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지도 덥지도 않은 곳

동우 | 기사입력 2017/06/03 [19:28]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곳

동우 | 입력 : 2017/06/03 [19:28]

 

    ©동우

 

어떤 스님이 동산화상에게 질문했다.

추위와 더위가 닥치면 어떻게 피해야 합니까.”

僧問洞山, 寒暑到來, 如何廻避.

동산화상이 말했다.

왜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으로 가지 않는가.”

山云, 何不向無寒暑處去.

스님이 질문했다.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이 어디입니까.”

僧云, 如何是無寒暑處

동산화상이 말했다.

추울 때는 그대가 추위와 하나가 되고, 더울 때는 그대가 더위와 하나가 되라!”

 山云 寒時寒殺闍黎 熱時熱殺闍黎

 

무언가 서서히 준비되고 있었지만,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일까.

좀 쌀쌀하다 싶은 가운데 깜짝 놀랍도록 하룻낮 하루아침에 더위가 찾아왔다.

산중에 사는 사람이 이렇게 느낄진댄 아스팔트에 둘러싸인 도심 한낮의 체감 온도는 거의 폭염 수준일 것이다.

 

또로록 또로록 땀이 흘러내려도 좌복 위에서 꼼짝 않고 앉아 정진해야 하는 선원의 하안거 동안 한 번씩 상기하는 법문이다.

이는 벽암록100칙 중 제43칙 동산한서(洞山寒暑) 공안이다.

벽암록경덕전등록1700 공안 중에 설두중현 스님이 100칙을 골라 송()을 단 것에 대해 원오극근 스님이 다시 평창(評唱)을 달아 엮은 중국 송나라 때 저술이다.

 

선어록은 각성이 드러나 그 본심을 꿰뚫지 못하는 한, 늘 오해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

그렇더라도 그 중 한 방편을 끌어다가, 지금 이 자리의 요긴한 법으로 삼는 허물을 피할 수만은 없다. 그러자니 서두부터 변명이다. 다만 피할 수 없는 자리 하나만을 이야기 할 뿐인데 말이다.

 

추위와 더위, 기쁨과 슬픔, 선과 악, 생과 사, 이 현장에서 피할 곳을 찾는 중생심은 이 두 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더워 죽겠고, 추워 죽겠고, 때론 미워 죽겠고 좋아 죽겠다.

추위와 더위가 없는 그 곳으로 가라!’는 동산 스님의 말을 듣는 즉시 우리는 이상향을 꿈꾼다. 유토피아, 극락정토, 아니면 더 이상적인 열반이라는 세계.

늘 어느 곳을 향하고 있다. 가면 시원하고, 가기만 하면 행복을 가져다 주는 곳을 찾는다거기가 어디인지 당장에 가고 싶다.

 

그러나 동산스님의 답은 살짝 맥이 빠지는 소리다열렬한 더위 그 자체가 되라니...

이것 아니면 저것인 이분법의 세계에 익숙한 우리에게 그 자체가 되는 것,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이 답이라는 말은 이상향을 찾는 일보다 더 요원해 보인다.

어쩌면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찾을 수 없고 볼 수 없다.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곳, 다른 그 무엇이 아닌 그 한복판 그 중심에 답이 있게 마련이다.

 

피하고 싶은 마음은, 끌어당기고 싶은 마음과 한 짝이다. 우리의 마음은 늘 이 두 곳을 오간다. 척력과 인력이 그려내는 전자기장의 세계처럼.

내가 밀어낸 만큼 혹은 내가 끌어당긴 만큼의 결과가 뒤따른다.

요행을 바랄 수 없다. 밀어내는 마음은 증오와 화를 불러오고, 끌어당기는 마음은 탐욕과 집착을 일으킨다.

 

점점 극악해지는 폭염의 수위조차 우리가 밀고 당긴 일상적 습관의 결과라는 것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올여름은 또 어찌 보낼까를 염려하며, 다만 몰려올 무더위와 싸우거나 피하려 하지 말고 그 한복판에서 열기를 식힐 수 있는 있는 답과 마주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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