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림동사

무지내동 안장사

심우일 | 기사입력 2019/08/15 [22:31]

과림동사

무지내동 안장사

심우일 | 입력 : 2019/08/15 [22:31]

1. 안장사(安長祠) 개요

구종직(丘從直, 14041477) 선생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조선조 성종 때 명신으로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벼슬을 하였다. 선생의 시호인 안장(安長)’에서 사당 이름을 따서 1994년 음력 101일에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시호(諡號)안장(安長)’이라고 하였는데, 화락(和樂)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 아니하는 것을 ()’이라 하고, 남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은 것을 ()’이라 한다.

사당은 본래 현재의 위치로부터 서북쪽으로 약500m 지점인 시흥시 무지내동 토란이에 규모가 작으면서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의 묘소를 포함한 평해 구씨 종중 땅 일부가 군부대로 편입되면서 그에 상응하는 토지 보상금 5억원으로 평해 구씨 대종친회에서 부흥산(富興山) 끝자락인 현재의 위치에 안장사를 신축한 것이다.

사당은 외삼문, 내삼문, 전면 3칸의 영당과 전면 5칸의 재실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 대만에 있는 세계구씨종친회에서 기증한 석사자(石獅子) 한쌍이 사당에 오르는 계단 양 옆에 자리하고 있다. 외삼문앞에는 안장공구종직선생사적비(安長公丘從直先生事蹟碑)가 세워져 있다. 시향은 매년 음력 101일에 지낸다. 소재지는 시흥시 무지내동 산18-5이다.

 

▲ 안장사 외삼문 전경     © 심우일

 

2. 안장공 구종직선생 사적비를 통해본 구종직의 생애와 업적

여기 성리학에 정통하고 세종이후 5대왕을 사사(仕事)하여 성균관 대사성(大司成)과 의정부좌찬성(左贊成)에 이르러 치정에 공여하여 안장공이라는 시호를 내린 구종직 선생의 높은 인덕과 학문 그리고 광덕한 치적을 기리고 후대의 귀감을 삼기 위하여 이 사적비를 세운다.

공의 성은 구()요 휘는 종직(從直)이며 자는 정보(正甫)이고 호는 백결재(白潔齋)이며 본관은 평해(平海)이다. 공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이른 시조 대림(大林)의 후손으로 사재시사증 호조판서(司宰寺事贈 戶曹判書)에 이른 조부 춘호(春浩)의 손자이며 풍저창부사 증좌찬성(豊儲倉副使 贈左贊成)에 오른 부친 양선(揚善과 선공감정(繕工監正) 공성길(孔成吉)의 따님인 창원 공씨 사이에서 태종 4(1404) 정월에 태어나셨다.

공은 형용이 뛰어나고 재질이 총명하여 5살 때부터 글 공부를 잘하여 칭송을 받았으며 경서와 고전에 통요하여 재사들의 존경을 받았고 후학의 귀감이 되었다. 공은 세종 17(1435)에 진사에 합격하고 세종 26(1444)에 문과에 급제한후 성균관학유(學諭) 직강(直講) 봉사시직장(奉事寺直長)을 거쳐 세종 29(1447)에 영동군수로 나아가 공정한 선정을 베풀었다. 임기를 마치고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사간원 좌헌납겸지제교(左獻納兼知製敎)에 있으면서 조정의 기강을 바로 잡았다. 세조 2(1456)에 성균관 사예(司藝)를 거쳐 낙안군사(樂安郡事)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고 세조 7(1461) 성균관 사성(司成)이 되었으며 이듬해에 고성군사(固城郡事)를 역임한 후에 세조 9(1463) 가을 관직을 물러났다가 세조 11(1465)에 세조가 학문을 진작시킬때에 공이 성리학에 정통함을 아시고 성균관 직강겸종학박사(成均館 直講兼宗學博士)를 제수하시고 왕세자가 명륜당 유생에게 의리에 관한 의견을 물을 때에 공이 고금의 사례를 들어 명백한 강론을 하여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특진되고 경연(經筵)의 강의때는 언제나 공을 불렀으며 이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하시고 옥권망건(玉圈網巾)을 하사하는 은전을 입었다.

왕이 정승(政丞)의 위계를 주려 했으나 영의정 신숙주(申叔舟)와 대사헌 양성지(梁誠之) 등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공조참겸세자부빈객(工曹參判兼世子副賓客)에 특진되었다. 세조 12(1466) 봄 가정수(嘉靖守)에 올라 공조판서겸빈객을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했는데 왕세자께서 우수한 용모를 생각하시고 초상화를 그리게 하셨다. 세조 14(1468) 세조께서 온천에 가실 때 공이 유수(留守)의 직으로 세조를 모셨으며 숭정대부판중추부사(崇政大夫判中樞府事)가 되고 세조가 승하하신 뒤 예종의 꿈에 공이 선왕으로부터 받은 은전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시고 다음 날 어제시(御製詩)를 적은 초상황와 사온서에서 만든 술이 하사되었으며 정전(政殿)의 부름을 받고 궐내에 들어가니 대강보(大絳褓)와 호피욕(虎皮褥)을 하사하시는 은덕을 받았다.

예종이 승하하신후 성종께서는 공의 밝은 경학(經學)과 바른 충성심을 잘 알으시고 의정부 좌찬성겸지경연춘추관사(左贊成兼知經筵春秋館事)를 제수하시고 성종 2(1471)에 좌리공신 원종훈일등(佐理功臣 原從勳一等)에 책록(策錄)되었으며 그후 사직을 간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던 중 성종 5(1474) 가을에 병환을 얻어 성종으로부터 의약과 진선(珍膳)의 은덕을 받았으나 성종 8(1477)에 자손에게 훈계의 글을 남기시고 향년 74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성종이 슬퍼하여 포백(布帛)을 내리시고 예관(禮官)을 보내는 은덕 가운데 인천 부흥산(仁川 富興山 - 현 경기도 시흥시 무지내동)에 안장되었다. 성종 9(1478)에 안장(安長)이는 시호(諡號)를 내리시고 그후 영조께서 공의 포창(襃彰) 분부와 정조께서 예관을 파송하여 묘제를 올리니 이는 부모를 극진히 모시고 학덕을 베풀고 선정을 하면서 고결하게 살아온 공의 귀감의 포상이요 만인의 등불이 아니오리까? 특히 공께서 경회루를 몰래 구경하다가 왕에게 발각되었으나 주역과 춘추에 통달하여 벌은커녕 그후 출세가도를 달린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정경부인 온양정씨는 참판 수()의 따님으로 아들 다섯을 낳았으니 맏이 달손(達孫)은 직제학(直提學) 둘째 숙손(夙孫)은 이조정랑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셋째 달문(達文)은 건공장국(建功將軍) 넷째 달동(達童)은 직장(直長) 다섯째 숙남(夙男)은 찰방(察訪)이며 후손 또한 번창하였다. 이러한 공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충남 서천군 문산면 지원리에 청덕사(淸德祠)를 창건하여 공을 추모하고 공의 묘소에 가까운 이곳에 안장사(安長祠)를 건립하여 영정을 모셨으며 본 안장사의 준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대만(臺灣)에 있는 세계구씨종친회(世界丘氏宗親會)에서 기증한 석사자 한 쌍을 경내에 안좌시키니 제향의 향불이 번지고 공의 학덕과 선정을 기리는 성경(聖境)의 광장이 되어 길이 후대의 귀감이 되고 빛이 될 것이다.

1994년 음력 101일 서울대 교수 문학박사 이용주(李庸周) 근서

 

▲ 안장공 구종직 선생 영정     © 심우일


3. 문헌속의구종직 선생 이야기

공은 초야의 사람이다. 젊을 때 성균관의 하재(下齋)에 들어갔는데 이 때 생원, 진사들이 20여명이나 있었다. 하루는 어떤 유명한 점장이를 데려다 한 평생의 재화와 복록을 묻게 되었다. 마침내 공의 차례가 되자 점장이는 두 번 절하면서, “공은 마땅히 벼슬은 1품까지 이르고 수()70세를 넘겨 크게 부귀를 누릴 운수이니, 여러 선비들이 모두 이 분을 따르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여러 사람들은 크게 웃었다.

후에 과거에 올라 교서관에 입직하다가 경회루의 경치가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밤중에 조복이 아닌 편복으로 누 아래에 이르러 연못가에서 산보하고 있었다. 조금 후에 임금이 간단한 남여(지붕 없는 가마)를 타고 내시 두서너 사람을 거느리고 후원에서 갑자기 경회루에 이르렀다. 공은 황공하여 길 아래에 엎드렸다. 임금은 놀라서 물으니, “교서 정자(校書正字) 구종직입니다.” 하였다. “어떻게 여기에 왔느냐?” 하니, “신은 일찍이 경회루의 옥주(玉柱)와 요지(瑤池)가 천상의 선계(仙界)란 말을 듣고, 지금 다행히 운각(교서관)에 입직하였다가 초야의 천한 것이 감히 몰래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너는 노래 부를 줄 아느냐?” 하니 아뢰기를, “촌사람의 노래가 어찌 음률에 맞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은 한번 불러보라.” 하니, 공은 목청을 길게 뽑아 한 곡조 불렀다. 임금은 잘 부르는구나.”하고, 또 소리를 더 높여 부르게 하고서 듣더니 크게 기뻐하면서, “경전을 외울 수 있느냐?” 하니, “춘추를 외우겠습니다.” 하였다. 외워보라고 하니 한 권을 다 외웠다.

임금은 술을 내려 주고서 내보내었다. 이튿날 특별히 공을 부교리로 임명하니 삼사가 번갈아 글을 올려 극력으로 반대했으나, 임금은 허락하지 않았다. 5, 6일을 지나 임금은 편전에 나가서 삼사들을 모두 불러 놓고 대사헌 이하 모두 춘추를 외우게 하니, 한 사람도 능히 한 구절을 기억하는 이가 없었다. 공을 시켜 외우게 하여 제1권을 다 외우고, 또 다른 질에서 뽑아 외우게 하니, 외우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임금은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한 구절을 외우지 못하면서도 청직에 올라 있는데 구종직과 같은 사람은 어찌 이 벼슬(부교리)에 해당하지 못하느냐.” 하고 이내 그대로 임명하니 공은 사은숙배 하였다.

<연려실기술 제6권 성종조 고사본말(成宗朝故事本末) : 성종조의 명신>

 

▲ 연려실기술에 기록된 구종직 선생 이야기     © 심우일

 

4. 구종직 선생의 묘비와 신도비

묘비는 시흥시 무지내동 산15에 소재한 선생의 산소에 있다. 신도비와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인 1936년에 세웠다. 비에는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지경연춘추관사 시안장 평해 구공지묘 신좌(崇政大夫 議政府 左贊成 知經筵春秋館事 諡安長 平海丘公之墓 辛坐라 새겨져있다. 묘역에는 묘비 외에도 향로석, 상석, 망주석, 장명등, 문인석이 있다.

신도비는 선생의 묘소에서 동남쪽으로 약 100m 지점에 세워져있다. 전면에는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시안장 구공 신도비명(崇政大夫 議政府 左贊成 諡安長 丘公 神道碑銘)의 전제와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판중추부사겸지경연춘추관사 시안장 호백결재 구공 신도비명(崇政大夫 議政府 左贊成 判中樞府事兼知經筵春秋館事 諡安長 號白潔齋 丘公 神道碑銘 의 비제가 씌여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36년에 건립하였고 대사성을 지낸 김상덕(金商德)이 찬하고 전자(篆字)는 판돈령원사 윤용구(尹用求)가 쓰고 글씨는 이조참판을 지낸 민병승(閔丙承)이 썼다. 크기는 높이 183cm, 넓이 63cm, 두께 37cm이다.

 

▲ 2009년 안장공 구종직 선생 시제 봉행 모습(평해구씨대종회 제공)     © 심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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