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鍾路)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심훈 - 그날이 오면>
1. 그날의 시작
1919년 3월 1일 서울, 평양, 의주, 원산 등지에서 시작된 독립 만세 운동은 전국과 해외까지 지역 범위를 확대하며 5월까지 지속되었다. 처음에 대도시에서 시작된 만세 운동은 점차 중소도시와 농촌으로, 그리고 3월 하순부터 4월 상순에는 면사무소와 파출소를 습격하는 등의 격렬한 양상을 보이며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되었다. 더불어, 노동자들의 파업, 상인들의 철시(撤市), 햇불 및 봉화 시위도 있었다. 이런 운동은 지식인과 청년, 그리고 학생층이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활발하게 파급되었으며 심지어는 비밀결사 조직도 꾸려서 민족 독립 쟁취를 위한 투쟁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의 독립 만세 운동 상황을 묘사한 일본측 기록인 『朝鮮の獨立思想及運動』에 ‘이 군중은 학생 소년 소녀 노인 부녀 직공 상인 점원 청년 차부 시골에서 온 농부 등 모든 계급을 통한 노약 남녀의 집합이었다. …… 학생은 제복을 입은 채로 손에는 학교 가방을 들고, 점원은 붓을 손에 들고, 직공은 연장을, 노인은 긴 장죽을 입에 물고 있었다.’라는 기록을 통해서 볼 때, 모든 국민이 결연히 독립 만세 운동에 나섰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3월 1일을 기점으로 전국을 휩쓸었던 독립 만세 운동 상황을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통해 보면, 집회 횟수 1,542회, 참가인원 202만 3,098명, 사망자수 7,509명, 부상자수 1만 5,961명, 피검자수 4만 6,948명, 불탄 건물은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나 되었다.
독립국과 자주민을 만방에 선언하며 떨쳐 일어난 혁명같은 독립 만세 시위는 지금의 시흥시 지역에서도 어김없이 활화산처럼 폭발하였다.
2. 그날의 기록들
2019년 2월말 현재 시흥시의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3.1운동과 관련된 기록들을 날짜와 장소, 내용으로 돌아보고자 한다. 과거 부천군 소래면, 시흥군 수암면과 군자면이 현재의 시흥시의 모태가 되었음을 인지하면 다음 내용을 이해하는데 한층 도움이 될 것이다.
가. 3월 24일 부천군 계남면 및 소래면
부천군 계남면(桂南面) 및 소래면(蘇萊面) 약750여명의 주민들이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일본 경찰이 출동하였다.
나. 3월 28일 부천군 일대
3월 28일 밤 부천군내 10여 곳에서 각 50~60명씩 모여 횃불을 들고 불을 지르며 독립 만세를 높이 불러댔다. 인천경찰서에서 순사를 급파하여 해산시켰다.
다. 3월 29일 군자면 장곡리
군자면(君子面) 장곡리(長谷里)에서 약100여명의 주민들이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헌병 6명이 출동하였다.
라. 3월 29일 군자면 월곶리
군자면(君子面) 월곶리(月串里)에서 약100여명의 주민들이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마. 3월 30일 수암면 수암리
수암면(秀岩面)에서는 면내 18개 동리가 3월 30일 오전 10시에 일제히 모여 만세시위를 하기로 하였다. 동민들은 각각 지휘자의 인도 아래 이날 집합 장소인 수암리 비석거리(硬立洞)에 모였다. 모인 군중은 약 2천 명으로 우선 이곳에서 만세를 불러 기세를 올렸다. 인도자는 유익수(柳益秀)·윤병소(尹秉昭) 등으로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하면서 경찰관주재소·보통학교·향교 등을 돌았다.
유익수는 처음 자기 집 앞에 있을 때 동면 성포리(聲浦里) 구장이 인솔하는 시위행렬을 따라 수암리 비석거리까지 갔다. 이때 성포리 구장이, “여러 사람이 모였으니 폭동이 일어날지 모르오. 만일 주재소라도 습격하면 큰 일이 날 터이니 귀하가 알아서 지휘하면 염려 없을 것이요.”하였다.
유익수는 군중을 지휘하며 읍내 도수장까지 갔는데, 이때 수암면 와리(瓦里)에 사는 홍순칠(洪淳七)이 태극기를 주었다. 이에 더욱 용기를 얻은 유익수는 군중의 앞장을 서서 시위행진을 계속하였는데, 일제 경찰이, “읍내로 들어가지 말고 해산하라.”하였다. 그러나 군중들은 이에 응하지 않고 읍내로 들어가며 만세시위를 하였다.
이날 홍순칠은 임학신(林學信)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자기 동리 사람들 30여 명과 읍내로 들어갔다.
윤동욱(尹東旭)은 자기 동리 사람과 같이 읍내에 들어가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앞서다가 보통학교 앞에서 순사 임건호(任建鎬)를 만나자, “너도 조선 사람이다. 만세를 불러라. 관리가 부르면 군중이 따라간다.”
하며 강요하였으나 임은 불응하였다.
한편 이날 김병권(金秉權)·이봉문(李奉文) 등 화정리(花井里) 동민도 이 만세시위 행렬에 참가했다.
아울러, 이날 2,000여명이 참가하고 주민들과 기독교계 인사들이 합세하여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2명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는 일본측의 기록도 있다.
바. 3월 31일 시흥군 수암면 수암리
수암면(秀岩面) 수암리에서 약300여명의 주민들이 만세 시위 운동을 벌였으며, 일본경찰이 출동하였다.
사. 3월 31일 군자면 선부리
군자면(君子面) 선부리(仙府里)에서 주민들이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주민들은 거모리의 군자면사무소와 경찰 파출소를 습격하였다. 일본군대 6명이 시위대를 해산시켰고 급히 영등포 경찰서에서 2명이 파견 지원을 군자면으로 나갔다는 일본측의 기록도 있다.
아. 3월 31일 부천군 남동면 서창리
부천군 남동면(南東面) 서창리(西昌里)에서 송성용(宋聖用)이 중심이 되어 ‘4월 1일 질천(蛭川)시장에서 전 면민이 집합하여 조선 독립만세를 제창할 터이니 많이 참석하라.’는 비밀 통지를 하는 등 만세 운동을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체포되기도 하였다. 질천(蛭川)은 사천(蛇川)의 오기이며, 인근의 소래면 사천장(蛇川場)이 독립 만세를 부르려던 장소로 보인다.
▲ 송성용의 판결문 일부-원부분이 '사천시장' ©심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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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4월 1일 부천군 소래면 신천리
소래면(蘇萊面) 사천장(蛇川場)에서 약300여명의 주민들이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5명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차. 4월 2일 부천군 소래면 신천리
소래면(蘇萊面) 사천장(蛇川場)에서 약80여명의 주민들이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일본경찰이 발포도 하였다.
카. 4월 3일과 4일 군자면 거모리
3일에 거모리의 군자면사무소와 경찰파출소를 불사르고 훼손시키려는 목적으로 군자면민 전부가 경찰파출소 앞에 모이라는 협박장(통지문)을 면내 각리에 배포하는 자가 있었다. 다음날인 4일 오전 11시에는 경찰파출소 부근에 만세 시위대 1천여명이 운집하여 경찰파출소로 이동하는 일부를 회유하여 해산시켰으며, 이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공포(空砲)를 발사하여 오후 2시경에 해산시켰다.
타. 4월 4일 군자면 거모리
군자면에서는 1919년 4월 4일 거모리에 소재한 면사무소 및 경찰관주재소 부근에서 수백 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강은식(군자면 원곡리, 35세)은 군중 속에서 구한국 국기를 휘두르며 군중을 선동하여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같은 날 군자면 죽율리에서는 김천복(군자면 죽율리, 23세)이 리민들에게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기 위해 거모리에 있는 면사무소에 집합하라”며 선동한 후 수십 명을 모아 거모리를 향해 시위 행진했다.
이때 시위군중은 일본 경찰이 발포한 총소리를 듣고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김천복은 다른 주동자 2~3명과 함께 거모리에 이르러 면사무소 및 경찰관주재소 부근에 집결한 수백 명의 군중을 선동하여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는 죽율리 주민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기 위해 면사무소로 가라. 만약 불응하는 때에는 후환이 있을 것이다”고 하여 리민 30명을 이장 집에 모이게 한 다음 이들과 함께 거모리를 향해 출발했다.
한편, 1,500여명이 참가하고 천도교와 기독교계 인사, 그리고 주민들이 합세하여 만세 시위 운동을 매우 격렬하게 전개하였으며, 일본 경찰에게 7명이 체포되었다는 일본측 기록도 있다.
파. 4월 6일 군자면 장현리
4월 6일 권희(장현리, 20세)는 자신의 집에서 ‘비밀통고(秘密通告)’라는 제목의 격문을 발의, 집필하여 이를 각 동리에서 차례로 회람하도록 그림으로 표시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이래로 받은 10년간의 학정에서 벗어나 독립하려 한다. 우리들은 이 기쁨에 대하여 명 7일이면 구 시장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같이 부르려고 한다. 각 리민(里民)은 구한국 국기 1개씩을 가지고 와서 모이라”는 내용의 격문을 작성했다. 권희가 작성한 이 격문은 장수산(농업, 21세)이 이를 마을 구장인 조카 이종영(李鍾榮)의 집 앞에 놓아 두고, 이를 마을 주민들이 서로 돌려보게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시위운동으로 이끌었다.
후에 권희와 장수산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이종진(李鍾振)에 따르면, 4월 5일 오후 3시경 밭에서 돌아오는 도중 장곡리 남쪽 고개길 노변에서 1통의 문서(격문)와 작은 돌이 봉하지 않은 채로 들어 있는 봉투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러나 문자를 해독하지 못해 이종형(李鍾亨)에게 읽어 달라고 했던바, “4월 7일 만세를 부르니 면사무소에 집합하라”는 사발통문이었다고 한다.
이종진은 이것을 장곡리 이장 이덕증(李德增)에게 전달했다. 이덕증도 4월 5일 오후 6시 경 리민 이응수(李應洙)로부터 이종형이“구장에게 교부하라”고 하였다며 비밀 통고문 1통을 받았는데, “오는 7일 대한독립 만세를 높이 부를터 이니 구 시장 자리에 면민은 집합하라. 오지 않는 자는 후일 위해가 있을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이덕증은 사환을 시켜 이 격문을 다시 지정되어 있는 이웃 월곶리(月串里) 구장 앞으로 보냈다.
▲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를 당시 시흥시 장곡동 출신 장수산 독립지사의 모습 © 심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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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4월 7일 군자면 거모리
군자면(君子面) 거둔리(去屯里)에서 주민들이 만세 시위 운동을 계획하였고, 이를 미연에 방지하였다. 거둔리는 거모리(去毛里)의 오기로 보인다.
3. 그날의 기록이 주는 의미
군자면의 만세 시위 운동의 중심 지역은 군자면사무소와 경찰파출소가 있던 지금의 거모동이었다. 거모동을 중심으로 지금의 시흥시 장곡동, 월곶동, 장현동과 안산시 선부동에서 활발하게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4월 4일의 만세 시위는 관공서를 습격하여 불을 지를 목적으로 1천명이 훨씬 넘는 주민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만세 운동이었다. 일본 경찰은 공포(空砲)를 쏘면서 시위대를 해산할 정도였다. 일반 주민들은 물론 종교계인 천도교와 기독교계 인사들이 조직적으로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수암면의 만세 시위 운동의 중심 지역은 수암면사무소와 경찰파출소가 있던 지금의 안산시 안산동(옛 수암동)이었다. 3월 30일의 만세 시위는 2천여 명의 면내 동리 주민들이 모두 참여하는 대규모 만세 운동이었다. 1916년 기준으로 수암면의 인구가 1,592가구 8,120명이었는데,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많은 인원이 마을 단위로 매우 조직적으로 참여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군자면과 마찬가지로 일반 주민들을 비롯하여 기독교계 인사들이 조직적으로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소래면은 군자면과 수암면과 마찬가지로 행정 중심지인 지금의 신천동(옛 사천장터)일대에서 일반 주민들이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곳에는 개시일이 1일과 6일의 우시장으로 유명한 사천장(뱀내장)이 소재하여 장날에 맞춰 시위를 계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우시장이 소를 끌고 이동하는 특성이 있고 이러다 보니 장꾼들이 각 지역의 소식을 빠르게 다른 지역으로 전해 줄 수 가 있었다. 소래면의 뱀내장과 계남면의 소사장, 계양면의 황어장 사이에 소식 전파의 특성과 3곳에서 3월 24일에 동시에 전개하였던 만세 시위 운동은 이런 장터만의 역학관계가 내재했을 것이다.
▲ 시흥시 신천동에 소재한 우시장인 뱀내장터의 마지막 국밥집 '금천옥' 안내판 © 심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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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날 없는 세상을 위하여
그날과 그날 이후, 공간적으로는 시흥 지역, 시간적으로는 약 15일간에 걸쳐 국권과 민권을 되찾으려는 열화와 같은 의지가 담긴 양상을 살펴보았다.
그날과 그날 이후가 한 참 지나고 1945년 마침내 학수고대하던 광복이 되었다. 그리고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의 화마가 한반도를 할퀴고 지나갔다. 1948년 제헌국회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10월 22일에 설치되어 민족정기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기회는 물거품이 되었고 시간이 흘러 어느덧 2019년이 되었다.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우리는 그날 이후 100년간 어떤 목표를 세우고 무엇을 해왔는가? 그리고 지금 이후 어떤 방향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 나갈 것인가? 무거운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앞으로 더 이상 그날이 없는 세상을 위하여 시흥지역에서부터 다음의 4가지를 강력히 빠른 시일내에 실행할 것을 제안하며 시흥지역 3.1운동사 톺아보기를 마무리한다.
첫째, 항일선양과 친일청산을 위한 시흥시조례를 만든다.
둘째, 조례를 바탕으로 항일과 친일관련 조사 및 연구 사업을 한다.
셋째, 사실조사 내용을 학교에서 교육과정에 반영하여 교육을 실시한다.
넷째, 시흥시에서는 시민대상으로 다양한 홍보활동(도로명, 공원명, 전철역 특화, 사이버 공간 활용)을 한다.
▲ 군자면 거모리 만세운동의 독립지사 김천복선생의 후손들 모습-군자초등학교에서 © 심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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