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년 역사의 숨결을 간직한 오이도

시민들이 보존한 유적, 개발 막아내고 공원조성까지/시민주도로 만들어가는 친근한 역사 공원

민정례 | 기사입력 2018/07/04 [17:43]

수천 년 역사의 숨결을 간직한 오이도

시민들이 보존한 유적, 개발 막아내고 공원조성까지/시민주도로 만들어가는 친근한 역사 공원

민정례 | 입력 : 2018/07/04 [17:43]

시민들이 보존한 유적, 개발 막아내고 공원조성까지

시민주도로 만들어가는 친근한 역사 공원

 
1만년 전 신석기 시대를 살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능곡동에 신석기 유적지가 위치한, 장현동을 바라보는 야트막한 구릉은 산을 등지고 해가 잘드는 곳이다. 신석기인들은 그곳에 움집을 짓고 살면서 산에서 들짐승을 사냥하고 열매를 따먹으며 생활했다. 작지만 농사도 짓고 집안에 화덕에서 음식을 익혀 먹었다. 사방에 먹을 것이 있는 봄, 여름, 가을을 보냈다. 겨울이 오면 능곡동의 신석기인들은 배를 타고 오이도로 건너가 조개와 굴을 캐먹었다. 그러다 날이 따뜻해지면 그동안 사용했던 빗살무늬 토기 등은 그곳에 버리고 다시 배를 타고 능곡동 일대 집으로 돌아와 봄, 여름, 가을을 났다.
 
흔히 역사 교과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기술되어 있다. ‘기원전 8000년 경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수렵, 채집과 함께 농경과 목축을 하면서 정착생활을 하게 됐다. 주로 움집에서 생활했고, 화덕을 사용했으며  농작물을 저장하기 위해 토기를 만들어 사용했는데 우리나라에는 주로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된다’
건조하게 기술된 교과서 특유의 문체는 상상력을 지우고 그저 암기해야 할 문장으로 남는다. 내 집 앞에 있음에도 저 공원이 교과서에 나오는 ‘그 신석기’ 유물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오이도 주민들 역시 신석기부터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물들과 같이 생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이도 전체가 거대한 패총 유적지일거라는 추정까지 나온다. 이렇듯 시간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오이도에 선사유적공원이 지난 4월10일 개장했다. 내부를 가려놓았던 가림막을 철거하고 16년 만에 모습을 공개했다. 개장 이후 두 달. 공원에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6월 녹색을 머금은 풀들이 허리춤까지 자랐고 연둣빛 잔디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한때는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사라질 뻔했지만 시민들의 힘으로 지켜내고 국가사적으로 지정되고 공원이 만들어지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으며 긴 시간을 견뎌온 오이도선사유적공원을 다녀왔다.
 
 
‘당산나무 함부러 건들지 말라’ 시민들이 보존한 유적지
 
오이도에 선사시대 유물 발굴을 본격화한 것은 1990년대로 비교적 최근이다. 오이도 유물이 이슈가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땅을 소유하고 있던 수자원공사가 개발계획을 세우면서부터다. 시화공단이 개발되고 오이도가 육지화되면서 수자원공사는 고급빌라단지를 계획했다. 그곳에 살던 원주민들과 시민단체가 자발적으로 문화재 보존운동을 하면서 문화재 조사 및 발굴을 요구했다.
 
오이도에 역사적인 유물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은 예전부터 있어 왔다. 동네 사람들도 갯벌에서 조개를 캐거나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를 할 때 그물에 걸려 딸려온 오래된 그릇들을 종종 발견하곤 했다. 그것이 역사적인 가치가 높은 유물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쓰레기라 생각해 다시 던져 버리진 않았을 것이다. 
 
처음 학계에 보고된 것은 1960년대이다. 오이도에 패총 유적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일제시대에 일본인 학자가 남겨놓은 기록을 토대로 명지대 학자들이 조사해 학계에 보고했다. 그때 발견됐던 토기들 중 일부는 명지대에 전시돼 있다.
 
시화공단이 만들어지고 오이도가 육지로 연결되면서 수자원공사에서 개발계획을 세우자 오이도 원주민들과 시민들과 함께 개발을 막아내고 문화재 보존운동을 펼쳤다. 당시 시흥YMCA 소속으로 오이도 사람들과 함께 문화재보존운동을 했던 임병준 씨는 “오이도 주민이 당산나무로 데려가더라고요. 여기 이 자리부터 마을까지 쭉 파기만 하면 뭔가 나올 거라고요. 사실 다들 확인은 없었어요. 근데 발굴이 시작되니 막 나오는 거에요”라며 그때를 회상했다.
 
직접 포크레인 앞을 막아서 공사를 중단시키기도 하는 등 오이도를 지키고 보존하기 위한 동네 사람들의 의지는 매우 높았다. 여기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한참 공사가 진행되고 있을 때 동네 사람들이 포크레인 기사에게 얘기한 것이 “저 당산나무는 건들지 말아라, 함부로 손댔다가는 3대가 힘들 것이다” 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포크레인 기사는 차마 당산나무는 건들지 못하고 주변만 다졌다는 이야기다. 그 당산나무는 불에 타서 밑동만 남아 있지만 왼쪽에 후계목이 자라고 있다.
 
주민들의 격렬한 개발 반대 분위기 속에서 이뤄진 발굴 조사에서 신석기 유적들이 다량 발굴됐다. 결국 수자원공사는 사업을 포기했고 오이도는 포크레인의 무자비한 갈퀴로부터 지켜낼 수 있었다.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은 ‘오이도 유적의 가치는 학술적인 것보다 시민들에 의해 지켜지고 보존된 유적이라는데 더 많은 의의가 있다’고 평했다.
 
김대홍 시흥시 오이도박물관팀장은 “80~90년대만 해도 경제개발의 논리가 우선시되는 시기였고 많은 문화유적들이 파괴되었는데 시민들의 힘으로 지켜냈다는 것이 대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오이도선사유적공원     ©민정례

 
 
중부 서해안 지역 대표적 선사유적지
 
시흥에는 능곡동에 신석기 유적이 또 있다. 현재 아파트 건설이 한창인 장현지구 택지개발 초기에도 유물이 발견돼 발굴조사를 하는 곳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능곡동과 시흥시청 사이, 능곡동에서 하중동 방향으로 가는 산에도 그렇고 땅을 다지는 곳은 대부분 유적지 발굴 조사 표시가 있었다. ‘혹시 시흥시 전체가 신석기 유적지가 아닐까. 건설업자들이 그냥 묻었거나, 혹은 지금도 아파트 밑에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글의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오이도 조개더미 유적은 능곡동 신석기 공원과도 연결된다. 햇빛이 잘 비치는 경사면에 움집을 지어 살던 신석기인들이 겨울이 되면 오이도에 배를 타고 와서 조개를 먹었고, 봄이 되면 다시 돌아갔다는 이야기다. 그들이 이동할 때 번거로워 버리고 갔던 조개껍질이나 토기들이 지금 우리가 발견하는 유물들이다. 배를 타고 이동했을 거라는 추정은 유골의 형태를 통해서다. 보통 수영이나 잠수를 많이 하면 귀 안쪽에 연골같은 것이 생겨 물을 막아주는 기능을 한다. 해녀나 수영을 많이 하는 사람들의 귀에서 많이 발견되는데 신석기 시대 동해나 남해 쪽 유골에는 이러한 연골이 발견되는데 능곡동에서 발굴된 유골에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실제로 오이도에는 주거지가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도 배를 타고 이동했을 거라고 추정하는 단서이다.
 

▲패총전시관에 복원해놓은 집자리유적은 능곡동의 움집을 본뜬 것이라고 한다.     ©민정례

 
한편 1988년 서울대 박물관 팀이 진행한 1차 발굴 조사에서 뼈화살촉 등 4백여 점의 신석기 유물이 발견됐다. 빗살무늬 토기가 대부분이었고, 마제 돌도끼, 돌화살촉 등이 함께 발견됐다. 2001년까지 이어진 조사에서는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 초기철기시대의 점토대토기, 삼국시대의 타날문토기, 통일신라시대의 인화문토기 등이 발견됐다. 
 
이렇듯 신석기부터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고려 조선까지 단절없이 인간의 활동을 담은 유물들이 발견되어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중부 서해안 지역의 해안생활상 복원에 최종의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역사와 시민의 손길이 어우러진 공원
 
오이도 선사유적공원’이라는 명칭을 들으면 얼핏 박물관이 생각날 것이다.(필자는 박물관이 포함된 공원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것은 아마도 중요한 단어들을 나열하듯 명칭을 붙여서일 것이다. 오이도 선사유적공원이라는 명칭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자. ‘선사’ 즉, 문자로 기록된 역사 시대 이전의 시기이다. 또 하나 ‘공원’이 있다. 단순히 유물과 유적만 덩그러니 있는 것이 아닌 그 모든 것들을 포함한 공원이다. 그래서 교육장이 있고, 잔디밭이 있고, 야영장과 체험관이 있고, 야외 공연장이 있으며 산책로가 있다. 종합해 보면 역사시대 이전 신석기, 청동기, 초기철기시대인 선사시대의 유적과 유물을 주제로 한 ‘공원’이다.
 
양쪽에 억새가 심어진 작은 길을 따라 걷다보면 작은 언덕을 올라 패총 전시관에 이른다. 건물의 앞 뒤가 구분되어 있듯 패총전시관을 기준으로 공원은 앞 뒤가 분명하다. 앞쪽이 야트막한 잔디밭과 교육장이라면 뒷면은 숨가쁘지 않은 산책로이자 경사를 따라 자연스러운 야외공연장이 조성돼 있다.
 

▲오이도선사유적공원 야외공연장     ©민정례

 
오이도 선사유적공원의 특징은 역사적 사건 및 유물 특징만 딱딱하게 전달하는 기존의 박물관이나 공원과는 달리 대중화에 힘썼다. 김대홍 팀장은 “문화유적지들이 보존에만 신경을 쓰다보니 대중과 유리되는 측면이 있는데 여기는 시민들이 이용하고 즐길 수 있는 시설들 위주로 조성해 친근한 공원이 될 수 있도록 애썼다”라고 말했다. 
공원 안에는 교육동 5곳, 공연장 1곳, 야외공연장과 패총전시관이 있다. 그리고 땅을 보존하기 위해 예전 마을에서 사용하던 길을 최대한 살린 산책로가 있다. 외형은 잘 갖추어져 있는 오이도 공원의 남은 과제는 운영이다. 시흥시는 시민 주도로 운영되는 공원을 만들어 나가고자 고심하고 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것이 시민전문강사들의 활동이다. 시민강사들을 섭외해 선사유적공원에 걸맞는 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하는 것이다. 현재 유아부터 성인이 참여할 수 있는 여섯 개의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지역브랜드 이미지를 활용한 창작 체험교실, 신석기 문화와 연계한 동화구연 및 역할극 놀이, 공원탐방 활동, 매듭공예, 사진교실 등이다. 
 
민정례 기자 suguk03@naver.com
 
 
 이 기사는 마을잡지 슬슬 6월호에도 게재되었습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주간베스트 TOP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