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림동史(8)

과림1통(8)

최분임 | 기사입력 2018/06/10 [16:47]

과림동史(8)

과림1통(8)

최분임 | 입력 : 2018/06/10 [16:47]

무지내교회 이야기 

1895년 대한감리회 시흥 선교, 무지내교회 탄생

 

무지내교회(김영기 목사. 26대)는 기독교 대한감리회 중부연회 시흥북지방에 속해 있다. 개신교가 시흥에 전래된 것은 1895년, 그당시 무지내교회는 미감리회 서울 이남의 전략적 요충지였다고 한다. 신자 통계는 시흥지방 입교인은 한 명도 없고 세례 받은 학습자가 1, 세례를 받지 않은 학습자가 11, 12명이었다.

 

▲ 무지내교회 가을 전경  (사진: 박완준 제공)    

 

그 후 1900<감리연회록>에 의하면 그 전 해에 무지내교회에는 입교인이 1, 학습자가 14명이고 올해는 5명과 41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입교인은 김동현(1869~1928)이었다. 당시 김동현은 배재학당을 다녔고 1901년에 수원지방 권사(2년 급 1)에 임명되었으며 1902년에는 시흥지방 본처전도사(초기 한국 감리교회 교직, 현재의 장로)로 파송 받았다.

 

김동현은 복음을 받아들인 후 무지내에 있는 자신의 고향집을 예배 처소로 내놓고 예배드리기 시작하였다. 시흥군 최초의 개신교 신도이며 개척자다. 선교사가 먼저 와서 선교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교회가 바로 무지내교회였다. 이후 김동현은 예배 장소가 비좁게 되자 사랑채를 뜯어 언덕에 교회를 짓게 되었다.

 

▲ 무지내교회 겨울 전경  (사진:박완준 제공 )  

 

무지내교회 새 헌당 봉헌

 

무지내교회는 1901518일 아담한 예배당을 건축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장이 3간이오 광이 이간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6평의 매우 작은 성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예배당 출입문은 유리창으로 십자가를 만들었는데 그때 당시 그것은 대단한 볼거리였다고 한다. 감리사인 스크랜톤(W. B. Scranton, 1856~1922) 주재 하에 거행된 봉헌식에는 인근의 담방리교회(인천 만수교회)와 시흥 삼막골과 과천 덕고개 교인들이 참석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자체 전도 2년 만에 이룬 성과였다. 이 작은 예배당 봉헌 예배에 무어(D.H Moore 1838~1924) 감독을 비롯한 많은 선교사들과 전국 각지에서 신도들이 모였다는 것은 하나의 큰 사건이며 행사였다. 이는 우리나라 초기 선교와 신앙의 열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당시 무지내교회는 무지내 한 마을에서 한정되지 않고 주변 6개 마을의 중심지였으며 스스로 신도가 된 인원이 무려 100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 1937년 무지내교회 이동성경학교  (사진:무지내교회 104년사)  


무지내교회
-아펜젤라 순직 기념교회

 

봉헌 이듬해인 19026월에는 연례회의를 주관하러 온 미감리회 무어감독이 무지내교회 예배에서 설교하기 위해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무어감독 일행이 경부선 부설공사를 하고 있는 곳을 지날 때 일본인 노무자들이 감독이 탄 인력거를 막아선 것이다. 공사현장을 무단으로 침입했다는 이유였다. 아펜젤라(H.G. Appenzeller, 1858~1902)와 스웨어러가 이곳을 지나게 된 경위를 자세히 알려주고 빨리 비키라고 재촉하였으나 도무지 말이 먹히지 않았다. 이 때 무어감독이 한국인과 비슷하게 생긴 이 일본인을 하인 정도로 생각하고 지팡이로 팔을 한 대 내리쳤다. 그러자 일본인은 욕을 해대더니만 펄떡펄떡 뛰어 주변의 야영지로 달려갔다. 순식간에 몽둥이를 든 일본인들이 몰려와 싸움이 벌어졌다. 아펜젤러와 스웨어러는 감독을 보호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둘 다 일본인의 몽둥이에 머리를 맞아 피가 철철 흘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들은 이들이 러시아 사람이 아니라 미국사람인 것을 알았다. 미국사람을 후려친 일행들은 겁이 나서 그 자리에서 모두 달아났다.

 

▲ 아펜젤러 기념교회 선포 기졈 (사진:무지내교회104년사)    

 

그 무렵은 일본과 러시아간에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전운이 감돌고 있었는데 일본인 노무자가 이들을 러시아 첩자인 줄 알고 통행을 방해했던 것이다. 이날 무지내교회는 감독 일행이 행차한다는 소식을 듣고 인근 교우들을 비롯한 수백 명 교인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난데없는 봉변으로 심한 부상을 당한 감독 일행은 무지내교회에 오는 것을 포기하고 서울로 되돌아갔다.

 

아펜젤라는 이 날의 사건으로 인해 법정에 증인으로 출두하게 되어 목포에서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던 성서번역자 회의 참석이 어려워졌다. 목포로 가는 배를 타지 못하게 된 것이다. 다행히 아펜젤라는 1902611일 밤 10시경 오사카 선박회사의 쿠마가와 마루호에 승선할 수 있었다. 아펜젤라와 그의 조수 겸 비서 조한규, 장로교 학생으로서 고향으로 돌아가던 한 여학생과 함께였다. 그러나 목포로 항해하던 중, 배가 어청도 부근을 지날 때 키소가와로 이름 붙여진 다른 선박과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배가 침몰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배를 버리고 탈출하기 시작했으나 그의 비서 조한규가 미처 선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펜젤라는 그를 구하기 위해 침몰하는 배의 선실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배는 아펜젤라를 비롯한 23명과 함께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결국 아펜젤라는 먼 이국 땅 깊은 바다 속에 영면하게 된다.

 

▲ 아펜젤라 순직 기념교회 펜던트  (사진: 무지내교회104년사)


1946
년경 흥업강습소 선생이자 장로였던 이정호씨는 당시 농촌 지도차 나온 윌리엄즈(F.E.C.Williams 미감리회 선교사)와 상봉하였다. 이때 윌리엄즈는 사건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무지내교회를 '아펜젤라 기념 예배당'으로 하자고 제의하였다고 하며, 이 사실을 이정호 장로는 교회연혁지에 기록하였다고 한다.

 

이후 정확히 100년의 시간이 흐른 20026월 아펜젤라 선교사의 가족들이 무지내교회를 방문하여 아펜젤라 순직 기념 선포식을 가졌다. 고인이 된 아펜젤라를 대신하여 100년 만에 무지내교회를 방문한 후손들의 감격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 아펜젤라순직기념교회 현판제막식 (사진: 무지내교회 104년사)    

 

무지리 여학교(여자 매일학교)

 

서울 이남 여선교회는 무지내교회를 서울 이남 여성선교의 발판으로 삼고자 하여 봉헌식 직후 예배당 바로 옆에 교실을 짓기 시작했다. ‘주일학교매일학교를 함께 운영하였는데 남녀공학이었다. 무지내교회 연혁에는 1대 선교사 서원보가 문경호 통역관을 대동하고 무지리교회를 목회하였고, 이화학당을 설립한 스크랜톤 의사의 모친 노부인(M.F.Scranton 1832~1909)이 조신실 선생을 보내어 무지리여학교를 설립하고 조 선생의 월급을 노부인이 담당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감리교회연회록>(19015) 스웨어러 보고에도 스크랜톤 대부인이 학교 건물을 짓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그들은 스크랜톤 대부인으로부터 받은 원조로 목사관 바른편에 학교 건물을 짓고 있다. 스크랜톤 대부인은 이곳에 선생을 배치하려고 하며 우리는 이 일에 큰 성과를 맺기 바란다. 이 근처에 있는 어린이들은 똑똑하고, 부지런하며 열심히 배우고자 한다.’

이 보고서는 시흥 뿐 아니라 경기도 차원에서도 매우 의미 있는 기록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경기도에서 신교육이 도입된 것은 신풍학교가 처음이지만 사립으로는 무지리여학교가 최초였다. 1905년에는 남학생들도 이곳에서 배움의 첫발을 내딛게 됨으로써 남녀공학으로 바뀌게 된다. 무지내교회가 신앙생활 뿐 아니라 이곳 주민들 교육에 얼마나 큰 힘을 쏟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후 1908년 사립학교령에 의해 1914년에는 폐교되는 비운을 겪게 됨으로써 무지리여학교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    2013년 무지내교회 주보 @최분임

 

무지내교회 부지

 

무지내교회 부지는 19101225일 토지조사 사정 당시 무지리 256, 257의 임야 924평과 대지 300평인데 소유자는 버딕(미감리교회 한국선교사)으로 되어 있었다. 공유지 연명부에는 김동희 김동일 김응열 김동황 김춘명 순서로 기재되어 있었다. 이 다섯 명은 무지내교회 토지를 구입하는데 상당한 투자 또는 기부를 하였거나 열성적인 신자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김동일은 안산지방 여러 교회 교역자로 활동하였고 김동현의 사촌이다. 김동희 김동황은 김동현의 육촌이고 김응열은 오촌이다. 김응열은 평생 무지내교회를 지키고 충성을 다 하였다고 한다. 그의 동생 김흥렬은 시온교회(무지내교회) 장로로 시무하였다고 한다.

 

 

 

  * 이 글은 2014년도에 발행된 책 <과림동>중 일부분인 과림1통에 대한 이야기로 9편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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