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림동史(9)

과림1통(9)

최분임 | 기사입력 2018/06/19 [12:58]

과림동史(9)

과림1통(9)

최분임 | 입력 : 2018/06/19 [12:58]

무지내교회 수난사

 

6.25 전쟁 당시 무지내교회 부설학교인 소성고등공민학교는 포탄에 맞아 무너졌다고 한다. 예배당은 그나마 화재를 면하였으나 포탄의 영향으로 15도 각도로 기울어져 나무 받침대를 받쳐 임시로 사용하였지만 예배드리기가 불안하였다고 한다.

 

195111월 한춘식 전도사가 부산에서 파송을 받고 이곳에 도착해서 이 폐허를 보고 눈물겨운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눈보라치는 날도 찬송을 부르고, 귀가 떨어져나가는 듯한 추위에도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양지쪽에 모여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는 교회를 신축하려고 백방으로 힘썼으나 교인들은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고 한다.

 

지독한 현실 속,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19525월 감리교회 총리원에서 윌리엄즈가 미화 140불을 맡겼으니 찾아가라는 기별이 교회로 전해졌다. 이 돈은 스웨어러의 모국 교회의 주일학교와 여선교회에서 모은 돈을 아펜젤러 순교기념 예배당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이에 힘을 얻은 마을 사람들이 성금을 내고 여러 곳의 보조도 받게 되면서 천신만고 끝에 다시 교회를 신축하게 되었으며 195211월에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이어 소성고등공민학교여자기술학교를 개교하여 원상이 조금씩 회복되었다고 한다. 외롭고 눈물겨운 목회였다고 한춘식 전도사는 그 시절의 소회를 <무지내교회 104년사>에 밝히고 있다.

▲ 한춘식 목사


 그 후 1992620일 무지내교회는 또 한 번 수난을 겪는다. 전기 누전으로 교회가 전소된 것이다. 교회 마당에 임시로 약 18평되는 비닐하우스를 지어 보온 덮개를 친 다음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이후 34개월에 걸친 공사 끝에 무지내교회가 다시 들어서게 되었으며 그 세월을 간직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무지내교회 명칭 변천사

 

1967년 김의섭 목사가 부임해 무지내교회시온교회로 명칭 변경하였다. 그 후 조은호 목사가 부임한 후 뭇지내 시온교회로 호칭하다가 1989년부터 시온교회로 호칭하게 된다. 시간이 흐른 후 박종규 목사가 부임하여 <무지내교회 104년사> 발간을 추진하며 2002310일 교회 임원회에서 전 회원 찬성 결의에 의하여 다시 무지내교회로 명칭 변경하였다. 35년 만의 복구였으며 총리원에도 보고하였다. 교회는 그동안 무지내교회’, ‘시온교회’, ‘뭇지내 시온교회’, ‘무지리교회로 기록되었으나 무지내교회가 가장 사용빈도가 높다.

  

무지내교회 104년사를 펴내다

 

20021024아펜젤러 순직 기념교회인 교회는 창립 104주년을 맞아 기념예배를 드리는 한편 104년의 발자취를 담은 역사서를 발간했다. 교인과 지방 및 연회원, 무지내교회 출신 교역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감사예배를 드렸다. 무지내교회는 104년사 편찬을 위해 수고한 이웅수, 리진호, 김한경 장로, 김정목 권사에게 공로패와 감사패를 증정했다.

  

배움의 길을 연 무지내교회-‘흥업강습소

 

김동일(金東一, 1884~1954)은 무지리 은행동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지석(芝石) 일명 교원(敎源)이라고도 하였다.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성균관 주사의 직함을 받았다. 1902년에 예수를 믿었다고 하며 사촌 형인 김동현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세례는 버딕 선교사로부터 받고 곧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들어갔다.

▲ 김동일씨(무지내교회 104년사)    

 

1912년 안산 구역을 시발로 1916년 포교규칙에 의거 안산 구역 원시리, 목내리, 화정리 교회당 담임자로 계출하였다. 1919년 목회를 그만두고 1920년부터 농사를 경영하고 구장을 하면서 학교의 전통을 이어가고자 흥업강습소를 창설, 남녀 미취학 아동 교육에 진력하였다. 그가 펼치는 교육 계몽운동에는 무지내동 아이들 뿐 아니라 광명시 가학동, 시흥시 월곶동에서도 배우러 오는 학생이 있을 정도였다. 당시 수업 내용은 초등학교 1, 2, 3학년 과정을 가르쳤으며 흥업강습소를 졸업한 학생들은 국민학교 4학년에 편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도창국민학교가 1945년에 개교하고 1948년부터 초등학교 의무교육이 전격적으로 시행되면서 강습소 문을 닫게 된다.

 

다음은 이정호 목사의 회고록 중 일부를 옮겨본다.

▲ 묵헌 김정렬의 아들 김한경씨(무지내교회 104년사)    

 

이 강습소는 서당규칙에 의하여 도의 인가를 받는 신학문 서당으로 한문은 물론 산술 등을 가르쳤다. 1930년대는 장명덕 전도사 김흥렬이 교사로 활동하였다. 내가 부임하기 전에는 하규홍이 교육을 하다가 간 뒤 휴강 중이었다. 나는 근동에 다니며 학생을 모집하니 40여명이나 되었고 연령은 9~15세였다. 교실은 예배당과 주택을 개조한 6간 집이고 사무실은 없었다. 1920년대에는 김동일 전도사가 초등학교 1~3학년 과정을 가르쳤다. 그 후 논곡리에 사는 여자 히라노(平野)와 하규홍이 가르쳤으며 송은자는 42년부터, 김정덕은 43년부터, 김한경은 44년부터 교사로 활동하였다

 

1943년에는 주택을 개조하고 교실을 헐어 새로 6간 두 교실을 신축하여 6학급을 운영하였다. 5, 6반에는 주산을 가르치고 5년 동안 매년 매화 무지리 막지에 100여명의 학생이 모내기를 도왔다. 이 강습소는 교회 재정지원 없이 독자적으로 운영하였고 예배당을 교실로 쓰는 이외에 담임 목사도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6.25 동란으로 교실은 전소되었다.

 

▲ 1940년대 흥업강습소 시절(무지내교회 104년사)    

 

1948830일 김동일 전도사와 의논하여 소성고등공민학교’(昭城高等公民學)를 설립하고 도의 허가를 받아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교회에서 돕기도 어렵고 후원하는 독지가나 재단이 없어 운영이 어려웠다. 그래서 무지리 동회를 열어 이립(里立)고등공민학교로 하기로 하고 이사회를 조직, 매년 쌀 10되씩을 각 호에서 출연키로 하였다. 이사장은 김흥렬씨를 추대했다. 2년여 동안 학교 운영은 어렵다 못해 참담했다. 학생들 납부금만으로는 태부족이고 쌀도 잘 걷히지 않았다. 그래서 이사장인 김흥렬씨가 보조를 많이 했다. 수복 후 학생은 10여명으로 줄었고 교실도 소실되어 폐교 상태가 되었다. 나는 생계가 어렵게 되어 고생하였고 강습소는 물론 교회도 등한히 하고 있다가 강화지방서리 전도사로 파송 받아 무지내를 떠나게 되었다.”

▲ 김흥렬씨(무지내교회 104년사)    

 

 무지내교회 밴드부

 

이정호 목사의 회고록에 의하면 무지내교회 밴드부가 탄생하게 된 배경을 나는 매화리 강복순 집사 손녀의 결혼식 주례를 섰는데 신랑은 고 군으로 영등포 중앙 장로교회 신자였다. 그를 통해 영등포 보통학교 선배들이 새 악기를 구입하게 되어 헌 악기를 판다는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무지리 전 이민의 찬조로 헌 악기를 구입하여 교회에서 운영하였다. 큰북 김수욱, 클라리넷 김정목, 드럼 김정학, 코넷 김정선, 작은북 김정호 등 5인조였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숯두루지 송희준(88)씨의 기억은

왜정시대에 이 근방의 젊은이들이 군대를 가잖아요. 그러면 무지리교회 교인들이 박대를 꾸며 가지고 나팔이니 북이니 해서 기차 타는 곳까지 따라가서 환송해주고 그랬어요. 그쪽 동네가 선교사들이 있어서 그랬는지 예배당이 있어서 그랬는지 발전이 빨랐다고들 그랬어요.”

 

그의 증언은 무지내교회 밴드부의 존재가 8.15 해방 전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무지내교회 104년사>에 실린 사진 설명에 의하면 1950년대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 이정호 목사가 악기들을 구입했던 시간을 따져보면 50년대가 맞을 것이다. 그들의 활동 시기가 10여년의 차이를 보임에도 그들이 존재했었던 시간을 떠올리는 일은 가슴을 뛰게 한다. 일제치하와 전쟁이라는 암울했던 시대를 막 지나온 사람들을 위로하고 토닥였을 밴드부, 그들의 활동을 떠올리자니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흑백사진 속에, 단 몇 줄의 문장 속에 남아 있는 그들이 그래서 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 무지내교회 밴드부(무지내교회 104년사)    

 

무지내교회와 농촌운동

 

이정호목사는 1946년 여름 장로교 유재기 목사, 정준 장로, 조민형 등과 흥국형제단을 조직하여 농촌부흥을 목적으로 흥국복음농민학교를 세웠다. 우연히 그 단체를 알게 되어 무지리에서 개교를 하였으며 마을 주민들과 퇴비증산운동을 열심히 하여 1949년 전국 모범상을 받기도 했다. 또한 경기도에서 양잠 재배 마을로 지정을 받아 마을 사람들에게 상묘를 분배하여 심게 하고, 잠종은 군에서 지원을 받았으며 판매는 여선교회 회원이 양잠시험장에 가져다 팔았다고 한다. 또한 4H 구락부를 조직하여 농촌개량운동을 시행하니 눈에 띄게 살기 좋은 마을이 되었으며 주택 개량과 김용기 장로와 김성재의 지도로 고구마 장기 저장법을 시행하였다고 한다.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와 무지내교회

 

임원식 감독의 '저 높은 곳을 향하여'는 신사참배 반대 투쟁을 벌이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의 신앙과 삶을 영화화한 것이다. 절제된 대사와 영상을 구사하고 있는 이 영화는 주목사의 삶과 신앙을 담은 전기 영화이면서 종교영화다. 주목사의 생애 가운데에서도 신사참배 반대 투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영화는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참여하에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영화 제작에는 영락교회 시온성가대가 참여하였으며, 연예인교회도 지원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이 영화 일부 촬영 장면이 무지내교회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과 무지내교회 교인들이 엑스트라로 참여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래된 건물과 개신교 역사에서 의미가 있는 곳이라 이곳에서 촬영이 이뤄지지 않았을까 싶었다. 이 영화에 나오는 교회 건물 앞 누운 자세로 버티던, 교회를 신축하는 과정에서 뽑혀 나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오래된 소나무 한 그루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이젠 거의 없다.

  

 무지내교회가 세운 지교회

 

1) 매화교회

 

1930년대 초반 수암면(현 아산시 수암동)에서 시집온 당복순씨가 매화동 매치기마을 경주 이씨 종가집 며느리로 살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 당씨에게 정신 이상이 생겼는데 외국 선교사에게 교육을 받은 전도부인(이호연 전도사 추정)이 그녀를 위해 기도하고 찬송을 불러주면 그 증상이 사라지고 전도부인이 돌아가면 다시 병세가 심해졌다. 그래서 당복순씨는 아들 이태우씨와 같이 무지내교회를 다니게 되었는데 그녀가 매화리 최초의 교인이다.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서 병세는 사라지고 몸은 회복되었다. 그러다보니 그녀를 따라 몇 사람들이 무지내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1940년경 매화속이 조직되었으며 매체기마을과 도두머리 교인들이 늘어나면서 교회 설립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48918일 무지내교회 당회의 결의로 매화리와 도창리에 거주하는 무지내교회 신도들이 당시 부천군 소래면 매화리 261번지 이종옥씨댁 사랑방을 기도처로 정하고 주일 밤과 삼일 기도회는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기로 결정하였다. 무지내교회 이호연 전도사가 예배를 인도하였으며 그 후 정식 담임자가 되었다. 그녀가 매화교회 초대 담임자다.

 

2) 과림교회

 

1933년 무지내교회 이종권 목사가 전도하여 민태영 한건호 민복희 이수정 등과 그들의 가족이 입교하였다. 입교인이 41명으로 늘어나자 자연스럽게 예배당 신축 문제가 제기되어 19518월에 착공하여 10월에 준공하여 강두현 전도사를 초빙하여 독립교회가 되었다.

 

3) 물왕교회

 

1963315일 무지내교회를 다니던 이들이 교회가 멀어 물왕리에 교회를 세웠다. 1대 목회자는 허명도 목사로 물왕, 수암, 안산(현 연성중앙)화정교회를 순회 목회했다. 6.25 전쟁 당시 폭격으로 교회가 파괴되어 현 위치에 성전 26평을 다시 지었다.

  

오늘날의 무지내교회

 

처음 무지내교회를 찾아갔을 때 마을 한쪽 끝, 폭설을 하얗게 뒤집어쓰고 우뚝 솟은 건물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그 어떤 절대자 모습 그대로였다. 교회는 벌판 한가운데, 인적 드문 곳에 핀 한 송이 꽃처럼 오롯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범접하지 못할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격랑의 시대를 응시하던 눈빛 그대로, 닿지 못할 곳을 향하고 있는 삶의 여러 양태를 굽어보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오늘날 무지내교회는 그 옛날의 명성에 비하면 신도 숫자며 살림 규모가 많이 줄어들었다. 2013년 현재 신도 수는 80여명 정도이며 꾸준히 나오는 사람은 5~60명 정도이다. 여러 곳에 지교회가 세워진 탓도 있고 마을 주민수가 많이 준 탓이 크다. 그나마 예전에 다니던 교인들이 이곳을 그리워해 차츰 다시 돌아오고 있어 희망적이라고 한다. 여전히 교회는 생명의 충만함과 존재의 경이로움에 대한 찬가를 멈추지 않고 있으며 잔인한 현실과 아름다운 풍경의 부조화를 빚어낸 시간을 지나 완벽하게 마을의 구성원으로 정착한 듯 보였다. 교회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 서로 대립하다가도 이내 화합하며 하느님을 섬기고 있다는 얘기까지 듣자 무지내교회 건물 자체가 인간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듯 곧 다시 환하게 기지개를 켜고 일어서는 누군가의 모습이 환영처럼 눈앞을 스쳤다 

 

▲ 목감천 철길에서 바라본 무지내교회     © 최분임

 

소성고등공민학교(昭城高等公民學校)

 

폐교 이후 흥업강습소는 무지내교회(당시 시온교회) 장로이자 흥업강습소 교사였던 이정호(李正鎬 1913~서울 영등포구 도림동 출신)씨가 1948830소성고등공민학교로 인가를 받아 개칭한 후 교장에 취임하였다. 흥업강습소 그 자리에 들어선 소성고등공민학교가 중등교육기관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명예교장은 흥업강습소 설립자인 김동일(金東一1884~1954), 그는 이곳이 통일신라 때(757) 소성현(昭城懸)이었다 하여 교명을 소성고등공민학교’(이하.소성고)로 명명하였다. 아울러 토지 800여 평을 희사, 운동장 기지로 활용케 하였다. 그는 말년에 중풍으로 고생하다가 70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성인교육기관으로 탈바꿈한 이 학교는 시흥시의 무지동 과림동 안현동 도창동 금이동 논곡동 하중동 매화동 광명시의 가학동 노온사동 등이 학구였다. 무지동 주민들의 자제는 수업료를 받지 않다가 학교의 재정이 곤란해지자 봄에는 보리 가을에는 벼 등 대부분 곡식으로 수업료를 대신 받았다. 교사들은 대부분 무보수로 재직했다.

 

이정호 장로의 아들 이한구(1949년생)씨의 기억에 의하면

선친은 그 당시 농촌운동에 열심이었다고 해요.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을 택한 이유는 무지내가 낙후된 지역이긴 하지만 교회도 있고 해서 이곳으로 옮겼다고 했어요. ‘소성고를 운영하면서 가진 재산 다 날렸다고 들었어요. 어렸을 땐 교회 옆에 학교가 있었으니 모든 일상생활이 곧 학교이자 교회였어요. 양재며 편물 미용까지 가르쳤죠. 아버님은 무지내교회에 애착이 많으셨어요. 제가 16살 때까지 은행동에 살았죠. 군대 제대할 때까진 무지내에 적을 두고 있었어요.”

라며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그 당시 무지내교회와 소성고의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와 역할을 짐작할 수 있다.

 

이인숙(1955년생. 주영부동산 공인중개사)씨의 기억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저희 막내고모 이종헌(1938년생)과 고모의 언니인 이정숙(1937년생)소성고를 다녔어요. 그때는 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과목들을 무지내교회에서 가르쳤어요. 그땐 양재학원이라 부르기도 하고 그랬어요. 중학교 못 간 아이들이 당시에는 많았으니까요. 서양자수며 옷 재단이며 영어 수학 등을 배웠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고모랑 언니는 매화동에서 돌고개를 넘어 다니다 나중에는 마차를 타고 다녔다고 해요. 신앙심이 깊어 새벽기도도 다니고 했으니까 이곳까지 오는 게 별로 힘들지는 않았겠지요. 정식 인가는 안 났지만 수료증은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그 당시 학교에서 배운 뜨개질을 잊지 않고 저희 막내고모는 아직도 뜨개질을 해요. 우리 언니는 수학을 잘해서 상장도 받고 그랬대요.”

 

두무저리의 전병호(1946년생)씨의 세월 속 소성고

도창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소성고 13회를 졸업했어요. 공민학교도 시험 보고 들어갔어요. 공민학교를 나오면 검정고시를 봐야 학력을 인정해 주는데 몇 번 봐도 안 됐어요. 그 당시 학교 교실은 창고 모양 흙벽돌로 지었어요. 1학년 2학년 3학년 다 같이 교무실에서 배웠어요. 그때 교실이 모자라서 교실을 짓느라 선생님들하고 같이 흙벽돌을 나르고 쌓고 그랬죠. 벽돌 뿐 아니라 우리가 데모도(미장)도 했는데 그게 무너져서 선생님이 부상을 당하고 그랬어요. 우리가 1학년 때 3학년은 5-6, 2학년 20, 1학년은 30명 정도 됐어요. 전 졸업하고 농사를 지었어요. 고등학교에 들어갈 입장은 안 되었거든요. 그 당시 기성회비 사친회비를 6개월 또는 1년을 못낸 학생들이 부지기수였죠. 겨우 돈 몇십 환이었는데 말이죠.”

 

너나할 것 없이 궁핍했던 시절을 대변하듯 어린 아이들 손까지 빌려야 할 만큼 어려웠던 학교가 그려진다. 그의 몇 마디 말 속 생생하게 살아나는 그 시절이 절망보다는 희망으로 와 닿는다. 동시에 당시 흥업강습소소성고로 거듭나면서 더 많은, 배움에 목마른 지역의 아이들을 끌어안았을 것으로 짐작되어 흐뭇하다. 무지내교회에서 발아한 작은 씨앗(매일학교)이 얼마나 넓고 깊게 뿌리내리며 커 왔는지를 알 수 있다. 그 씨앗이 꽃 피우고 열매 맺기까지 대가 없이 헌신한 사람들을 생각한다. 여러 사람들의 희생으로 한 삶을 이룬 사람들을 생각한다. 암울했던 시대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이들의 교육에 대한 열정이 지금의 짐작, 생각만으로는 도저히 그려지지 않는 한 세상이 거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19506.25 전쟁 당시 폭격을 맞아 쑥대밭이 된 무지내교회와 학교는 절망적인 현실의 벽에 부딪히게 된다. 결국 소성고는 학교터를 새롭게 옮겨야 하는 상황을 맞아 현 경기자동차고자리(시흥시 금오로 103번지)로 옮겼다. 교사를 이곳으로 옮긴 것은 학교 뒷산이 귀속 재산인데다 산 아래 토지를 전 인천시장 김정렬(김동일의 아들)씨가 학교부지로 희사했기 때문이었다.

 

소성고교장은 1960년을 전후하여 무지동 출신 김흥렬(金興烈)이 재임하였으며, 1961724일에 안양시 비산동 출신 이승복(李承復)이 교장서리로 임명되었다가 그해 911일에 교장에 취임하였다. 그 뒤 재정상의 어려움을 겪게 되자 1969412일 양만영(楊萬英)이 학교를 인수,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19761215일 미산동 출신 한상호(1936. 1. 4 ~)가 인수하여 이사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977625한인고등기술학교’(자동차기술학교) 설립인가를 받았다. 이어 19811128한인고등학교로 재설립인가를 받았다. 한인고등기술학교는 초대 교장 조도현(1982), 2대 교장 황석근(1985), 3대 교장 강종식, 4대 교장 한주희(한상호의 아들).

 

한편, ‘소성고197951일 경기도 교육위원회 제200차 본회의 의결에 따라 설립 34년만인 1982228일에 폐교되었다. 무지내동 주민들의 삶 깊숙이 자리 잡아 부침 많은 세월을 함께 했던 소성고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이 글은 2014년도에 발행된 책 <과림동>중 일부분인 과림1통에 대한 이야기로 10편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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