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지내교회에서 3.1운동 100주년 단체사진을 담다 © 최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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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9일 오후 4시 무지내 교회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을 열었다.
심포지엄에 앞서 3.1운동 100주년 기념 예배가 김주석 목사의 여는 기도로 시작되었다. ‘3.1운동 100주년 기념 예배’를 마치고 김규성 YMCA증경이사장, 심우일 YMCA이사, 명문고등학교 교감, 김진곤 시흥YMCA 사무총장 순으로 발제했다.
▲ 김규성 증경 ymca 증경이사장이 발제하다 © 최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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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기념 예배에 이어 첫 번째 발제자로 김규성(시흥YMCA증경이사장)이 '한국기독교와 3.1운동 100주년'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김규성 발제자는 "3.1운동은 일제의 식민지배와 그 억압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운동으로서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관과 태화관, 그리고 전국의 9개 지역에서 '독립선어서'를 선포함으로 시작되어 적극적으로 약 2개월, 광의적으로는 1년여 간에 걸쳐 국내와 만주, 연해주 등으로 확대된 민족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의미한다."고 했다.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으로 5월말까지 학살된 자 7,500명, 부상자 16,000명, 피검된 자는 47,000명"에 달했다고 발표했다. 3.1운동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 민족이 독립을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알 수 있었다. 고 했다.
“독립선언서 서명자들의 인적 구성에서 볼 때 민족대표 33인 중 천도교도 15명, 불교도 2명, 기독교 신자는 16명으로 50%를 점하고 있다. 3.1운동의 준비단계, 곧 신한청년당의 조직, 동경에서의 2.8독립선언, 국내에서의 만세운동 준비 등에 이르기까지 기독교는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했다.
김규성 발제자는 마무리에서 "3.1운동에서는 일제강점과 무단통치를 물리치고자 했는데, 해방 70여 년을 넘기 우리는 외세의 재배를 완전히 벗어나 있는가, 기미독립선언은 분명히 한국의 자주국임과 한국민의 자주민임을 선포했다."며 "지금은 어떤 상태인가. 남북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해, 오늘의 상태를 보는 한국교회의 혜안이 필요할 것으로 본다."고 했다.
두 번째 발제는 "시흥지역 3.1운동사'라는 제목으로 심우일(시흥YMCA 이사, 광명 명문고등학교 교감)이 했다.
심우일 발제자는 시흥지역에서의 3.운동 기록을 발표했다. "2019년 2월말 현재 시흥시의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3.1운동과 관련된 기록들을 날짜와 장소, 내용으로 돌아보고자 한다. 과거 부천군 소래면, 시흥군 수암면과 군자면이 현재의 시흥시의 모태가 되었음을 인지하면 다음 내용을 이해하는데 한층 도움이 될 것"이라며 시흥지역의 3.1운동 당시를 발표했다. "3월 24일 부천군 계남면 및 소래면 부천군 계남면(桂南面) 및 소래면(蘇萊面) 약750여명의 주민들이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일본 경찰이 출동하였다."를 시작으로 군자면 장곡리, 군자면 월곶리, 수암면 수암리, 군자면 선부리, 소래면 신천리, 군자면 거모리, 군자면 장현리 등 시흥의 전 지역이 3.1운동에 가담한 것을 볼 수 있었다.
2019년 3월 1일 3.1운동 100주년 행사를 한 1919년 4월 4일 군자면 거모리 만세운동을 다음과 같이 발제했다.
"4월 4일 군자면 거모리- 군자면에서는 1919년 4월 4일 거모리에 소재한 면사무소 및 경찰관주재소 부근에서 수백 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강은식(군자면 원곡리, 35세)은 군중 속에서 구한국 국기를 휘두르며 군중을 선동하여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같은 날 군자면 죽율리에서는 김천복(군자면 죽율리, 23세)이 리민들에게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기 위해 거모리에 있는 면사무소에 집합하라”며 선동한 후 수십 명을 모아 거모리를 향해 시위 행진했다.
이때 시위군중은 일본 경찰이 발포한 총소리를 듣고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김천복은 다른 주동자 2~3명과 함께 거모리에 이르러 면사무소 및 경찰관주재소 부근에 집결한 수백 명의 군중을 선동하여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는 죽율리 주민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기 위해 면사무소로 가라. 만약 불응하는 때에는 후환이 있을 것이다”고 하여 리민 30명을 이장 집에 모이게 한 다음 이들과 함께 거모리를 향해 출발했다.
한편, 1,500여명이 참가하고 천도교와 기독교계 인사, 그리고 주민들이 합세하여 만세 시위 운동을 매우 격렬하게 전개하였으며, 일본 경찰에게 7명이 체포되었다는 일본측 기록도 있다." 현장에 있는 느낌이었다.
심우일 발제자는 마무리에서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앞으로 더 이상 그날이 없는 세상을 위하여 시흥지역에서부터 다음의 4가지를 강력히 빠른 시일 내에 실행할 것을 제안하며 시흥지역 3.1운동사 톺아보기를 마무리한다.
첫째, 항일선양과 친일청산을 위한 시흥시조례를 만든다.
둘째, 조례를 바탕으로 항일과 친일관련 조사 및 연구 사업을 한다.
셋째, 사실조사 내용을 학교에서 교육과정에 반영하여 교육을 실시한다.
넷째, 시흥시에서는 시민대상으로 다양한 홍보활동(도로명, 공원명, 전철역 특화, 사이버 공간 활용)을 한다."고 했다.
마지막 발제자로 김진곤 시흥YMCA 사무총장 이 3.1운동과 YMCA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김진곤 발제자는“일제에 의해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1898년)된 일과 황성 YMCA 창립(1903년)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중 기독교인은 16명(장로교 7명, 갈미교 9명)이었으며, 그중 ‘한국기독교청년회운동사’에 따르면 YMCA 관계자는 9명이었다.”고 했다. “1919년 1월 6일 조선인 유학생들은 동경의 조선YMCA 회관에서 신년웅병대뢰를 열고 독립운동의 방략에 대해 협의했고, 난상토론을 거쳐 이튿날 서춘을 비롯하여 유학생 임시대표위원이 구성되었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2월 8일 조선YMCA 회관에서 유학생 총회를 명분으로 한 ‘조선청년독립단대회가’ 4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개최되었다. 이들은 독립선언서 낭독 후 시가행진을 예정했지만 일본 경찰의 저지로 무산되었고, 임시대표위원 중 상해로 출발한 이광수와 조선으로 귀국한 최근우를 제외한 9명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한규무, ‘3.1운동과 한국YMCA’,『기독교사상』)”3.1운동과 YMCA의 깊은 연관성을 보여주는 자료였다.
또한 “3.1운동 이후 한국YMCA 는 전국적 조직을 강화하고, 교육, 소년, 체육 사업은 물론 농촌운동, 물산장려운동 등 함흥, 선천, 평양, 대구, 광주, 원산, 전주, 김천, 신의주YMCA 등에서 1938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기 전까지 국내에서 미족독립과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했다.
김진곤 발제자는 마무리에서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역사적 공감을 느끼고 의미를 깨닫도록 할 수 있는 방안을 제안했다.
“첫째, 청년, 청소년 관전에서 ‘3.1운동의 재발견’ 프로젝트 수행-Y활동이나 학교 교육 등을 통해 가족이나 친족 가운데 또는 인근마을, 지역에서 3.1운동과 관련된 인물이나 자료, 유적지를 찾아 인터뷰를 하거나 직접 방문하여 체헙 자료를 만들고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서로 공유 할 수 있도록 한다. 둘째, 시대적 소명을 새롭게 하는 ‘청년/청소년 3.1운동 토론의 광장’ 개최, 셋째, 온라인 ‘3.1운동 100주년 청소년 참여 플랫폼’ 구축” 등을 제시했다.
심포지엄을 마치고 심우일 발제자는 "3.1운동의 정신인 독립국과 자주민의 세상이 활짝 열렸으면 합니다. 이런 바람의 실현을 위해서 국민 모두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면 좋겠다."고 심경을 전했다.
1902년 설립된, 117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무지내 교회에서 개최한 '3.1운동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무지내교회 김영기 담임목사는 환영사에서 장명덕 전도사의 일생을 이야기 했다. “장명덕 전도사는 1901년 부천군 소래면 무지리에서 출생하여 5세 때부터 고향의 강습소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1925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상동교회 전도사로 파송 받았다. 그 후 인천화도교회 전도사로 파송되어 1939년까지 4년간 시무했다. 그러나 화도교회도 다른 교회와 마찬가지로 일제의 신사참배를 하라는 일제의 강요에 저항해 화도교회 전도부인의 직을 사임하였다.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려는 일제에 대한 항거였다.”고 말했다.
장명덕 전도사가 역사의 조명을 받지 못했지만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시대, 그때 그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종교와 신념에 따라 애국했던 그 시대의 인물이었다.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무지리, 무지내 교회에서 하는 심포지엄은 더욱 깊이를 더해주었다. 장명덕 전도사의 지난 행적을 찾는 일 또한 남은 이들의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진정한 3.운동을 계승 발전시키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