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림동史(7)

과림1통(7)

최분임 | 기사입력 2018/05/30 [12:16]

과림동史(7)

과림1통(7)

최분임 | 입력 : 2018/05/30 [12:16]

 

 

 

▲ 표지석  ©최분임

 

어령골, 전의이씨 선영묘역

 

마을 앞 도로에서 1896부대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표지석 하나를 만나게 된다. '전의이씨 선영묘역'이다. 표지석이 가리키는 화살표를 따라 올라간다. 크고 작은 공장들을 지나 산으로 올라가면 잘 조성된 묘역을 만난다. 묘역 바로 아래 사는 이한복(1955년생)씨는 그 후손 중 한 사람이다.

 

, 저희 14대조 되시는, 고려 말의 이사주(李思舟)할아버지와 저희 선대들이 묻힌 묘역이에요. 성삼문 정인지 등 할아버지 제자들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스승님이 돌아가셔서 애통하다는 글을 저 비문에 남기셨죠. 지금은 오래 돼서 잘 알아볼 수가 없죠.”

라는 설명을 해 준다.

 

묘역에 세워진 비석에는 정선군수증승지(旌善郡守贈承旨)라고 새겨져 있다. 승지란 고려시대 밀직사의 좌승지, 우승지, 좌부승지, 우부승지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므로 그의 직책과 위치를 짐작해 볼 수 있다.

 

▲ 전의이씨 선영묘역     © 최분임

 

선영묘역에서 왼쪽으로 건너다보이는 산에 있는 묘는 15대조와 16대조 어르신들이 묻혀 있다고 한다. 15대조 되시는 분은 태조 이성계가 경복궁을 지을 당시 책임자로 일했으며, 우리나라 역사에서 최초로 간척사업을 이뤄낸 인물이라고 했다. 공신에게 주는 상으로 무지내 일대의 토지를 하사받았다고 했다.

 

고려 때부터 조성된 묘역은 1997년 초 이한복씨가 어령골로 들어오기 전에는 마을에서 관리해 주는 분들이 있었고 지금은 8대 독자이자 장손인 이한복씨가 관리를 해 오고 있다. 그 묘역에서 신흥동 서씨네 느티나무를 내려다보았다. 시간과 시대를 달리해 나라의 공신들이 신흥동 이 작은 골짜기로 들어와 살았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굳이 풍수지리를 따지지 않더라도, 운명의 격랑을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이 마을이 깔고 앉은 자리가 밝고 환하게 느껴졌다. 다가올 미래 또한 희망적으로 점쳐졌다.

 

▲ 전의이씨 묘역에서 내려다 본 어령골과 신흥동 © 최분임

 

안장사

 

조선조 성종 때 좌찬성을 역임한 안장공 구종직(安長公丘從直1404 1477)의 사당 및 재실이 있는 곳이다. 무지내동 산18-1, 18-5번지 일대에 자리하고 있다.

 

구종직은 조선 초기 문신으로 자는 正甫(정보), 호는 百潔齋(백결재), 시호는 安長公(안장공), 본관은 平海풍저창부사(豊儲倉副使) 구양선(丘楊善)의 아들로 태종4(1404)에 태어났다. 공은 세종, 단종, 예종, 성종의 5대 임금을 모셨다.

 

세종17(1435) 진사향시와 세종26(1444)식년시에 급제하고 성균관 학유, 봉사시 직강 등을 거쳐 세종29(1447)영동군수를 역임하고 단종3(1455)사간원 좌헌납 겸 지제교를 지냈다. 그 후 세조12(1466) 공조판서를 거쳐 종1품인 좌찬성과 성종2(1471) 좌리공신 원종훈 1등에 책록되기도 했다.

 

무지내동 부흥산에는 구종직의 묘와 신도비가 위치해 있다. 신도비는 1936년에 세워졌으며, 사당과 사적비는 1994113일에 만들어졌다. 본래는 현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약 500m 떨어진 토란이에 있었으나 그 자리가 군부대 용지로 편입되면서 토지 보상금 5억 원으로 신축한 것이다.(준공 1994) 시향은 해마다 음력 101일에 있다.

 

 

태봉

 

태봉(胎封)은 태실, 태묘라고도 하며 태반을 묻는 장소 혹은 태를 봉안하는 것을 일컫는다. 무지내동 산 15-12변지에 위치해 있는 태봉은 199054일 향토유적 제 6호로 지정되었다. 해발 50m 되는 산 정상에 자리 잡은 태봉은 사방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구릉지의 정상부에서 마치 아래 마을을 그윽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듯하다. 1990년 육군00부대가 들어서자 태봉은 군 영내에 위치하게 됨으로 써 자연스럽게 보호를 받는 몸이 되었다.

 

태봉의 형태는 암반층을 지름 2.5m, 깊이 2m로 파낸 후 그 속에다 석함(石函)을 묻은 조선시대의 태실지(胎室址)이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석함(크기: 지름 85cm, 높이 47cm, 두께 16cm, 재질:대리석)이 훼손되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그 아래 동쪽 부분에는 도굴 갱()으로 보이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어 이 속에 넣은 항아리와 태지석함(胎誌石函)은 도굴된 것으로 보인다.

 

구조상 왕실의 태실은 아니고 조선시대 사대부가(士大夫家)의 태실로 보인다. (정확한 것은 정밀조사를 실시한 다음에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무지내동 태봉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88년인데,시흥군지의 집필자였던 이승언씨가 지명유래를 집필하기 위하여 현지 조사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주민의 제보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과림1통 군부대 현황

-80정비대대 면적: 423,705(m2)

-10보급대대 103보급중대-면적: 273,253(m2)

시흥시 무지내동 167-4번지 제3군 지사

-1896부대 면적: 135,839(m2)

-2291부대(701대대) 면적: 119,656(m2)

 

지명 유래

감조개

수인산업도로의 무지내동 입구에서 경기자동차과학고등학교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조선시대에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 이 고개에 이르러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차부대 정문 맞은편. 금이사거리에서 아까시배기 사이를 말하며 지금 고려금속 자리를 일컫는다.)

 

어령골

신흥동 앞(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무지내동 336번지 일대를 일컫는다. 조선시대 어씨가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어씨 선대의 묘가 있으며 깨진 기왓장 주춧돌 등이 출토되고 있다.

 

유골(또는 육골)

신흥동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며 어령골 맞은편 골짜기를 일컫는다. 지금은 군부대내에 위치해 있다. 마을 주민들이 매화동 밭뒤골을 갈 때 이곳을 지나다녔다. 오래 전에는 산마루에 서낭당이 있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돌무더기를 얹으며 소원을 빌었다. 외곽 순환도로가 나면서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토란이

태봉이 있는 봉대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예전에 토란이 많이 나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뱀의골과 중의골을 포함한 골짜기를 말하며 돌이 많은 곳이었다. 지금은 군부대가 들어와 있다.

 

둑너머벌판

토란이와 금오도로 사이에 있는 벌판으로 토란이벌이라 부르기도 한다.

 

뱀의골(뱀에골)

태봉이 있는 봉대산에서 금오로를 향해 왼쪽에 위치한 골짜기를 일컫는다. 뱀이 많이 나오던 골짜기라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중애골(중의골 또는 중에골)

태봉이 있는 봉대산에서 금오로를 향해 오른쪽에 위치한 골짜기를 일컫는다. (중애골, 중의골, 중에골 등 부르는 이에 따라 각각 다르게 기록되거나 불리어져 어느 것이 정확한지 알 수 없다.) 예전에 절이 있었던 걸로 추정되며 절의 중을 가리켜 이름 지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느티나무

신흥동 북쪽에 있는 나무로 조선시대 논곡리 출신 서모씨가 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후 심은 것이라고 한다.

 

상나무박이(상남배기)

무지내동 349-19번지를 일컫는다. 정미소 마당에 큰 향나무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향나무에 대해 어떤 이는 일제 말엽 마을에서 기금 조성을 위하여 팔았다고도 하고, 또 누군가는 그 일대에 상록수들이 많았는데 건물을 짓느라 캐버렸다고 하는데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다. 지금은 그 자리에 도로가 나 있다.

 

타작마당

신흥동 191-2번지 일대를 말하며 안장사 뒤 이조가든과 8282카센터가 들어와 있는 자리다. 큰 마당이 없던 당시 마을 사람들이 농사지은 곡식을 가져와서 멍석을 깔고 말린 다음 타작을 하던 곳이다.

 

고사리들

신흥동 동쪽, 고사리가 많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상나무고개

금오도로에서 중동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고개로 향나무가 일제 말엽까지 있었다. 1987년 고개가 낮추어지며 포장되었다.

 

구개벌

예전에 중동에 큰 내가 있었는데 그 주변으로 나무들이 무성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매립되어 논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냇가 나무들이 많은 논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돌고개

신흥동과 도창동 사이에 있는 고개로 돌이 많았다고 한다. 무지내동과 매화동의 경계가 되는 이곳에 아까시나무 성황당이 있었으며 제를 지내지는 않았다고 한다. 예전에는 무지내동 아이들은 이 고개를 넘어서 도창초등학교를 다녔다.

 

불당골

은행동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 지명에 대해서는 이곳에 절이 있었는데 빈대 때문에 폐사되었다는 이야기와 어떤 이가 혼자 사는 집이 있어 그 집을 절집이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사정터

경기자동차과학고등학교 앞(동쪽)에 있는 동산으로 조선시대 이곳에서 한량들이 활을 쏘며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때 주민들이 단합하는 장소로 이용한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적으로 중단, 폐쇄되었다.

 

애망신(愛望信. 신망애라고도 불림)우물

은행동에서 가장 오래된 우물로 믿음, 소망, 사랑의 한자를 따서 애망신이란 이름을 지었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있었으나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뚜껑을 덮어 두었다. 무지내동 352-1번지에 위치해 있다. 신흥동과 중동에도 우물이 하나씩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용왕웅뎅이

1965년에 중동마을에서 만든 저수지이다. 물이 많이 나와서 무지내동 전체가 농업용수로 다 쓸 수 있었다. 760평의 대지에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만들었으며 공동재산이었다. 이 일대가 개발이 되고 논을 메우면서 없어졌다. 지금은 매립돼 야적장으로 바뀌었다.

 

돌다리

샘이 많아 항상 흐르는 물 덕분에 농사짓기 수월했다는 그 일대 논들을 샘논이라 불렀다. 물이 많아 다른 마을보다 농사짓는 형편이 좋았다고 한다. 은행동 사잇길로 흐르는 그 물길 위로 큰 돌다리가 놓았는데 그 돌다리를 일컫는다. 무지내동 417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황토재

신흥동과 능안말 사이에 있는 고개로 이곳의 흙이 황토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1987년에 고갯길을 낮추었다고 한다.

 

 

 

 * 이 글은 2014년도에 발행된 책 <과림동>중 일부분인 과림1통에 대한 이야기로 8편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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