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인가, 부처인가
동우 | 입력 : 2017/10/21 [14:19]
당나라 때 선승인 단하 천연(丹霞 天然)스님이 어느 겨울날 낙양의 혜림사에 들러 하루를 묵게 되었다. 허름한 객승에게 추운 방을 내어주자, 추위에 떨다 못한 스님은 법당에 모셔져 있는 목불(木佛)을 쪼개어 방에 불을 지폈다.
이에 깜짝 놀란 절의 원주스님은 난리가 났다.
그러자 천연스님은 천연스럽게 말했다.
“부처를 태워 사리를 얻으려고 하오.”
“목불에 무슨 사리가 나온단 말입니까?”
“사리도 나오지 않는 부처라면 그냥 나무일 뿐이니, 모셔 놓아야 무슨 소용인가. 저기 남은 두 불상도 마저 태워야겠군.”
불교 안에서 선가(禪家)의 파격은 위험하지만 때로 통쾌하다. 우리가 속고 있는 것을 쿡 꼬집기도 하고, 뒤통수를 냅다 후려치기도 한다.
손님을 추운 방에 재우는 그 심보는 불상에 예배하는 그 마음과 하나인가, 둘인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자신의 교조에게 이렇게 살벌한 종교는 없을 테지만, 모든 분별 망상과 집착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궁극의 일침일 것이다. 어떤 생각에든지 사로잡혀 있으면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다. 스스로가 세운 보이지 않는 관념들에 묶여 정작 곁에 있는 부처가 추위에 떨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金佛不度爐 금부처는 용광로를 건너지 못하고
木佛不度火 나무부처는 불을 이기지 못하며
泥佛不度水 흙부처는 물을 건너지 못한다네
眞佛內裡坐 참부처는 내 안에 앉아계시니
불상에 절하는 것을 혹자들은 우상 숭배라 비난하지만, 어느 누구보다 우상 만드는 것을 사무치게 우려한 분들이 바로 부처님이요, 역대 조사스님들이다.
그러나 위의 조주스님과 같은 노래를 부를 수 있으려면 어중간한 종교적 냉소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부술 줄만 알고 세울 줄은 모른다면 그 또한 치우친 집착일 테니 말이다.
그러니 과연 자신의 형편에 마음 깊숙이 치우친 곳을 살펴보는 수밖에….
단하스님이 남긴 게송 중에서 불성(佛性)을 구슬에 비유한 완주음(翫珠吟)의 한 구절이다.
識得衣中寶 옷 속의 보배를 알아내면
無明醉自醒 어리석음의 취기에서 저절로 깨어난다
百骸俱潰散 백골은 모두 무너져 없어지지만
一物鎭長靈 한 물건은 영원히 신령하도다
知境渾非體 대상경계를 알아도 모두 실체는 아니요
尋珠不見形 구슬을 찾아도 형체는 보지 못한다네
停心息意珠常在 마음 멈추고 뜻을 쉬면 구슬은 항상 있나니
莫向途中別問人 길에 나서서 따로이 다른 사람에게 묻지 말라
단하선사 또한 부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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