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폭우로 인해 산사태가 일고, 도심이 마비 됐다는 뉴스를 봤으므로 장거리 나들이는 할 수 없었다. 내심 솔나리가 보고 싶었는데 마음뿐이었다. 잠시 소강상태를 틈타 가까운 곳으로 나섰다. 오늘의 데이트 상대는 땅나리다. 신록이 우거진 숲을 환하게 밝혀주는 아이다.
땅나리는 중부 이남의 산이나 들에 자라는 다년생 초본이다. 여름 숲속에서 자라다 보니 가늘게 줄기를 뽑아 올리고, 주황색으로 꽃이 핀다. 오전엔 꽃잎이 오므려져 있다가, 오후가 되면 꽃잎을 뒤로 말아 올리고 사뿐사뿐 바람에 흔들린다. 키가 큰 녀석은 60cm를 넘기도 하지만, 땅에서 한 뼘 가까이 키를 키워 놓고 싱긋 웃는 모습이 더 사랑스럽다.
여중시절, 야산에 핀 꽃을 꺾으러 다니는 걸 좋아했다. 봄의 진달래서부터 시작하면 여름의 원추리, 나리, 그리고 가을의 쑥부쟁이까지 죄다 꺾어서 손아귀에 들고 다녔다. 월요일 아침 선생님 책상위에 올려놓는 꽃당번도 늘 내가 도맡아 했다.
연보랏빛 쑥부쟁이 한 아름에다가 억새 듬성듬성 끼워서 교탁이나 교무실에 꽂아 드리면 칭찬을 해 주시기도 하셨고, 어떤 때는 꽃이름이 뭐냐고 물어 보기도 하셨다. 가끔은 용담도 꺾었고, 도라지꽃도 꺾어다 드렸다. 어떤 날엔 절벽 위에 핀 나리꽃이 너무 예뻐 며칠 맘만 졸이다가 꺽다리친구를 꼬여서 품에 안고 좋아했던 날(참고로 지금은 안 꺾는다. 절대로)도 있었다.
한적한 섬에 몇 송이 듬성듬성 피어서 환하게 웃어준다. 해맑은 얼굴이 무지 반가운 땅나리다. 나리 종류는 참 많다. 주근깨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참나리, 잎이 돌려나기는 하늘말나리와 같은데, 고개를 빳빳이 들지 못하는 섬말나리도 있고, 하늘로 빳빳이 들로 있는 하늘말나리, 그리고 털중나리, 나리 중에 으뜸이라는 솔나리도 있다.
사실 솔나리가 많이 보고 싶었다. 은은한 분홍색의 자태도 멋지고, 가녀린 줄기 끝에 매단 꽃, 그리고 그 꽃으로부터 둘러싸여 있는 꽃술들의 자태도 우아하다. 여름 산행에 온 몸에 땀이 흐를 때, 그래서 지친 몸 잠시 쉬어 가려 나무 그늘에 등을 기대고 앉았는데, 홀연히 들어오는 솔나리, 그 우아함의 모습은 가히 절색이 아니라고 아무도 못 할 것이다.
고즈넉한 작은 섬. 뻘을 따라 타박타박 걸어서 들어가는 섬, 뜬금없이 떠오른 꺽다리친구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하나 더 보탠다면, 땅나리의 그 땅땅....따앙땅 스러움에 털썩 주저앉은 엉덩이가 습기에 젖거나 말거나, 무르팍에 거미줄이 걸렸거나 말거나 작고 간들거리는 땅나리의 매력에 푹 빠져있는 내 모습에 스스로 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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