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건너 물매화

-물매화-

이정우 객원기자 | 기사입력 2011/09/25 [07:36]

강 건너 물매화

-물매화-

이정우 객원기자 | 입력 : 2011/09/25 [07:36]
너무 맑은 강을 만났다. 그 맑음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막막했다. 코발트가 되기 전의 파스텔 톤이기도 하고, 살짝 강의 옆구리를 끼고 바라보면 짙은 옥색에 물방울을 떨어뜨려 약간 희석시켜 놓은 투명한 옥색을 띠기도 했다. 강원도야 물 맑고 공기 깨끗하기로 치자면 으뜸이겠지만, 그 강의 물빛이 나를 사로잡았다. 강원도 심심산골까지 내려간 이유는 물매화가 보고 싶어서였는데, 잠시 잠깐 그 강 앞에 선 순간엔 물매화보다 더 강한 끌림이 있었다.
 
▲     © 이정우
 
지금까지 봐 왔던 물매화는 깊은 산속에 피었거나, 작은 도랑을 끼고 피어 있었다. 물매화! 물매화! 혼자서 읊조리다보면 분명 물매화는 물에 핀 매화라는 뜻일 건데, 예상외로 물매화는 산언덕에 피어 있기도 하고, 작은 웅덩이 곁에 피기도 한다. 꽃의 모습이 매화를 닮았고 물기가 있는 곳에서 산다하여 그리 이름이 붙여졌단다. 물매화는 껑충하게 키운 꽃대 하나에, 달랑 꽃 한 송이를 달고 산다. 둥글넓적한 잎은 땅바닥에 닿다시피 하였고, 꽃은 꽃대 끝에 피워서 사진을 찍자면 좀 난감하다. 꽃을 봐야하나, 잎을 봐야하나, 그리고 썰렁하니 일자 대궁이어서 주변 환경과 조화를 잘 이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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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에서 신을 벗었다. 바지도 걷을 수 있는 만큼 걷어야 하고, 삼각대도 단단히 들어야 한다. 자잘한 자갈들이 강 밑에서 발바닥을 간지른다. 물살이 세어 몸을 휘청거리면서도 강 밑을 들여다봤다. 너무 맑아 강돌들의 얼굴을 죄다 확인 할 수 있었다. 둥근 돌, 세모난 돌, 네모난 돌. 모두모두 어깨동무하고 내가 강을 잘 건널 수 있도록 받쳐 주는 모습에 콧등이 시큰했다. 무릎을 넘어 대퇴부까지 강물이 차올랐지만 바짓가랑이 조금 젖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 강 건너에서 물매화가 손짓 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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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의 작은 바윗돌 위를 맨발로 걸어 다녔다. 이끼가 자라고 있어 미끄럽기도 했고, 자칫 하면 바위에서 강물로 미끄럼을 타야 하는 불상사도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짐이 더 생겼다. 등짝에 배낭, 그리고 신발, 삼각대, 목에 카메라. 바위에 붙어서 엉금엉금 기어 다녀야 하는 상황이 되자 일행이 벗어놓은 신발 곁에 내 신발과 배낭을 놓아뒀다. 일단은 손발이 자유로워야 하겠기에. 강줄기를 따라 강물에 들어가기도 했다가 바위를 올라타기도 하면서 한나절을 물매화만 바라보며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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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매화의 꽃말은 고결, 결백, 정조, 충실이라고 하는데, 한 떨기 물매화를 바라보면 그 꽃말이 여지없이 딱 들어맞음을 느낄 수 있다. 가느다란 대궁 끝에 흰 꽃잎 다섯 장을 하늘을 향해 펼쳐선, 꽃술과 헛꽃술을 자잘하게 늘려 놓고, 그 끝에 꿀샘을 달아 놨다. 산속이라 풀벌레도 많지 않고, 또 자손을 퍼트려야 하는 임무를 수행하자면 물매화 나름대로의 지혜가 필요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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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 물매화가 속삭인다. 오늘 흘러간 강물 다시는 못 볼 순간이고, 내일 흘러들 강물 역시 찰나에 불가하겠지만, 모가지 길게 빼 들고, 활짝 웃어 젖니 내 보이며 이렇게 까치발까지 들어 보이는 것은 혹여 그 강물 먼, 머언 여행 끝에 지친 심신을 물매화 하얗게 웃는 모습 보며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다면, 그리하여 그 강물 아주 먼 강을 지나 바다로 흘러들 때까지 그 여정이 순조롭길 바라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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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떠오른 옛동무들. 그때 물매화 보겠다고 들떠서 밤잠을 설치기도 했고, 어디에 서식하는지 몰라 자생지 물어물어 확인하면서 훗날 꼭 꽃지도를 만들어 보자며 의기 생생했던 동무들. 물론 내 그릇이 못 나고, 작았기 때문이라 자책을 하지만, 그래도 경치 멋진 곳에서, 귀한 꽃들을 만날 때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은 아직도 난 그들을 사랑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어디선가 그들도 이따금씩은 내 얘기도 하겠지. 큰 강을 접어들 때 쯤, 그 강어귀에서 어쩌면 다시 만나야 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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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지 않을 거 같던 강 밑의 깊음에 허벅지가 빠지는 순간에도 손에 든 등산화, 삼각대 때문에 팔을 위로 올려야 했는데, 강 건너 물매화는 내 꼴을 보고 물매화 저를 향한 항복으로 알고 있었을까, 말갛게 웃는 물매화 앞에 엎드리고, 구부리고, 고개 조아리며 수채화 한 장 잘 그려보고 싶은 맘이 기특했던지, 강 밑의 돌멩이들 내 발꿈치 굳은살 말끔하게 정리해 줬다. 선생님 앞에 숙제를 내야 하는데, 맘에 들지 않은 스케치북을 들고 망설이는 나, 내년에 기회가 된다면 더 멋진 수채화를 렌즈로 그려보고 싶다. 물매화랑 강물이랑, 그리고 강돌이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 되는 어울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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