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13일 양문교회 북카페에서 임경묵 시인의 첫 시집 <체 게바라 치킨집>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는...
<체 게바라 치킨집>을 詩의 언어로 차린 시인도 있었고,
거리에 나뒹굴기 시작한 가을을 주워 온 시인도 있었고, 체 게바라를 즉석에서 쓱쓱 불러낸 시인도 있었고,
시종일관 능청스럽고 여유있는 멘트로 분위기를 띄운 사회자 교감선생님도 있었고,
가을의 쓸쓸함을 노래로 데운 가수도 있었고,
시 ‘우산 수리 전문가’를 낭독하면서 자신은 우산 수리 전문가를 아빠라고 생각했는데 아빠는 할아버지를 생각하고 있었다며 출판기념회 자리를 잠시 숙연하게 만든 코스모스 같은 시인의 딸도 있었고,
친구 아빠 시를 깜찍하게 낭독한 소녀도 있었고,
시인과 한 집에 산다는 들꽃 같은 아내도 있었고, 막내 이모부인 시인을 존경하는 조카들과 처형도 있었고, 시인의 오래된 연애사의 기억을 간직한 초임지의 선생님들도 있었고, 하모니카를 잘 불어 자신이 그린 소를 춤추게 하는 화가도 있었고,
기도와 축하를 한꺼번에 건넨 목사인 시인도 있었고,
교감 선생님이 사회를 봐서 교감되는 자리라서 좋다는 시인도 있었고,
전 시의원이자 문학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는 이도 있었고, 홍천에서 대전에서 서울에서 당진에서 모인 시인들도 있었고,
시인을 아끼는 미술과 음악 문학 분야의 오랜 지기들도 있었고,
시인과 함께 글을 쓰고 고민하는 동인들도 있었다.
우산 수리 전문가/임경묵
등굣길에 비가 온다는
우산 수리 전문가의 예언이 적중했다
그가 우산을 건네자
끝말잇기를 하듯 빗방울이 떨어진다
엊그제 비를 맞으며 나와 함께 등굣길을 나섰던 우산 한 개가 아직 돌아
오지 않았다고 그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지만
나는 언제나처럼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는 날마다 고장 난 우산을 수거하고
그는 날마다 고장 난 우산을 수리한다
그가 수리한 우산의 팔구십 퍼센트가 나를 위해 쓰였다
한번은 다 저녁에 예고도 없이 소나기가 퍼부었는데
당황한 우산 수리 전문가가
빗속을 뚫고
학교까지 나를 찾아와 불쑥 우산을 건넸다
비 맞고 다니지 말아라
돌이켜보니,
배후에 우산 수리 전문가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우울한 세계에서
비 한 방울 맞지 않을 수 있었다
저녁상을 물린 우산 수리 전문가가 툇마루에 앉아
구름의 방향과 색깔을 살피고
바람의 냄새를 맡는다
새로 수리할 우산을 펼쳐 빙글빙글 돌린다
작년보다 잔 고장이 더 많아진 그가 우산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일기예보에 내일 비가 올 확률은
팔구십 퍼센트.
골목의 감정 /임경묵
바바리맨이 올 시간이다
입구에서부터 알은 체를 했는데
골목이 딴전을 피운다
바람이 저글링 하던 검은 비닐봉지가 골목의 오후를 툭툭 치며 돌아다닌다
민달팽이가
사철나무 울타리 그늘에 꼼짝없이 붙들려 있다
허기진 저녁에 풍덩 발을 담그면
서너 집 건너 악다구니로 싸우는 소리, 집어 던진 세간들 쨍, 짱, 탁, 부딪히는 소리, 흐느껴 울다가 까르르 웃는 소리, 한껏 볼륨을 높이고 달려오는 라디오 소리
그리고 빈집에 삼상오오 모여 골목의 안색을 살피며
본드를 불던 아이들
재개발지구 지정 안내판이 들어서자
집들은 하나 둘 떠나갔다
골목도 이제 남은 골목을 거의 다 써버린 듯하다
중학교 때
여기 사는 게 부끄러워
친구들에게 골목에 대해 부풀려 말한 적이 있다
일기에보에 우박이 내린다고 했는데
섬모 같은 빗줄기가 비칠거린다
검은 비닐봉지가 맨홀 뚜껑 위에 납작 엎드린다
철거 딱지가 붙은 판잣집이, 거웃만 가린 담장이, 무당집 붉은 깃발이 젖는다
나팔꽃이 담장을 넘다가 들킨 자리에
우두커니 젖는다
저녁의 골목을 내려갔다
비 맞은 검은 비닐봉지와 사철나무와 민달팽이와 판잣집과 무당집 깃발과 나팔꽃과 바바리맨을 데리고
부스럼투성이 잡귀가 되어
뿌연 어둠을 일으키며 내려간다
나는 아직 이 골목에 소속되어 있다
김쿼파 씨의 메일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임경묵
김쿼파 씨,
외롭고 쓸쓸한 저에게 정기적으로 메일을 보내 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당신의 메일을 읽을 수가 없군요, 아니, 솔직히 읽을 용기가 나질 않아요. 당신의 메일은 스팸 메일함에서 오늘도 이렇게 나의 클릭을 기다리는데 말이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요, 김쿼파 씨, 혹시 제가 아는 분인가요? 저도 용기가 나질 않아서 한때 닉네임으로 첫사랑에게 메일을 보낸 적이 있었거든요, 물론 답장을 받지 못했지만..... 어떤 날은 ‘박키고’, 어떤 날은 ‘최스란’, 어떤 날은 ‘목풀리’인 당신 이름은 너무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워서 이 세상 어디에서도 검색되지 않는 내 첫사랑을 닮았어요. FM93.1 <세상의 모든 음악>에서 흘러나오는 폴란드 가수의 우울사한 노래를 듣는 저녁, 문득 내 첫사랑은 동유럽 끝없는 초원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하면서 당신이 보낸 메일에 커서를 올려놓고 클릭을 망설입니다. 이미지만으로 구성되었다는 메일 미리보기 정보는 당신의 존재와 당신이 계신 곳을 더욱 궁금하게 합니다. 당신이 만약 내 첫사랑이라면 세상의 모든 음악을 사랑하고, 집시처럼 세상의 모든 나라를 떠돌기 좋아내서 세상의 모든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나에게 메일을 보냈을 거라고 믿고 싶어요, 하지만 당신이 보낸 메일은 클릭할 수가 없군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폴란드 가수의 우울한 노래를 듣는 저녁, 오늘은 우박이 내려서 조금 서둘러 퇴근하기로 했어요. 김쿼파 씨, 당신이 계신 곳도 10월에 단풍이 붉고, 가끔 우박이 내리나요?
혹시, 너......옥분이 아니니?
시집< 체 게바라 치킨집> 중에서
# 임경묵 # 시집<체 게바라 치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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