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조선(有明朝鮮), 주전(主戰)과 주화(主和)의 틈에서 갈팡질팡하다

남한산성으로 맹자학당 역사기행을 가다

최영숙 | 기사입력 2015/07/06 [22:02]

유명조선(有明朝鮮), 주전(主戰)과 주화(主和)의 틈에서 갈팡질팡하다

남한산성으로 맹자학당 역사기행을 가다

최영숙 | 입력 : 2015/07/06 [22:02]

 

▲ 수어장대     ©최영숙

 

'유명조선(有明朝鮮), 주전(主戰)과 주화(主和)의 틈에서 갈팡질팡하다'라는 주제로 심우일 맹자학당 훈장의 안내로 남한산성 맹자기행을 나섰다.

 

유명조선(有明朝鮮)이란 '명나라에 있는 조선' 이나 '명나라에 속한 조선'을 의미한다. 비석에 쓰인 유명조선은 명나라가 멸망(1644)하고 난 뒤 17세기 이후의 비문에 등장했다. 청나라에 비록 항복했지만 우리 조선은 명나라에 속해있다는 표시였다.

 

2015년 6월 27일 오전 8시 소래고를 출발해서 삼전도청태종공덕비-남한산성-남문-수어장대-서문-연주봉옹성-북문-옥정사지-현절사-김상헌 묘까지 답사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은 1636년 병자년 12월 2일 청태종이 명을 공격하기 이전에 배후의 안전을 확보할 목적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청군은 파죽지세로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넜다. 그리고 선양을 떠난 지 10여일 만에 개성을 지나 서울 근교에 다다랐다. 인조와 조정이 12월 14일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남한산성에서 항전하였으나 청의 포위로 인한 굶주림과 추위, 왕실이 피난한 강화도의 함락, 남한산성의 포위를 풀기 위한 근왕병의 작전 등이 실패했다. 1637년 1월30일 인조는 청태종 앞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즉 ‘세 번 절하고 아홉 번이나 무릎을 꿇은 의식"을 하고 항복했다. 병자호란은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명청교체기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며, 조선으로서는 짧은 전쟁 기간에도 불구하고 전쟁 포로로 수 십 만의 백성이 청으로 끌려가 그 사회적 피해가 유례없이 막심하였다.

 

답사를 하면서 병자호란의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 2007년 6월 17일 인조 제향을 드리다     © 최영숙


청태종의 군대가 압록강 국경을 건넌 1636년 12월 9일 날짜의 조선왕조실록을 보았다.

 

인조 33권, 14년(1636 병자 / 명 숭정(崇禎) 9년) 12월 9일(기묘) 1번째기사 

왕세자가 인열 왕비의 소상제를 행하다. 새벽에 왕세자가 인열 왕비(仁烈王妃)의 소상제(小祥祭)를 숙녕전(肅寧殿)에서 행하였는데, 백관이 돈화문(敦化門) 내정(內庭)에 동서로 나뉘어 서열대로 섰다.

 

국가존망이 위급에 달려있었으나 실록에서는 그 전조를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누란지위(累卵之危)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청나라의 침략 속도는 실록을 읽는 것만으로도 숨이 찼다.

 

인조 33권, 14년(1636 병자 / 명 숭정(崇禎) 9년) 12월 13일(계미) 1번째기사

도원수 김자점이 적병이 안주에 이르렀다고 치계하자 이에 대해 논의하다

 

▲ 인조가 들어갔던 남한산성 남문     ©최영숙

 

 인조 33권, 14년(1636 병자 / 명 숭정(崇禎) 9년) 12월 14일(갑신) 3번째기사

최명길에게 강화를 청하게 하고 상은 남한산성에 도착, 강도로 가기로 결정하다

 

상이 돌아와 수구문(水溝門)을 통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향했다. 이때 변란이 창졸 간에 일어났으므로 시신(侍臣) 중에는 간혹 도보로 따르는 자도 있었으며, 성 안 백성은 부자·형제·부부가 서로 흩어져 그들의 통곡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

대가가 새벽에 산성을 출발하여 강도로 향하려 하였다. 이때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쳐서 산길이 얼어붙어 미끄러워 말이 발을 디디지 못하였으므로, 상이 말에서 내려 걸었다. 초경이 지나서 대가가 남한산성에 도착하였다.

 

인조 33권, 14년(1636 병자 / 명 숭정(崇禎) 9년) 12월 15일(을유) 2번째기사 

최명길이 적진에서 돌아와 강화에 대한 일을 계달하면서 적이 왕제(王弟) 및 대신을 인질로 삼기를 요구한다고 하였다. 이에 능봉수(綾峯守) 칭(偁)을 왕의 아우라 칭하고 판서 심집(沈諿)을 대신의 직함으로 가칭(假稱)하여 보낼 것을 의논하였다.

 

인조 33권, 14년(1636 병자 / 명 숭정(崇禎) 9년) 12월 16일(병술) 4번째기사

가짜 왕제와 대신을 보낸 것이 탄로나 박난영이 오랑캐에게 죽임을 당하다

 

조선은 정묘년에도 가짜 왕자를 보내 들통 났던 과오를 되풀이해 조선을 위해 청의 진영에서 목숨을 걸고 도왔던 박난영을 잃었다. 같은 조선인으로 청나라의 통역관으로 있었던 정명수는 조선에서 가짜 왕제와 대신을 보낸 것을 밝혀내 왕제에서 소헌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가게 됐다. 

 

▲ 남한산성     ©최영숙

 

주전파의 김상헌과 주화파 최명길의 대립은 극심했다.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인조 33권, 14년(1636 병자 / 명 숭정(崇禎) 9년) 12월 17일(정해) 4번째기사

예조 판서 김상헌이 화의의 부당함을 극언하다

 

인조 33권, 14년(1636 병자 / 명 숭정(崇禎) 9년) 12월 18일(무자) 4번째기사

 전 참봉 심광수가 최명길을 베길 청하다. 하교하여 전승의 결의를 다지다.

상이 행궁의 남문에 거둥하여 백관을 교유(敎諭)하였다. 전 참봉 심광수(沈光洙)가 땅에 엎드려, 한 사람을 목 베어 화의를 끊고 백성들에게 사과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하문하기를, “그 한 사람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니, 대답하기를,“최명길입니다.”하자, 상이 유시하기를, “너의 뜻은 내가 이미 알고 있다.”

하였다. 이때 최명길이 반열(班列)에 있다가 그 말을 듣고는 바로 자리를 피하였다

 

끝까지 목숨을 걸고 항쟁하자는 주전파의 김상헌, 화의를 청하는 최명길을 반상에 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봉수는 목 베기를 청하고 최명길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는 모습을 보면서 최명길이 서 있던 자리가 얼마나 위태로웠는가를 알 수 있었다.

 

이때에 인조는 병자호란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덕이 없어 이 같은 비운(否運)을 만나 노로(奴虜)가 침략하였다. 정묘년에 변란이 생겼을 때에 임시방편으로 강화를 허락하여 치욕을 달게 받아들였으나 이는 부득이한 계책으로서 마음은 역시 편치 않았다. 이번에 오랑캐가 대호(大號)를 참칭하고 우리나라를 업신여기므로 내가 천하의 대의를 위해 그들의 사자(使者)를 단호히 배척하였으니, 이것이 화란이 발생하게 된 원인이다."

 

▲ 남한산성 암문     ©최영숙

 

인조가 친히 화란의 원인이라고 칭한 일들을 보기 위해 8개월 전의 조선왕조실록을 보았다.

 

인조 32권, 14년(1636 병자 / 명 숭정(崇禎) 9년) 2월 16일(신묘) 1번째기사

용골대, 마부대 등이 서달의 차인을 거느리고 오다

 

인조 32권, 14년(1636 병자 / 명 숭정(崇禎) 9년) 2월 21일(병신) 1번째기사

홍익한이 금한을 배척하고 명분을 세울 것을 상소하다

 

“그대의 나라를 위한 정성을 가상하게 여긴다. 사신을 참하라고 진달한 것은 이른 것 같다. 형세를 보아가며 처리해도 늦지 않다.” 하였다.

 

청나라의 용골대가 사신으로 왔는데 조성에서는 사신을 참하라고 청한다. 또한 용골대가 가져온 문서를 거부했다.

 

서달이 일시에 한목소리로 말하기를,

“명나라가 덕을 잃어 북경만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들은 금나라에 귀순하여 부귀를 누릴 것이다. 귀국이 금나라와 의를 맺어 형제국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금한이 황제 자리에 오른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기뻐할 것이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이처럼 굳게 거절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였다. 이에 제관이 군신간의 대의로써 물리치자, 용호가 성이 나서 고산 등의 봉서를 도로 가져가며 말하기를, "내일 돌아가겠다. 말을 주면 타고 갈 것이고 주지 않으면 걸어서 가겠다.”

 

▲ 남한산성에서 휴식을 취하는 시민들     ©최영숙

 

 인조 32권, 14년(1636 병자 / 명 숭정(崇禎) 9년) 2월 25일(경자) 1번째기사

태학생 김수홍·유학 이기형 등이 금 사신을 참하라고 아뢰다

 

인조 32권, 14년(1636 병자 / 명 숭정(崇禎) 9년) 2월 26일(신축) 2번째기사 

용호 등을 접견하는 문제로 의견이 대립되자, 용호가 성이 나서 돌아가다. 이에 난영을 보내어 용호를 따라 모화관에 가서 굳이 만류하였다.

 

용호가 말하기를,

“우리들은 별서(別書)를 받지 않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만일 열어 보기를 허락한다면 마땅히 도로 들어가겠다.” 하였다. 마침내 다시 무신 및 역관을 보내어 부르기 위하여 벽제(碧蹄)까지 따라 갔으나 용호 등이 끝내 오지 않았다. 그들이 성을 나갈 때에 구경하는 관중이 길을 메웠는데, 여러 아이들이 기와 조각과 돌을 던지며 욕을 하기도 하였다.

 

▲ 남한산성에서 바라본 삼전도비가 있는 방향. 제2롯데월드가 보여서 가름하기가 좋았다.     © 최영숙

  

조선은 청의 국서를 받기를 거부하고, 더불어 청의 사자를 참하라 하고, 청의 사신들이 돌아갈 때 조선의 백성들은 돌을 던졌다. 또한 명을 돕고 청을 대비하라는 평안감사에게 가는 문서를 빼앗기기 까지 했다. 이때 돌팔매를 맞았던 용골대는  9개월 후 조선을 선봉대로 침략하여 조선의 강토를 점령하고 백성들을 도륙했다. 

 

여기에 더불어 조선의 사신들은 청태종의 황제 즉위식에서 최악의 외교 결례를 범한다.

 

청태종10년(1636년)4월 청태종은 황제로 칭한다. 국호를 대청으로 바꾸고 연호를 숭덕으로 정한다. 조선은 청태종의 황제 즉위식에 당시 심양에 체류하고 있던 등이 참석했다. 그런데 황제에 대한 대례를 거행할 때 나덕헌과 이곽은 무릎을 꿇는 것을 거절하여 청태종은 격노한다. 이것은 조선 국왕이 일부러 무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조선에 국서를 보낸다. 그러나 춘신사(春信使) 나덕헌, 회답사(回答使) 이곽은 국서를 보고 잡물 속에 버리고 온다.

 

황제 즉위식에 참석한 사절이 다른 나라 사신들이 모두 표하는 예를 표하지 않음으로 청나라에서 가장 뜻 깊은 황제 즉위식을 엉망으로 만든 것이다. 이는 후에 인조가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즉 ‘세 번 절하고 아홉 번이나 무릎을 꿇은 의식"을 하고 항복하게 했다.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는 것이 사신의 도리인데 오히려 국가를 위험에 처하게 한 것이다. 

 

▲ 남한산성을 걷다     ©최영숙

 

그때의 일을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인조 32권, 14년(1636 병자 / 명 숭정(崇禎) 9년) 4월 26일(경자) 2번째기사

금나라의 참호 문제로 춘신사·평안 감사·비변사 등이 의견이 대립하다

 

“나덕헌·이곽 등의 장계의 사연과 등출한 적서(賊書)의 말을 보니 가슴이 찢어져 통곡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저 적이 참호를 가지고 사신을 구박하는 날 칼에 엎어져 의(義)에 죽는 일은 이 무리들에게 기대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연일 구박을 받으면서 고악(鼓樂)의 소리를 참여하여 들은 일은, 중호(衆胡)들에게 견제되어서 자유롭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고 어찌 감히 스스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참람하고 설만한 글에 이르러서는, 풀로 봉하고 단단히 싸서 즉시 열어 보지 못하고 통원보에 와서야 비로소 열어 보고 몰래 버려두었다고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특별한 거조를 하지 않는다면 예의의 나라인 우리 나라가 다 금수의 지역으로 들어가게 되어 끝내는 인심을 수습하고 사기를 고무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나덕헌과 이곽은 또 한 번 중대한 과오를 범한다. 청태종 귀국하는 조선 사신들을 통해 조선에 국서를 보냈는데, 몰래 열어보고 필사본을 쓰고 버리고 왔던 것이다. 

 

이 국서에는 청황제가 자신을 '대청황제'(大淸皇帝)라고 하고 조선을 '이국'(爾國)이라고 하면서 조선이 왕자를 보내어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大軍)으로 침략하겠다고 협박했다. 이 국서에 접한 조정은 격분하여 나덕헌 등을 유배시키고, 척화론자(斥和論者)들은 주화론자(主和論者)인 최명길(崔鳴吉)·이민구(李敏求) 등을 탄핵했다. 이러한 정세를 살펴보던 청태종은 그해 11월 조선의 사신에게 왕자와 척화론자들을 압송하지 않으면 침략하겠다고 거듭 위협했다.

 

이미 병자호란은 예견 된 일이었다. 청나라는 조선을 침략할 구실을 찾고 있었는데 조선은 국가존망위기에 의만 찾고 있었다.

 

당랑거철(螳螂拒轍)고사의 마치 커다란 수레를 막고 서 있는 사마귀와 같았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오는데 군사전문가가 아닌 문신들에 의해 명나라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는 절대적인 사대주의로 해결하려고 했다. 사마귀를 살려준 것은 장공이 가상히 여겨 비켜간 것뿐이다. 자신의 힘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폐해는 고스란히 백성에게 돌아갔다. 청나라 병사에게 죽고 ,굶어 죽고, 노예로 끌려간 수많은 이름도 없는 백성들이었다. 당해낼 수 없는 침략이었다면 외교적 수단으로 그 피해를 최소화 했어야 했다. 명분을 위해서 목숨을 걸었던 문신은 그 소신에 대한 답으로 후대의 추앙을 받았지만 민초들은 이리저리 쓸려갔던 것이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철저한 사대주의였던 것이다.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시간에 오히려 양국 관계를 악화시킨 조선은 청나라 황제의 즉위식이 끝난 뒤 8개월 후에 병자호란을 맞아 인조는 남한산성에 들고 귀순을 권유받는다.

 

▲ 남한산성에서 단체사진을 담다     ©최영숙

 

인조 34권, 15년(1637 정축 / 명 숭정(崇禎) 10년) 1월 2일(임인) 2번째기사 

귀순하라는 내용의 황제의 글과 그에 대한 의논 홍서봉·김신국·이경직 등을 오랑캐 진영에 파견하였다.

 

“대청국(大淸國)의 관온 인성 황제(寬溫仁聖皇帝)는 조선(朝鮮)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고유(誥諭)한다. 짐(朕)이 이번에 정벌하러 온 것은 원래 죽이기를 좋아하고 얻기를 탐해서가 아니다. 본래는 늘 서로 화친하려고 했는데, 그대 나라의 군신(君臣)이 먼저 불화의 단서를 야기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사신이 왕을 만나지 못하게 하여 국서(國書)를 마침내 못 보게 하였다. 그런데 짐의 사신이 우연히 그대 국왕이 평안도 관찰사에게 준 밀서(密書)를 얻었는데, 거기에 ‘정묘년 변란 때에는 임시로 속박됨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정의에 입각해 결단을 내렸으니 관문(關門)을 닫고 방비책을 가다듬을 것이며 여러 고을에 효유하여 충의로운 인사들이 각기 책략(策略)을 다하게 하라.’고 하였으며, 기타 내용은 모두 세기가 어렵다."

 

청태종의 항복 권유의 서신을 보고 

"이성구(李聖求)가 장유(張維)·최명길·이식(李植)으로 하여금 답서를 작성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인조 34권, 15년(1637 정축 / 명 숭정(崇禎) 10년) 1월 14일(갑인) 2번째기사

얼어 죽은 군졸이 나오다

 

당시 날씨가 매우 추워 성 위에 있던 군졸 가운데 얼어 죽은 자가 있었다.

 

인조 34권, 15년(1637 정축 / 명 숭정(崇禎) 10년) 1월 18일(무오) 1번째기사 

예조 판서 김상헌이 최명길이 지은 국서를 찢고 주벌을 청하다

 

인조 34권, 15년(1637 정축 / 명 숭정(崇禎) 10년) 1월 25일(을축) 1번째기사

성첩이 탄환에 맞아 모두 허물어지다

 

"대포 소리가 종일 그치지 않았는데, 성첩(城堞)이 탄환에 맞아 모두 허물어졌으므로 군사들의 마음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

 

성안의 사정은 여의치 못했다. 군사는 얼어 죽고 식량도 떨어졌다. 청태종은 항복을 권유하면서 또 한편으로 님힌신성을 공격하여 조선을 압박했다.

 

인조 34권, 15년(1637 정축 / 명 숭정(崇禎) 10년) 1월 28일(무진) 5번째기사

문서를 모아 태우다

 

제사(諸司)의 문서를 거두어 모아 모두 태웠다. 문서 가운데 간혹 적(賊)이라고 호칭한 등의 말이 탄로 나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 삼전도비     ©최영숙

 

 인조 34권, 15년(1637 정축 / 명 숭정(崇禎) 10년) 1월 30일(경오) 2번째기사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다. 서울 창경궁으로 나아가다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성 밖에 와서 상의 출성(出城)을 재촉하였다. 상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侍從)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상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왕세자와 빈궁 및 두 대군과 부인은 모두 머물러 두도록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장차 북쪽으로 데리고 가려는 목적에서였다. 상이 물러나 막차(幕次)에 들어가 빈궁을 보고, 최명길을 머물도록 해서 우선 배종(陪從)하고 호위하게 하였다. 상이 소파진(所波津)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건넜다. 당시 진졸(津卒)은 거의 모두 죽고 빈 배 두 척만이 있었는데, 백관들이 다투어 건너려고 어의(御衣)를 잡아당기기까지 하면서 배에 오르기도 하였다. 상이 건넌 뒤에, 한(汗)이 뒤따라 말을 타고 달려와 얕은 여울로 군사들을 건너게 하고, 상전(桑田)에 나아가 진(陣)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용골대로 하여금 군병을 이끌고 행차를 호위하게 하였는데, 길의 좌우를 끼고 상을 인도하여 갔다.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병조호란의 피해는 막대했다.

 

인조 34권, 15년(1637 정축 / 명 숭정(崇禎) 10년) 2월 1일(신미) 1번째기사

백관들이 모두 대궐안에 들어가다

 

이때 몽고(蒙古) 사람들이 그대로 성중(城中)에 있었다. 백관들은 모두 대궐 안에 들어가 있었는데, 여염(閭閻)이 대부분 불타고 넘어져 죽은 시체가 길거리에 이리저리 널려 있었다.

 

인조 34권, 15년(1637 정축 / 명 숭정(崇禎) 10년) 2월 3일(계유) 1번째기사 

호조가 경성의 백성들의 구휼책을 아뢰니 윤허하다

 

호조가 아뢰기를,

“경성에 사는 백성이 가장 혹독하게 화를 당해 남아 있는 자라고는 단지 10세 미만의 어린이와 나이 70이 넘은 사람들뿐인데, 대부분 굶주리고 얼어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어린이의 경우는 계사년1383) 과 갑오년1384) 의 예에 의거하여 남들이 길러 노비로 삼도록 허락하고, 늙은이는 본조에서 진휼하여 구제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인조 34권, 15년(1637 정축 / 명 숭정(崇禎) 10년) 2월 9일(기묘) 5번째기사 

대신과 최명길을 인견하여 명나라와의 문제를 논의하다. 사론 대신 및 이조 판서 최명길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즈음의 일을 가도에 비밀리에 통고하려고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명나라는 언제나 우리 나라와 오랑캐 사이에 틈이 생기도록 하려고 했는데, 지금 통고하면 필시 일을 낼 것입니다.” “지금 만약 이런 주장을 하면 조정의 이른바 사론(士論)이 반드시 벌떼처럼 일어날 것이니, 말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그렇다면 끝내 비밀리에 통보하는 것이 불가하다는 뜻인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불가합니다. 지금 백성들이 모두 화친을 배척한 사람에게 죄를 돌리는데, 지금 어떻게 섬과 통하여 다시 시끄러운 단서를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 남한산성의 옛 모습     © 최영숙

 

당시의 민심은 화친을 배척한 사람들에게 죄를 돌렸다. 

 

조선의 항복으로 조선은 가혹한 대가를 치뤘다.  세자와 대신들이 인질로 잡혀갔고, 엄청난 공물을 바쳐야 했다. 가장 가혹했던 것은 피로인이었다. 붙잡힌 사람을 뜻하는 이말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일반백성들까지 노예로 부리거나 몸값을 받아갈 요량으로 붙잡은 민간인 포로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때 끌려간 피로인은 50만명으로 추정했다. 10만 대군이 들어와서 50만의 조선인을 잡아간 것이다. 노예사냥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나만갑은 병자호란 때 공조참의의 직책을 맡았다. 남한산성의 군량미 공급을 맡았다. 그가 기록한 병자록에 따르면 피로인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적진 가운데 조선 피로인이 절반이나 되는데 그들이 무엇인가 호소하려 하면 청나라 군사가 철퇴로 때려 그 참혹한 정상을 차마 볼 수 없었다.

 

"서강(현재 서울 마포구 일대 한강의 지류)를 오가며 적진을 살펴보니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어떤 이는 벌써 살해당했고, 어떤이는 화살에 맞아 아직 목숨이 끊이지 않은 상태고, 어떤이는 전하(인조)를 쫓아오다가 잡혀 가고, 또 어떤 이는 전하를 향해 두 손을 모아 비는 등 비참한 모습 뿐이었다." 

 

▲ 장유 무덤     ©최영숙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포로로 끌려갔던 여자들을 환향녀, 화냥년이라고 불렀다. 환국하거나 쇄환사를 통해 조선으로 귀국하면서 이들의 실절 문제가 대두되었다. 1638년(인조 16) 최명길은 최초로 환향녀들의 이혼을 반대하는 주장을 하였다. 이어 환향녀, 화냥년 등의 비하 역시 금지할 것을 상소하였다.

 

후에 그의 친구이자 효종의 장인이기도 했던 신풍부원군 장유는 그의 며느리인 한이겸(韓履謙)의 딸 한씨의 문제를 들어 개취 문제를 결정하여 달라고 예조(禮曹)에 청원하였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의 군대에 끌려갔던 한씨는 생환해 돌아왔고 장유는 이에 예조에서는 문제를 해결하기 곤란하다고 의정(議政)들이 처결할 문제라고 미루었다. 그러자 최명길은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갔다가 풀려나거나 되돌아온 부녀문제의 해결책에 준하여 속환된 부녀들은 이혼하지 않고 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대소신려들이 정사를 잘못 보필하여 부녀자들이 끌려간 것이지 부녀자들이 악의를 품고 간통한 것은 아니라며 이혼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장유는 부녀가 정조를 잃었으므로 사대부 집안에서 선조의 제사를 모시게 할 수 없으며, 누구의 자손인지 알수 없는 아이를 자손으로 기를 수 없으므로 이혼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명길은 속환된 사족(士族) 부녀가 한두 사람이 아니고 모두 정조를 잃은 것도 아니며, 만일 이혼을 명하면 지아비들이 자기 처를 속환해오지 않을 것이므로 많은 부녀가 타국의 혼귀가 된다며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유가 사망하고 그 부인이 다시 이 내용을 상소하니 왕은 "꼭 한 사람만 허가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예가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재취를 허락했다.  장유 며느리는 결국 이혼을 당했다.

 

조선의 여인들은 평생을 삼부종사를 했다. 아버지와 남편, 아들을 따랐던 여인들이었다. 이들이 청나라에 잡혀가서 돌아올 길은 멀었고, 돌아와서도 설 자리는 거의 없었다. 삼부종사를 했던 여인들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 김상헌 묘에 잔을 올리다   비석에 유명조선이라고 쓰다 ©최영숙

 

정묘호란시 척화대신이었던 김상헌의 묘를 찾았다. 김광수 학동이 잔을 부었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의 요구로 압송되어 4년 뒤에야 풀려났다. 조국을 떠나며 시를 지었다.

 

"가노라 삼각산(三角山)아, 다시 보자 한강수(漢江水)야.

고국산천(故國山川)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殊常)하니 올동말동하여라."

 

 

▲ 현절사     ©최영숙

 

현절사는 병자호란(1636) 때 3학사 윤집, 홍익한, 오달제의 넋을 위로하고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3학사는 적에게 항복하기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청나라에 끌려가 갖은 곤욕을 치르고 참형 당했다. 조선 숙종 14년(1688)에 그들이 끝까지 척화의 의리를 내세우던 곳인 남한산성 기슭에 이 사당을 지었으며, 숙종 19년에는 나라에서 ‘현절사’라 이름을 지어 현판을 내렸다. 숙종 25년에 이르러 3학사와 더불어 항복을 반대하던 김상헌, 정온 두 충신도 함께 모셨다.

 

조선은 왕조가 끝날 때 까지 몸은 비록 청나라에 항복했지만, 정신만은 명나라를 모셨던 유명조선(有明朝鮮)의 모습이었다.

 

주전파의 김상헌과 주화파의 최명길을 병자호란 이후 심양의 감옥에 같이 갇힌다. 이곳에서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명길이 심양의 옥에 있을 때 일찍이 상헌과 함께 경(經)과 권(權)에 대하여 강론하였다. 상헌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성공과 실패는 천운에 달려있으니 / 成敗關天運

모름지기 의로 돌아가야 한다 / 須看義與歸

아침과 저녁을 바꿀 수 있을 망정 / 雖然反夙暮

웃옷과 아래 옷을 거꾸로야 입을쏘냐 / 未可倒裳衣

권은 혹 어진이도 그르칠 수 있으나 / 權或賢猶誤

경만은 마땅히 여러 사람이 어길 수 없다 / 經應衆莫違

이치에 밝은 선비에게 말하노니 / 寄言明理士

급한 때라도 저울질을 삼가라 / 造次愼衡機

 

명길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고요한 곳에서 뭇 움직임을 볼 수 있어야 / 靜處觀群動

진실로 원만한 귀결을 지을 수 있다 / 眞成爛熳歸

끓는 물도 얼음장도 다같은 물이요 / 湯氷俱是水

털옷도 삼베 옷도 옷 아닌 것 없느니 / 裘葛莫非衣

일이 어쩌다가 때를 따라 다를 망정 / 事或隨時別

속맘이야 어찌 정도와 어긋나겠는가 / 心寧與道違

그대 이 이치를 깨닫는다면 / 君能悟斯理

말함도 침묵함도 각기 천기로세 / 語默各天機

 

이경여(李敬輿)가 시를 지어 두 사람에게 보내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지천유사》

 

두 어른 경ㆍ권이 각기 나라를 위한 것인데 / 二老經權各爲公

하늘을 떠받드는 큰 절개요(김상현) 한때를 건져낸 큰 공적일세(최명길) / 擎天大節濟時功

이제야 원만히 함께 돌아간 곳 / 如今爛熳同歸地

모두가 남관의 백발 늙은이일세 / 俱是南館白首翁 .

 

 

▲ 삼국시대부터 축조된 남한산성을 보다     ©최영숙

 

병자호란이 나고 360년이 지났다. 조선의 후손들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을 김진희 광주시 문화관광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답사했다. 해설을 들으면서 답사하는 것이 얼마나 깊이를 더해 주는 지를 알 수 있었다.

 

"남한산성은 1963년 1월 21일 남한산성의 성벽이 국가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고, 1971년 3월 17일 남한산성은 경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2014년에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위원들이 남한산성을 보고 신라시대부터 다른 방식으로 축조된 시대별의 특징을 보면서 감탄했다. 위원들이 머문 숙소에서 창 밖을 보면 바로 남한산성이 보이는 곳에 숙소를 정하는 등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고 했다.

 

남한산성을 기행하고 돌아와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면서 조선의 국가위기능력이 이토록 약했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전조가 그토록 많았건만, 주전파와 주화파의 설전으로 시간을 보냈다.

 

▲ 김사헌 묘로 가는 길에 익은 산딸기     ©최영숙

 

남한산성을 답사한 느낌을 물었다.

 

남한산성을 답사한 맹자학당 심우일 훈장은 “더 이상 갈팡질팡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구요. 또한 그럴러면 우리가 노력을 많이 해야겠죠.”

 

박정란 소래중학교 사서는 “맹자를 배우는 좋으신 분들과 2번째 참여한 맹자기행, 치욕의 역사 현장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과거와 현재를 다음 세대에 물려줄 미래를 함께 보았습니다. 김상헌 묘 가는 길에서 따 먹은 산딸기는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해주었습니다.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시흥문화해설사 박종남 씨는 “남한산성 안에서 굶주림과 추위를 안고 적의 공격 앞에 두려워했을 조선의 백성, 그들의 모습이 떠올라 안타까웠습니다.”

 

▲ 숲길을 걷다     ©최영숙

 

김영자 소래고등학교 상담사는 “남한산성을 몇 해 전 두 번 정도 다녀왔다. 별 기대감 없이 맹자학당 학우들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 좋아서 무조건 따라 나섰던 이번 여행은 남한산성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여행이었다. 해설사 님과 우리 일행들이 두 시간 함께하며 들었던 이야기, 마지막 답사지로 갔던 김상헌 묘 가는 길의 산딸기는 어린 시절 먹던 그 맛이었다. 동행한 선생님들 덕분에 짧은 하루의 남한산성 기행은 오랫동안 기억 저장고에서 나를 행복하게 할 여행이었습니다.”

  

이상애 소래고등학교 사서는 “여러 번 갔던 곳을 기행을 통해 또 왜 가는지 묻는 분들도 계셨는데... 이번 남한산성 맹자기행을 통해 더 본질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던 거 같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왜 학문을 했을까?' '그들이 말하는 라는 것이 이 나라 우리 백성이 우선인 義가 아닌데 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와 같은 '본질을 떠난 논쟁이 의미가 있을까?' 대학에는 학문을 하는 이유를 밝은 덕을 밝힘에 있는 명명덕(明明德), 백성과 친함에 있는 친민(親民), 지극한 선에 머무르는 지어지선(止於至善),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라는데, 이번 기행을 통해 학문의 방법론과 목적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 무망루     ©최영숙

 

항전 45일 만에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 수어장대 옆에 무망루가 있었다. 원래는 수어장대 2층에 있었으나 지금은 올라갈 수 없고, 대신 이곳에 세운것이라고 한다.  무방루의 2층 누대는 영조 때인 1751년 유수 이기진이 지었고, 현종 때인 1836년 유수 박기수가 중수한 것이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임금이 삼전도에 나아가 청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한번 절할 때마다 이마를 세 번씩 조아려야 했던 삼배구고두의 치욕, 그리고 청나라의 심양에 끌려가 8년 동안이나 볼모로 잡혀 있다가 돌아와 북벌을 꾀하였으나 끝내 그 한을 풀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임금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영조께서 이름한 것이라고 한다. 무망루의 뜻은 '무망' 즉 '잊음이 없다', '잊을 수 없다' 는 뜻이다.

 

역사를 잊지 않는 민족은 다시 그 전철을 밟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그 전철을 한 번 더 밟았다. 우리나라의 지정학적인 위치는 변하지 않는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위험은 끊없이 밀려온다. 그렇다면 지금의 위정자들과 국민들은 과연 어떤가 생각해 보았다. 역사가 새삼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대처할 수 있을 때는 그나마 늦지 않은 것이다. 자신의 자리에서 굳건히 지켜보고 대응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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