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자 소개
이관영
39년생. 북시흥농협 인근에 살면서 6.25를 겪었고, 군 제대 후 계수동 땅을 사서 포도농사와 목장을 운영했다. 새마을지도자로 활동하면서 고소득 마을지도자 22명에 선정되어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우리 조상이 여기서 400년 이상을 살았어
우리 조상이 여기서 400년 이상 살았으니까 20대 정도 살았을 거여. 대야동에는 경주이씨가 많거든. 할미길을 중심으로 저쪽(계수동 방면)은 덕수 이씨가 가져라, 이쪽(대야동 방면)은 경주이씨가 가져라. 그래서 경주이씨가 대야동에서 많이 산거야.
그건 나라에서 우리에게 하사한 거요. 너희 둘이 노나가져라고. 근데 우리 조상들이 활쏘기를 좋아했어요. 농사는 안짓고 맨날 활만 쏘러 돌아다녔대. 농사는 머슴들에게 맡겨놓고. 머슴들이 3년 농사 짓고 나면 땅 몇 마지기 내주고 또 머슴 새로 들여 땅 몇마지기 내주고. 그래서 우리는 조상들에게 별로 땅을 물려받은게 없어. 근데 경주이씨들은 많이 물려받았지. 옆에 은계지구 택지조성하는데 거기도 경주이씨야. 경주이씨 사람들은 여태까지 보존하고 있었다고.
율곡선생,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덕수이씨야. 지금도 저 서울대 후문 앞에 가면 거기서 시제를 지내. 충무공 형이 율리공이야. 우리집은 율리공파야. 계수동에 덕수이씨들이 모여 살다가 지금은 두 집 남았어. 그전에는 집성촌이었었는데 근처가 공장이 되면서 다 나와버렸어.
나 사는데가 구미구미 하는데 원래 이름이 귀미야. 귀림리. 귀향할 귀자 임무 임자.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마을.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마을. 벼슬하다가 이리저리 돌아다닐거 아녀. 관직이 끝나고 돌아오는 마을. 귀임리가 귀림리가 됐어. 그러다 6.25 후에 구미라고. 내가 새마을지도자하면서 기자들이 책자에 올리느라고 구미로 기재를 한거야. 그러다 구미가 됐어.
우리 아버지는 일제 시대 영등포에 피혁회사 다녔어. 가죽회사. 거기 다니다가 해방되고 지금의 유한양행 거기 다니셨지. 유한양행이 지금은 오류동 가는데 있지만 해방되고 나서는 하우고개 넘어 있었다고. 여기서 걸어다녔으니까. 직장에 다녀도 생활은 어려웠어요. 월급을 받아도 자식들 주렁주렁 낳았잖아. 혼자 벌어서 그 자식들 다 먹여 살리기 힘들지 뭐.
제일 큰 형은 전쟁 때 인민군에 끌려갔고 둘째형은 돌아가신지 10년이 넘었고. 내가 셋째인데. 내 밑으로 둘 있고. 하나는 안양에서 살고 하나는 대구 영천에서 살고. 부모님 제사를 내가 지내지. 8남매에요. 위로 누이 둘 있었는데 누이는 죽고 여동생은 살아 있고요.
처음엔 인천이었다가 부천이 됐다가 시흥군 소래면이 됐지
이전에는 여기 소래가 인천부였지. 인천부였다가 인천군이었다가 시흥군으로 붙은 거지. 부천이 시가 되면서 소래면을 잘라 버렸어요. 같이 시로 승격 안시키고. 여기가 갈 데가 없으니까 시흥군으로 붙은 거여. 인천부에 소래면이었다가 부천군 소래면, 그러다 시흥군 소래면하다가 소래읍이 됐잖아. 그러다가 시흥시로 승격됐지.
시흥군청이 안양에 있었지. 그때는 군포시 의왕시 광명시 다 시흥군 아녀. 말죽거리까지 시흥군이었다고. 서울 서초동. 양재동 그쪽까지 다 시흥 땅이었었어.
옛날에는 소래면사무소였어. 지금 농협 맞은편에. 옆에 부평경찰서 소래지서가 붙어 있었어요. 그러다가 6.25 사변 나기 전인가 해방되고 얼마 있다가 보건소로 면사무소가 옮긴거죠. 우리는 북시흥 농협 밑에 살았어. 대야동 410번지. 바로 근처에 양조장이 있었고.
그 옛날에는 다른 마을들이 다 작았는데 거기만 한 40~50호 살았어요. 사오십호면 큰 마을이거든요. 그래서 댓골이야. 동네 이름은 댓골이고 웃대골, 아랫대골, 쟁골, 방아다리 이렇게 4개 부락이 있었어요.
전쟁 중에 학교가 다 타버리고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에서 공부했어
국민학교 1학년 때 해방이 됐어요. 소래국민학교 28회 졸업생이에요. 소래국민학교에 형제들도 다 다녔지.
그때 놀거리가 하나도 없었어요. 비삭치기. 동그랗게 세워놓고 던져서 맞추고 양발에 끼워넣고 맞추고 그러는거. 또 구슬 던져서 굴리는 구슬치기. 총알치기. 자치기 제기차기. 노는 건 그거밖에 없었어요. 내가 구슬치기 선수에요. 여기서 저기 있는 것도 맞추고 했는데 뭘. 집에 구슬이 많았었죠. 근데 아버지한테 들켜서 아버지가 다 내버렸죠. 그런 것만 한다고. 몰래 갖다가 감춰놓고 쓰고 그랬지.
전쟁 때 소이탄이라고 있어. 이렇게 쏘면 불이 나는거. 그걸로 폭격을 해가지고 소래국민학교가 다 타버린거야. 그래서 우리는 학교도 없이 거기 플라타너스가 많거든. 그 나무 밑에서 공부를 했어. 우리는 건물이 없어서 나무 밑에서 수업하고. 우리 다음 후배들은 움막집에서 수업을 하고. 전쟁 때문에 1년을 건너뛰었으니까 1955년에 10월 21일인가 졸업을 했어. 그 다음 2월달에 정식으로 우리 다음 후배들 졸업하고. 그러니까 한 해에 졸업식이 두 번 있었던 거야.
이 학교 역사가 깊지. 일정시대에 군자, 부천시 옥길동, 광명 이쪽에서 전부 여기 다녔으니까. 멀리서 오는 사람들은 한 20리 길을 걸어 다녔지. 새벽부터 걸어왔지. 이혁근이라고 시흥시의회 의장도 하고 나하고 동창인데. 방산동에서 공동묘지를 지나서 왔어. 그러고 또 그 당시에는 디리디리한 사람들은 학교에서 안뽑았어요. 외나무다리를 만들어가지고 우르르르 그걸 건너가야만 뽑았다고. 시험봐. 왜냐면 빠릿빠릿한 애들을 뽑아서 빨리 키워서 일본군으로 뽑아가야 하니까. 그래서 둔한 사람은 뽑지 않았어요. 해방되고 나서 전에 학교 못다녔던 애들이 전부 들어와가지고 나이들이 많았지.
▲소래국민학교
1920년 개교. 교목 은행나무. 교화 장미. 소래공립보통학교-1945년소래초등학교-1990 대야초 분리-1995은행초 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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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생애사
한 사람의 삶은 그 개인의 삶일 뿐만 아니라 시대와 호흡한다. 역사는 위대한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닌, 각자 삶을 살았던 개개인의 인생이 모여 흐르는 것이다. 교과서나 위인전에 갇힌 역사를 풀어내면 삶이 보인다. 각자의 삶도 시대와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구술생애사는 개인의 경험과 기억을 말과 글로 풀어내 시대적 사회적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모든 것이 너무 빨리 변하는 시대, 빨리 잊고 빨리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미덕인 시대이기에 더욱 옛 기억이 소중하다.
대야동만 해도 은계택지개발이 이뤄지면서 계수동의 마을들이 통째로 없어졌다. 수노골길, 건지물길 등 도로명으로라도 흔적을 남기려 하지만 형태가 사라진 것을 간직하기란 어렵다. 결국 사람들의 기억속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구술생애사는 기억에 의존한 기록이자, 역사의 복원이다.
구술생애사는 개인의 경험과 기억을 풀어내면서 재해석하는 과정이다. 구술자는 본인의 기억을 얘기하는 것이기에 주관적이다. 한 사건을 놓고도 사람들의 해석은 제각각이다. 또한 똑같은 사건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애써 잊고 살던 기억을 ‘말’로 표현하면서, 그리고 그것을 기록하는 사람과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다양한 시각을 바라보면서 기억의 재해석을 시도한다. 어떤 기억은 개인이 평생 짊어지고 가는 트라우마일 수도 있다. 말과 글로 표현하면서 객관적으로 다시 바라보고 거리두기를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구술생애사는 역사적 기록을 떠나 개인의 삶을 다시 바라보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원고는 '대야동 구술생애사 잠깐만 살다가 이사가려고 했지'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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