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대포 한잔 하다가 누가 지리산 이야기를 하면 나는 시익 웃는다. 얘기하던 사람이 기분이 언짢은 듯 이유를 물어 본다. 나는 지리산을 백번도 더 갔으니 감회가 남달라서 그런다고 하면 별로 다음 이야기를 못한다. 괜히 그랬나 보다. 종주도 수 십 번 했으니 지리산이 질릴 만도 한데 지금도 가고 싶다. 머지않아 갈 거다. 안 믿을테니 지금부터라도 천왕봉을 백번은 더 가서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가능하면 사진도 많이 찍어와 다른 사람들이 구경도 하게하고 코스도 다른 사람이 참고 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
왜 지리산에 꽂혀 버렸는지 나도 모르겠다. 오죽하면 한개가 나를 ‘지산’이라고 했겠는가!
천왕봉에서 대원사 계곡으로 하산 길을 잡다!
어릴 때 소풍가는 기분 이었나보다. 저녁 8시 30분에 모이라고 했는데 다들 약속이나 한 듯이 8시에 모였다. 일찍 모이니 준비도 빨랐고, 출발도 빨랐다. 작년에도 수원역 열차 대합실에서 한 시간 넘게 기다렸는데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더 더군다나 신천동 삼미시장 앞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1분도 안되어 우리가 타고 갈 차가 오니 꼭 좋은 일만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해마다 지리산을 다녀오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그것도 종주로. 지리산 종주 산행은 나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심신단련이니 스트레스 해소니 하는 것 외에 나만의 특별한 건강검진인 것이다. 꼭 병원에 가지 않더라도 해가 바뀌면서 내 몸에 이상은 없는지 예전과 비교해 체력이 떨어진 것은 아닌지 확인이 되는 것이다. 다만, 누가 상주는 것도 아니고 기록 갱신이 가능한 것도 아니니 무리해서 경주하듯이 산행을 하지는 않고, 체력에 맞게 힘닿는 만큼만 체력을 안배한다.
▲ 7월 5일 아침 세석대피소에서 천왕봉으로 향하여 출발하기 전 ©김광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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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에서 구례구역까지는 네 시간이 조금 안 걸리는데 열차를 타고 맥주 한 캔을 마시고는 계속 잠들었으니 족히 세 시간은 푹 잔 것 같다. 7월 4일 새벽 세시가 좀 넘어 재첩국과 밥으로 이른 아침을 때우고 택시로 성삼재에 오르니 네 시 삼십 분 가량 되었다. 남부지방이 장마권에 들어 걱정을 하긴 했지만, 열차에서 내릴 때부터 비는 주룩 주룩 내리었으니 오늘 하루 종일 비 맞을 각오를 단단히 했다.
어둠에 헤드랜턴을 켜고 비는 맞아가면서 노고단을 오르지만 좋은 분들과 동행하는 산행이니 발걸음이 가볍다. 여러 번 다니다 보니 노고단 대피소도 노고단 갈림길도 돼지령도 임걸령도 사진 한 장 없이 그냥 지나친다. 삼도봉에 올라 잠시 쉬면서 아름다운 운해 사진도 찍었다.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쉬는 것도 박하게, 사진 촬영도 별로 없이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오늘의 숙소인 세석 대피소에 너무 일찍 도착하게 되고 저녁 식사하고 나면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비를 계속 맞으니 쉬고 싶지 않았고 연하천 대피소에서 점심을 먹는데 10시도 안 되었으니 아무리 천천히 간다 해도 시간이 널널하다.
저녁 먹기 전 계곡에 들어가 비누 없이 샤워를 했다. 지친 몸이지만 날아갈 듯한 기분이다. 대피소의 안내 내용은 식기 설거지 금지. 비누와 치약 사용 금지일 뿐 계곡에 들어가는 것 까지는 막지 않는다. 김치찌개에 햇반을 데워 식사를 했다.
식사 후 산책을 하고도 잠은 충분히 잘 수 있었다.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이 오늘 날씨는 쾌청이다. 아침에 전투식량으로 식사를 하고 천왕봉을 향했다. 세석에서 장터목까지는 환상의 길이다. 종종 경사가 심하고 계단도 있지만 코스 자체가 매우 아름답고 운치가 있는 길이다. 주변 경치도 일품이다. 촛대봉 연하봉 등 중간 중간에 올라선 봉우리들에서는 멀리 반야봉이 보이고 우리가 지나온 길들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 연하봉에서(왼쪽 어깨 뒤로 반야봉이 보였는데 순식간에 가려진 모습) ©김광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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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을 오르니 여러 번 왔어도 감회는 항상 다르다. 아니 항상 좋다. 아니 항상 기쁘다. 토요일이어서인지 정상에 사람들이 꽤 많다. 단체로 온 분들도 있는 것 같다. 기다리다 사진 한 컷 찍고 하산했다. 중봉과 치발목산장을 거쳐 대원사계곡인 유평으로 하산하는 코스이다. 요즘에는 종주하기 위해 차를 타고 성삼재까지 올라오는데 본래 제대로 종주하려면 화엄사에서 대원사까지 가는 코스를 화대종주라 하여 이것만 인정해 준다. 80년대에도 화엄사에서 천왕봉 찍고 중산리로 내려갔을 뿐이다.
처음 가는 코스이기도 하지만 역시 길이 길고, 험하고, 어렵다. 칠선계곡보다도 더 긴 것 같다. 새재와 유평 갈림길에서 유평 방향은 완전 원시림에 가깝다. 길에서 교행도 어렵지만 혼자서도 팔에 나뭇가지들이 걸린다.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은 흔적인 것이다. 얼마 전 곰배령에서 실망했던 것을 충분히 만회했다. 지리산에는 곰배령보다 10배나 아름답고 멋있는 지역이 10 곳도 넘는다. 곰배령을 왜 그렇게 홍보했는지. 왜 또한 통제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
시흥에서 살다가 유평에서 식당과 팬션을 하는 갑을식당의 강호영 선배가 계신다. 오랜만에 만나 반갑게 해후하고 예의 주연에 빠졌다. 닭볶음탕에 맥주와 소주를 거나하게 마시고, 흙돼지 삼결살에 어제 미흡했던 술을 원 없이 마셨다. 산에 있는 온갖 귀한 산나물에 묻혀 상추와 깻잎 등은 치워버렸다. 죽순, 당귀, 곰취, 고사리 등등 이루 다 열거할 수 가 없다. 아침은 송이와 다슬기를 넣고 끓인 수제비와 역시 온갖 산나물. 집에서 담근 동동주로 해장. 황제도 부럽지 않을 조찬을 하고 여승들만 계시는 대원사를 구경하고 진주로 나갔다가 인천을 거쳐 귀향했다.
지리산은 나에게 삶의 존재의식을 일깨워 주는 곳이며, 삶의 가치를 느끼게 해 주는 산이다. 그래서 지리산에 간다. 우주의 원리를 깨달을 수 있을 것도 같다. 사람이 똑같은 일을 백번을 하면 그 방면에 도사가 된다고 한다. ‘讀書百遍義自見’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천왕봉을 백번을 오르면 天道도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앞으로도 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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