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키우다가 풀밭이 부족해서 포도나무를 다 베버렸어요

대야동 사람들 구술생애사 4

민정례 | 기사입력 2019/07/09 [11:59]

소 키우다가 풀밭이 부족해서 포도나무를 다 베버렸어요

대야동 사람들 구술생애사 4

민정례 | 입력 : 2019/07/09 [11:59]

▲     ©민정례

 

혁명나니까 밥은 정량으로 나왔어. 그건 좋드만

그러다가 6.25를 거쳐서 대한민국이 독립국이 되어서 이승만 대통령이 초대 대통령하면서 장면 부통령 지나고 그러면서 좌우간 박정희 대통령 때 와서 잘살게 된거지. 남들은 다 박정희 대통령 독재자라 욕하지만 우리는 안해요. 내가 그때 군대생활하는데 상병인데 말하자면 우리가 혁명군이지. 5.16때. 공수부대가 투입되고 해병대가 투입됐지. 한강 인도교를 넘어올 때 헌병들하고 교전한게 해병대라고. 김포에 있는 해병대.

 

지금도 소래산 뒤에 공수부대가 있어. 그 공수여단이 같이 들어왔어, 해병대랑. 해병대는 우리 부대로 들어오고. 내가 남산에 있었거든. 지금 남산 야외음악당 자리. 해병대는 새벽에 우리 부대로 들어오고. 공수부대는 방송국으로 가고. 방송국이 지금은 여의도에 있지만 그때는 남산 밑에 있었거든. 남산 범바위 약수터라고 그 옆에. 방송국을 장악해 놓으니까 뭐든 방송은 군에서 장악하고. 그러고 혁명나고도 육군 중령들이 짚차타고 서울 시내를 뱅뱅뱅뱅 돌면서 군포를 쐈지. 우리는 1군사 넘어올까봐 완전무장 시켜놓고 북쪽만 바라보고 있고. 1군이 넘어올까봐. 우리 군사인데 1군은 전방에 있거든. 전투부대 아냐. 우리가 못당하지. 최전방에 포진된 군사들이 돌아올까봐 지키는 역할을 했지. 

 

혁명나기 이전에 밤마다 우리가 폭동 진압훈련을 했어. 도로에서 데모를 하면 우리가 갈매기 식으로 쫙 늘어서서 일본소총 착검해서 나가는 거지. 그 훈련을 혁명나기 1년 전부터 했다고.우리는 폭동진압 훈련이라니까 누가 궐기대회하면 그거 진압하러 나가는 줄 알았어. 혁명이 일어난지는 꿈에도 몰랐지. 그러다가 하루는 또 비상이 걸렸는데 단독 무장하고 연병대에 집결시켰는데 차에 타래서 타니까 실탄 박스가 잔뜩 실렸더라고.

 

그러더니 한 3개월 지나더니 그때가 5.16 때야. 새벽인데 총소리가 서울역 앞에서 들입다 났다가 남산으로 실탄이 날아오는 거야. 아침에 나가보니까 해병대가 우리 부대로 진입해서 천막을 치고 전부 구축해 있는 거야. 아침에 물뜨러 갔더니 저기 신천리 하00라고 우리 후배인데 그놈이 있는거야. 우리는 급수차가 야전 물탱크에다 물을 실어다 놓거든. 그 물로 식수하고 세면하고 그러는데. 세수하러 내려갔더니 그 놈이 있어. 해병대는 열여덟살에 군대를 가니까 나이는 어려도 계급을 보니까 같더라고. 걔가 김포에 가있어서 5.16 혁명 때 걔를 만났지. 지금 남산 야외음악당 자리에 이승만 대통령 동상이 건립돼 있었다고. 내가 공병인데 우리 부대가 그걸 폭발을 했어요. 폭발을 하고 거기다 국회의사당을 지으려고 했어. 그 작업을 하고 있는데 혁명이 난거여. 그래서 국회의사당이 여의도로 갔지.

 

혁명이 안일어났으면 거기에 국회의사당이 됐겠지. 거기가 축대를 쌓아놔서 밑에서 민간인들이 보이질 않아요. 부대는 위에서 훈련을 해도 밑에선 볼 수가 없다고. 지금은 계단을 전부 만들어놔서 아무나 올라가지만. 거기서 군대생활을 했다고. 그러다가 수색 30사단으로 지금 국방대학원 자리에서 탄약고 백 동 짓고 제대했다고. 탄약고 백 개.

 

그때 학생운동 빈번하게 일어났지. 계속 데모하고 난리났었어. 그래서 폭동진압훈련 많이 시키고 그랬지. 그러니까 박정희가 김포 해병대 여단장, 30사단 공수부대 단장, 그러고 서울시내 우리부대 단장을 포섭해서 혁명군이 된거야. 그때는 수도방위사가 없었어요. 우리 부대가 서울 안에 주둔하는 유일한 부대거든. 

혁명 나니까 먹는 것은 되게 좋더라. 그전에는 밥을 양은 냄비에다 해서 여름에는 우거지 국 말아서 주는데 밥을 두들기면 요만큼이 되요. 다섯 숟가락. 그것도 보리밥. 그러니까 달디 먹고 배가 고파 죽겄는거야. 혁명나더니 식기가 양은냄비가 싹 없어지고 스텐 식기 이거만한게 나오는거야. 정량 나오더라고. 그래도 굶주리던 놈들이라 다 못먹어. 밥이 정량이 나와도. 그러고 나서 군대생활이 할만해졌지. 

 

나 제대하고서 후회를 했어요. 육군 하사로 제대를 했는데 1,2년만 장기복무자로 군대생활했으면 중사가 돼서 공무원이 되가지고 지금까지도 편히 먹고 살걸 괜히 제대했다고. 그리고 선임자들이 애들 빠따 안때리고 통솔 잘한다고 너 제대하지 말고 말뚝박아라는 거야. 근데 부모님이 연로하셔서 고생하시니까 나왔지. 둘째형이 땅을 팔아 먹어서 생계도 어려워졌고. 차라리 눈 딱감고 했으면 지금 연금이나 타서 편히 먹고 살텐데.

 

 소 키우다가 풀밭이 부족해서 포도나무를 다 베버렸어요

 

우리집은 농사졌어요. 땅이 좀 있었어요. 영남 아파트 자리에 구천삼십육평 밭이 우리 거였어. 만 평에서 조금 빠져. 부자는 아니고 그 땅이 나빠서 곡식이 안되니까 겨우 연명하고 사는 거지. 연합병원 자리에 논 몇 마지기 있어가지고 간신히 먹고 산거지. 아마 거기 땅 다섯 평 팔면 계수리 한 평 샀어요. 계수리는 전부 논들이 비옥했거든요. 대야리 앞, 신천리 앞은 물이 없어요. 장마나 져야 모내던 자리고. 계수리 쪽은 물이 많아서 제철에는 모를 냈거든. 그러니까 땅값이 차이가 질 수 밖에.

 

둘째 형이 60년대에 사업을 한다고 그 땅을 그때 돈 10만원인가 8만원에 저당을 잡히고 빚을 져서 사업을 하다가 망했어요. 그래서 그 땅이 그냥 날아갔잖아요. 그때 내가 군대 있을 때였어. 제대를 해보니 땅이 다 없어진거야. 그때 땅값 10분의 1도 안됐죠. 억울하지. 법원에서 땅이 넘어간다는 통지서 나왔을 때 법원에 가서 항소라고 하거나 언제까지 갚겠다는 각서라도 썼으면 안넘어 갔을텐데. 항소도 안하고 있으니까 넘어간거지. 재판에 참석만 했어도 됐는데.

 

그래서 계수리로 가서 내가 어떻게 땅을 한 천 평 마련해서 포도농사를 지었지. 짓다가 그 다음에 낙농이 발달해가지고 소를 키웠어요. 소를 키우다보니까 풀밭이 부족해. 소 숫자가 늘어나니까. 포도나무들 전부 잘라내고 초지를 만들었지.

 

그때는 젖소 다섯 마리만 있으면 다섯 식구가 먹고 살면서 아이들 대학교까지 넉넉히 보냈지. 그때 소 한 마리 가격이 400만원 했었거든. 그때 돈으로. 지금은 소값이 싸지만. 우유를 짜서 조합으로 매일 보내니까 한 달에 두 번 돈이 나오잖아요. 그거를 하면서 여기 신천리가 활성화가 됐었지. 신천리에 나갔다하면 제 술들을 먹고 오거든. 그러니 영업이 잘되는거야. 계수리 사람만 나오면은 이집에서 끌고 저집에서 끌고 아주 특별대우지. 칙사 대접이죠. 돈을 잘 쓰니까. 매월 7일하고 22일날 유대라고 우유값이 나왔거든. 농협에서 찾으면 술 한잔 먹고 들어가야지, 그냥 들어가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까 서로 손님 끌라고.

 

포도도 여기하고 한양하고가 전국에서 강수량이 제일 적어요. 당도가 전국에서 최고였다고. 소래포도가 서울로 가면 인기요 인기. 그때는 포도 농사가 많지 않았어요. 

 

새마을운동하면서 보릿고개가 없어졌어

80년도까지 했지 아마. 74년부터. 새마을사업 시작되면서부터 바로 했으니까. 부락 이장이 그때 소래 농협 조합장 황기현씨였는데 날더러 이걸 맡아서 하라고 그래서. 그걸 맡았지.

 

새마을지도자는 부락에서 이장이 지명을 했어요. 그게 내가 군대를 육군공병을 나왔거든요. 군대에서 건물을 많이 짓다 나왔어요. 세멘에 대해 잘 아니까 나를 시킨 거에요. 그때 내가 일반하사로 제대했거든요. 경력도 많고 하니까. 그러니까 예비군 소대장도 하고. 예비군 소대장도 그때 마을에서 내가 계급이 제일 높아요. 그래서 20소대장을 6년을 했지. 그때 남동진 도지사 할 땐데. 그때도 훈장 하나 탔죠. 훈장 아니라 표창장. 새마을지도자로.

 

새마을지도자는 말 그대로 부락 지도자에요. 군사혁명이 일어나서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파출소에 육군 대위가 나와 있었어요. 군인이 나와서 지방간첩이나 이런 거를 색출을 하고. 전두환 대통령 때 삼청교육대 있죠? 그걸 새마을지도자가 추천해서 보내는거야. 불량배 있으면 여기다 전화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처치해 가요. 그러니까 중요한 역할을 많이 했지. 난 하나도 안보냈어요. 딱 한 사람 보낼라고도 했는데 차마 동네 사람인데 전화 못하겠더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잘했다고 생각해요. 그때 보냈으면 생전 원수질텐데. 동네 사람인데. 그래서 우리 동네에서 한 명도 안갔어요.

 

그때 새마을 지도자는 도지사도 프리패스고 군수도 프리패스고. 우리가 가서 면담 요청을 하면 열일 제치고 만나줬어. 우리가 뭐 필요하니까 전해달라, 마을 앞에 자갈 좀 깔게 트럭 좀 지원해달라고 하면 트럭하고 포크레인하고 다 지원해 줬어요. 고생 많이 했어요. 농로를 내느라고. 남의 땅 구걸해 가면서 얻어서 부락 사람들 바쁜데 전부 동원시켜서 일 시켰지. 길을 안닦을 수가 없는게 포도 고장이거든. 포도철에 포도가 나가려면 길이 좋아야지, 덜렁덜렁하면은 포도가 다 터진다고. 그러니까 주민들도 합심해서 도로 포장하면 열일 제치고 나왔어.

 

새마을운동 할 때가 대한민국이 못사는 나라에서 중진국으로 발돋움할 때거든요. 보릿고개 없애고 그런다고. 초가집도 없애고. 새마을사업 하기 전에는 지게지고 다녔거든요. 지게지고 퇴비도 실어나르고 수확한 것도 지고 오고. 새마을사업 하면서 농로를 넓혀가지고 그때부터 리어카나 그때마침 경운기가 나와가지고 경운기로 하기 시작했죠. 그래서 농사짓기가 무척 편해진거죠. 일손이 덜 들어가고.

 

농사짓는 방법이 바뀌었잖아요. 농로가 없던 것을 농로를 내고 경운기가 나와서 기계로 하고 그다음에 이양기가 나오고 벼 수확하는 콤바인이 나오고 농사짓기가 편해졌죠. 새마을운동하면서 농로가 생기니까 기계가 들어갈 수 있으니까. 집도 전부 그때 초가집을 거의 다 없애고 슬레이트 아니면 기와로. 그 짚 나온 걸로 가축 사료를 해가지고 가축도 퇴비가 나오니까 농토가 비옥화되고. 한 마지기에 쌀 두 가마 나오던 것이 네 가마 다섯 가마가 나왔거든요. 퇴비를 하니까 비료를 안줘도 농사가 잘되요.

 

소 키우는게 여러모로 좋았죠. 돈 나와서 애들 교육하는데도 좋고. 벼 농사 짓고 나면 사료로 먹이고. 거기서 나오는 거름 가지고 포도농사 짓고. 버릴게 없죠. 그러다 소가 더 나으니까 포토밭들을 전부 없앤 거에요. 없애고 거기다 초지를 만들었지.

 

소농사를 내가 60세까지 했어요. 힘들지. 새벽 네 시에 일어나야 되고. 젖 짜고 나서 그때는 첨에는 우유 차에다 실려 보냈는데 나중에는 냉각기가 나와가지고 아무데나 와서 뽑아가니가. 우리는 풀베러 가야되고. 그러다보면 열한시에요. 또 점심 줘야되고. 그러고 나서 쉬는 거지. 다섯 시되면 또 젖 짜야 되니까 그때 쉬는 거에요. 되게 바쁘고 되게 힘들지. 지금 같으면 어떻게 하냐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힘든 농업을.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그때 애들 다 가르치고 출가 시켰으니까. 결혼 다 시키고.

 

*구술자 소개

이관영

39생. 북시흥농협 인근에 살면서 6.25를 겪었고, 군 제대 후 계수동 땅을 사서 포도농사와 목장을 운영했다. 새마을지도자로 활동하면서 고소득 마을지도자 22명에 선정되어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이 원고는 '대야동 구술생애사 잠깐만 살다가 이사가려고 했지'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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