준비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한 곳으로 모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를 이식하는 현장에서 현재 서울에 살며 2020년 아파트 입주할 사람을 만났다. 예비 입주자가 물었다. “궁금해서 현장을 왔다. 사진들을 담는 것을 보고 이 나무에 대해 궁금해졌다.”라고 했다. 안시헌 위원장에게서 그간의 목련나무 이전 과정 설명을 듣고 “마을에서 귀하게 여긴 나무를 우리가 볼 수 있어서 좋고 얼마나 소중한 나무인지 알아서 너무 고맙다. 마을에서 지켜주셔서 감사하다.” 고 인사를 했다. 대야동 목련나무가 오밀조밀 다정했던 옛 마을 사람들과 새 아파트로 이사 오는 새로운 주민들을 이어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만 송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는 목련나무 아래에서 어린이들의 웃음이 울려 퍼지는 그 날이 떠올랐다. 제발 무사히 안착되기를 기원했다.
2018년 봄은 비가 잦았다. 다행이었다. 한 달 가까이 지켜봤을 때 활착이 잘 된 듯했다. 안심을 하고 있던 6월 4일 오전 8시 49분 안시헌‘시대백목지키모’위원장으로부터 “목련나무의 상태가 다르게 보이니 긴급 모임을 갖고자 한다.”는 내용과 잎들이 검게 변한 목련나무 사진이 올라왔다. 사진을 보는 순간 3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에 한기가 몰려왔다. 5월 10일 보고 한 달이 지나지 않았는데 주변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이식된 목련나무 주위가 지열을 높여주는 비닐포장으로 덮인 환경과 이제 겨우 이식된 지 50일이 된 100여 년이 된 목련나무가 일찍 다가온 더위에 물 공급조차 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지선 씨는 “뿌리가 활착이 안 되어 물을 흠뻑 주어야 하는데 책임지고 관리할 사람이 없고 여름 날씨라 우려했던 일들이 일어난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목련나무가 비닐포장지에 둘러싸인 모습을 본 임경묵 씨는 “스팀기 위에 냉동만두 찌듯이 목련나무가 올려 있다.”라고 한숨을 지었다. 누구는 목련나무가 이식되기 위해 공중으로 들린 목련나무 사진을 보고 나무들이 하늘로 둥둥 떠다니는 신화를 생각했다고 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드디어 시흥시와 두산, 주택조합이 마음과 힘을 모아 마을에서 함께 살아온 아름다운 나무를 2020년 새로 생기는 어린이 공원에 심는다고 감격했었다. 나무를 이식하는 날 우연히 만난 미래의 입주민은 목련나무가 이식되는 것을 보고 사진을 담고 있던 모르는 이에게 “고맙다”라고 했다. 그러나 방치 수준으로 있었던 것이다. 공원부지로 옮겨진 목련나무가 잘 관리되고 있겠거니 하고 방심하고 있었던 마음이 가슴을 치게 했다.
6월 7일 오후 1시30분 두산건설 현장사무소에서 시흥시청 도시재생과, 두산건설, 주택조합, 명성조경건설, ‘시대백목지키모’ 회원 등이 대야동 목련나무의 지속적인 관리주체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했다. 그러나 원점을 맴돌 뿐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 목련나무를 살펴보았다. 조경 관계자는 나무 주위를 덮은 비닐포장을 치우고 나무 아래가 깊은 현 상태는 나무를 이식 후 물을 주면서 물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조치였기에 장마 때를 대비한 배수로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물 공급과 옆면시비 등을 통한 영영제 공급이라고 했다. 목련나무의 상태를 확인하고 일행들이 두산건설 현장사무소에 도착해서도 목련나무를 관리하는 주체는 없었다. 두산건설 현장소장이 우선 오늘 물 공급을 하겠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소나무 등 귀하다 싶은 나무를 이식할 때는 조경업체에서 사후관리까지 관리하는 조건으로 이식하는데 100여 년 된 목련나무를 이식하면서 시흥시와 두산건설이 대대적인 홍보를 한 가운데 이식되었는데 사후 관리 주체가 없어서 물을 구걸하는 현실이 시흥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한없이 초라했다. 6월 7일은 물을 주었지만, 그럼 다음은 또 어쩌란 말인가? 목 타는 목련나무 기사를 읽은 시민들이 반응은 이랬다. “목련나무를 죽게 한다면 1등 공신은 무관심일 것입니다.”(김○중), “정말 안타깝습니다. 100년 된 목련나무가 관리가 안 되고 있었군요.”(강○분),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염려 속에 목련나무가 새집에서 안정적인 뿌리내려 안착되기를 기원합니다.”(박○환), “살아 있는 것은 무릇 자기가 자라는 곳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인간의 욕심이 목련나무를 아프게 하네요. 몸앓이 같이 잠깐 그렇게 앓다가 건강한 모습으로 활짝 목련이 만개하리라, 믿습니다.”(안○훈) 목련나무가 목말라한다는 소식에 생수통을 준비한 시민에서부터 목련나무를 걱정하는 마음은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물이 있는 곳으로 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목련나무를 염려하는 시민들의 사랑과 관심은 깊었다. 오후 5시 25분 두산건설에서 물을 주고 있는 사진이 전송되었다. 흥건하게 물을 공급받는 목련나무를 보면서 옛 어른들이 논에 논물 들어가는 것과 자식들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이 가장 예쁘다는 말을 실감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 걱정스러운 원론으로 돌아왔다. 목련나무를 사후 관리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였다
안시헌 위원장이 두산건설 관계자에게 “목련나무가 살 수 있도록 두산에 있는 조경 담당자라도 와서 현 상태를 봐주었으면 한다.”읍소했다. 사랑하면 진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이지 알 듯했다. 또한 “시 관계자가 적극 나서서 극히 일부 있는 잎들이 마지막 잎이 아니길 소망한다.”라고 했다. 현재도 목련나무는 최악의 상태에서 생존을 위해 온 힘을 쓰고 있었다. 물을 공급받지만 이글대는 태양이 받아낸 비닐 포장 속에 둘러 쌓여있는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하루빨리 관리주체가 정해져서 목련나무가 현재의 상태에서 가장 필요한 부분을 공급받아야 할 듯했다. 고목이 이식되어 살아나려면 자력의 힘과 사람들의 조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연후에야 그 후의 결과에 대하여 한 사람으로 써 목련나무에게 당당할 수 있을 듯했다.
7월 5일 대야동 목련나무 가지들이 뚝뚝 잘려 나간 사진을 보고 참담했다. 현장을 찾았다. 나무들의 형태를 만들면서 잘린 모습을 보고 목련나무를 살리기 위해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실낱같은 기대감이 들었다. 지난 6월 25일 장마가 진다는 예보에 마음이 다급해졌다. 6월 21일 방문했을 때에도 목련나무 주변의 배수로가 없었기 때문이다. 밤 10시 목련나무에게 갔다. 다행히 배수로가 정비되어 있었다. 어둠 속에 우뚝 서 있는 나무를 보고, 제발 이 힘든 시기를 잘 넘기기를 기원했다. 장맛비가 쏟아져도 안심이 되었다. 장마가 끝나고 열흘 정도 지나 잘려 나간 목련나무를 보고 걱정하는 글들이 속속 올라왔다.‘시대백목지키모’ 안시헌 위원장은 “7월 4일 목련나무를 살리기 위해 나무를 전지했다는 시관계자의 답변을 들었다.”라고 했다. 뚝뚝 잘려나간 현재의 모습이 참담하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뭔가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목련나무의 관리 주체가 생긴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부터가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서 바라본 목련나무는 따오기처럼 오롯이 현장에 있었다. 이 공간에 아파트들이 들어설 즈음에는 잘려나간 자리에서도 새움이 돋고 건강하게 살아내서 백만 송이 목련꽃들을 피워내길 기원했다.
8월 8일 날씨가 태양에서 레이저 광선을 쏘는 듯했다. 올여름은 1904년 기상관측 이래 114년 만에 최악의 폭염이 찾아왔다. 1942년 이후 76년 만에 40℃를 넘는 지역이 속출했으며 42개 지점에서 8월 최고기온 기록을 경신하였다. 일기예보가 나올 때마다 목련나무를 생각하면 걱정이 앞섰다. 올봄은 비가 잦았다. 목련나무에게는 다행이었다. 제대로 안착되나 싶던 목련나무가 날이 더워지는 6월에 들어서자 잎이 말라 가는 현상이 나타났다. 나무를 이전하는 시기가 늦어져서 활착이 힘들었다. 옮길 때 꽃봉오리와 가지들을 더 자르고 몸통만 오도록 해야 했는데 가지를 많이 남겨뒀지 않나 하는 등의 의견들이 나왔다. 목련나무를 옮기기 전 2018년 1월부터 꾸준히 지적된 사항들이었다.
7월 4일 시흥시청에서 목련나무를 살리기 위해 죽은 나뭇가지를 잘라냈다. 두산관계자는 “나뭇가지는 시청에서 잘랐고 물은 너무 자주 주면 안 된다고 해서 주기를 맞춰 주고 있다”라고 했다. 목련나무가 가지들이 잘려 위엄을 잃고 서 있는 모습이 안타깝지만 이 시련을 딛고 살아내기를 기원했었다.
목련나무 이전 99일을 맞은 7월 26일 목련나무를 찾았을 때는 잎들이 다 말라 있었다. 두산에서 물을 공급했다. ‘시대백목지키모’안시헌 위원장은 “목련나무 이식 99일째 되는 날이다. 목련나무는 어쩌란 말인가 이 더운 복중에 죽어가고 있다. 잘려나간 가지 끝은 말라 갈라지고 회생을 기다리는 것은 죄일까?”라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8월 8일 모든 언론에서 중계방송 하듯 114년 만의 폭염을 보도하는데 살아 내기에 최악의 조건에 서 있는 목련나무는 덩그러니 공사 현장 한쪽에 서 있었다. 목련나무는 지금 스스로 살아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힘을 쓰고 있을까 싶었다. 제발, 뿌리는 살아남아서 내년 봄이 되면 삐죽이 새순 돋는 그날을 기대했다. 속이 타들어가는 계절이었다.
봄은 꽃소식과 함께 왔다. 목련들이 피어났다. 대야동 목련나무는 혹시 작은 싹이라도 나왔을까 궁금했다. 그러나 목련나무로 가는 길은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기 때문에 언제나처럼 공사 관계자의 허가와 안내가 있어야 했다. ‘시대백목지키모’안시헌 위원장이 목련나무를 볼 수 있는지 타진을 했다. 그러나 공사 일정이 빡빡하고 목련나무 가는 길이 위험해서 허락할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했다. 가까운 시일에, 어린이 공원을 공사할 때 그 방향으로 문이 개방될 때 목련나무를 보면 좋겠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했다. 어느 한 곳에서라도 싹이라도 볼 수 있을까 싶었던 기대는 확인조차 할 수 없었다.
목련나무 지금 어떤가요? 누군가 물었다. 답을 하기 어려웠다. 지금 어떠한 상황인지 답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입은 모두 말랐지만 뿌리의 어디쯤은 자신을 살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까 기원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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