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꽃은 피어야 한다

호조벌과 예술작품

이상범(극작가) | 기사입력 2020/03/08 [21:52]

벼꽃은 피어야 한다

호조벌과 예술작품

이상범(극작가) | 입력 : 2020/03/08 [21:52]

 

▲ 극단기린 이상범 대표     ©이상범


1.
시흥에서 세계로

 

예술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삶의 터전, 자연자산, 문화유산을 창작품의 소재로 활용하려는 시도는 지극히 자연스럽다. 전국 각지의 문화재단이나 지자체가 지역 고유의 예술문화 콘텐츠 발굴을 위해 엄청난 예산을 편성하고, 전국적인 공모전을 펼쳐온 지도 이미 오래다. ‘우리 사는, 여기가 세계적 명작의 고향이라면 얼마나 즐겁겠는가. 얼마나 정겹겠는가. 얼마나 자랑스럽겠는가.

시흥이라고 예외일 수 있겠는가. 시흥시 또한 수년간 문화예술활동지원사업 중 지역 고유 콘텐츠 개발에 최고 지원액을 책정하고 예술가들의 창작을 독려해오고 있다. 나 역시 그동안 오이도 빨강등대, 옥구공원, 시흥내만갯골 등을 소재로 황금 깃털의 비밀, 시흥삼목제전등 연극과 축제 이야기를 창조해 왔고, 전통연희단 꼭두쇠는 생금집을 소재로 황금닭의 유혹을 창작, 공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흥하면 단연 호조벌 아닐까. 간척사업을 통해 바다를 뭍으로 바꾼 대사역의 현장, 호조벌. 300년의 역사. 그동안 시흥은 특별 예산을 편성, 전통연희극 호조벌 스캔들(2014), 뮤지컬 1721 호조벌(2017)을 무대에 올려 시민의 관심을 모은바 있고, 최근에는 시흥문화원이 <지금, 여기 우리들의 노래>라는 대중음악 원천 콘텐츠 발굴 사업의 결과물로 호조벌에서라는 곡을 내놓기도 했다.

 

2. 연극에서 오페라로

 

벼꽃 피다는 처음부터 오페라로 기획되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나는 호조벌 스캔들1721 호조벌의 시작점에 다른 예술가보다 먼저 자리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내게 먼저 창작의뢰가 들어왔다. 그러나 작품의 방향성, 제작방식 등의 이견으로 거절, 중도 하차했다. 결국 극단을 이끌고 있는 나로서는 연극 무대에 올릴 날을 기대하며 호조벌 이야기를 곱씹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난해 연말 시흥시 음악협회지부장, 양시내가 오페라로의 전환을 제안해왔고, 그것을 수용하기로 하면서 작품은 새로운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글을 쓰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은 오페라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오페라 대본 창작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먼저 오페라의 역사를 더듬었다. 유명 작품의 대본을 찾아 잃으며 노래를 들었다. 공연실황을 찾아보았다. 번역 대본과 자막에서 마주치는 우리말의 불편함이 가장 큰 난제였다. 오페라에 어울리는 우리말을 찾아야 했다. ‘산문처럼 이해하기 쉽되 운문처럼 간결하고 리듬감을 가질 것.’ 산문 같은 운문을 구사하기로 했다.

 

▲ 창작오페라「벼꽃 피다」의 한 장면     ©시흥문화원 제공

 

3. 특수성에서 보편성으로

 

지역 소재를 창작의 재료로 활용하면서 부딪치는 곤란 중 으뜸은 지역성, 즉 소재 자체에 대한 강조다. 지역적 특수성에 방점을 찍으면 찍을수록 작품은 초라해진다. 선전적 주제에 갇히기 십상이다. 그렇게 해서는 겹이 생기지 않는다. 깊이가 생기지 않는다. 창작자는 무엇보다 상상의 자유를 보장받아야 한다. 이 영역은 그 누구보다 예술가 자신이 스스로 지켜내야 할 보루다. 그래야 주제를 살릴 수 있고, 그래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추구할 수 있다.

우선 호조벌이라는 말부터 버리기로 했다. 껍데기보다는 알맹이를 다듬는데 주력하기로 했다. 전 작품을 통틀어 호조벌이라는 표현을 한 번도 쓰지 않기로 했다. 말하지 않아도 호조벌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강조하지 않아도 호조벌 이야기임을 다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생략함으로 더욱 강하게 각인시키는 전략을 구사하기로 했다. 시흥에 한정하지 않고 보편적, 세계적 이야기로 확장하려는 계산이었다.

 

4. 소금꽃에서 벼꽃으로

 

벼꽃 피다의 뼈대를 이루는 중심 갈등구조는 결코 조정과 백성의 대립이 아니다. 연출가를 비롯하여 많은 관객이 임금과 백성의 대립을 중심 갈등으로 해석하는 것은 시대정신이 반영된 것인바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그러나 작가로서 구축한 중심 갈등은 자연과 인간의 대립이다. 바다를 막아야 하는 인간, 자연의 섭리에 저항하며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인간의 숙명이 그것이다. 그 처절함은 인신공양이라는 제의를 필요로 할 정도로 심각하다.

그렇다면 누구를 희생양 삼아야 할까.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고귀한 가치는 무엇일까. 나는 사랑을 선택했다. 순수한 사랑을 제물로 삼기. 그리고 사랑이 불러올 수 있는 갈등구조로 설정한 것이 삼각관계다. 사랑의 여러 가지 빛깔을 드러내기 위함이요, 셋이라는 숫자를 완성하기 위해서다. 그리하여 작품의 결말은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을 풀어주는 명혼冥婚, 즉 영혼결혼식으로 귀결된다.

자연과 인간의 대립은 소금꽃과 벼꽃의 대립으로 확장된다. 소금꽃이 지고서야 비로소 벼꽃이 필 수 있기 때문이다. 벼꽃이 피기까지 견뎌내야 했던 그 지난한 세월을 소금꽃으로 상징화했다. 조정과 백성의 대립은 오히려 부차적 갈등이다. 왕은 절대 악이 아니다. 그에게도 진정성은 있다. 임금으로서의 책무가 있고, 백성을 염려하는 측은지심이 있다. 다만 그는 결코 신이 될 수는 없기에 임금을 하늘로 섬기는 백성의 원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뿐이다.

 

5.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는 300년 벼농사의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 목숨 바쳐 헌신한 우리 조상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한 제사의 의미로 벼꽃 피다를 창작했다. 생명을 찬미하는 제주祭主의 자세로 300년 역사를 거슬러 더듬어 보았다. 300년 길을 환히 밝히는 등불은 벼꽃이었다. 벼꽃에서 벼꽃으로 생명의 불꽃은 이어졌다. 생명에서 생명으로 희망의 꽃은 이어졌다. 희망에서 희망으로 수혈은 이어졌다. 그래서 벼꽃은 사랑의 꽃, 희망의 꽃, 피의 꽃이다.

그런데 오늘의 호조벌은 건강한가. 찰진가.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쏟아낼 수 있는가. 호조벌이 위험하다. 또 다른 어둠의 대사역이 호조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압사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빌딩숲이 밀려오고 있다. 생명의 땅이 죽음의 땅으로 변해가고 있다. 호조벌은 살아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앞으로 300, 벼꽃은 변함없이 피어야 한다. 끊임없이 피어야 한다.

 

▲ 호조벌 노래 악보  © 시흥문화원 제공


경기도문화원연합회에서 지방문화원 원천콘텐츠 발굴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지금, 여기 우리들의 노래>를 진행했다<지금, 여기 우리들의 노래>는 지역예술가와 협력해 경기도 지역의 역사, 설화, 문화재, 지역사람들의 이야기 등을 소재로 대중음악 콘텐츠를 제작하는 사업이다.

시흥문화원은 지역의 많은 문화유산 중에 호조벌을 콘텐츠로 노래를 만들었다. ‘호조벌에서는 지역축제, 행사 등을 통해 시민과 공유될 것이다. 온라인에서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

 

 

 

 

이 글은 '시흥문화 2019 Vol.22'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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