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림동史 (1)

과림1통 이야기 - 1

최분임 | 기사입력 2018/03/27 [19:30]

과림동史 (1)

과림1통 이야기 - 1

최분임 | 입력 : 2018/03/27 [19:30]

 

    과림동을 들어서며

 

시간여행을 떠나듯 과림동으로 들어선다. 과림동으로 들어서는 일은 농경문화와 상업문화를 한꺼번에 조우하는 일이며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만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전통적이면서도 동시에 비전통적인 모습을 간직한 곳, 2013년 지금 과림동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마을을 둘러보다 보면 마주치게 되는 을씨년스러운 풍경은 오래전 마음으로 밀쳐두었던 어떤 것을 가슴 두근거리며 들춰보는 느낌과 동시에 알 수 없는 삶의 쓸쓸함 속으로 초대받은 기분이 들게 한다.

저 먼 신대륙의 인디언들은 푸른 초원을 걸을 때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누군가의 얼굴을 발로 밟고 있다고 여겼다고 한다. 그런 생각으로 한 생을 살았다고 한다. 지난 몇 개월 동안 과림동을 드나들 때마다 인디언들의 삶을 떠올렸다. 하늘과 바람 비 구름 나무 나부끼는 풀잎에게서조차 보고 듣고 배운 것을 나누며 살았던 인디언들, 네 것 내 것 따로 구분하지 않았던 그들 삶의 방식을 왜 자주 떠올렸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맨 처음 이곳 과림동에 발을 내디딘 누군가의 삶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또한 오래 전 우리가 그곳으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왔기에 아니,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가 그런 곳이었으면 하는 동경을 떨쳐내 버리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2013년 오늘 내가 걷는 과림동이 그런 순수를 간직한 곳이길, 누군가의 이상향이길 바래본다. 지난 몇 달 동안 환경과 인간 사이, 시간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답하며 과림동을 드나들었다. 어떤 이들은 역사 과정을 움직이는 행렬과 같다고 한다. 그 움직이는 행렬을 따라가며 어제의, 오늘의, 내일의 과림동을 바라보고자 한다.

 

 

 

▲ 과림동을 가로지르는 금오로     © 최분임

 

과림동의 연혁

 

과림동은 고구려 장수왕대는 매소홀면으로, 이후 진흥왕대에 이르러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으며 757년 경덕왕대에는 소성현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인종대에는 인주(경원부)로 조선시대에는 인천부 황등천면 일리, 이리, 삼리였다가 1914년부터 부천군 소래면 과림리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 후 1973년에 시흥군에 편입되었다가 1989년 시 승격 때 매화동에 편입되었으며, 1991115일자로 중림출장소로 개칭되었다. 199191일에 중림동으로 승격되었고, 199211일 현재의 과림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과림동은 1개의 행정동에 무지내동과 과림동의 2개 법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흥시의 중심부에서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과림동은 7.73전 지역이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있으며 목감천을 경계로 광명시와 접하는 농촌지역이다. 6.25 전쟁이 끝나고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불어 닥친 산업화 도시화의 물결은 지역 개발이라는 명분하에 전국의 모든 지형을 바꿔놓았다. 특히 서울을 중심으로 한 주변 도시의 모습이 가장 빠르게 변화했다. 그런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시흥시는 수도 서울의 주변 도시, 변방에 서 있는 도시라는 느낌이 강하다. 그런 시흥시의 느린 지역개발에서 또 한 발 비켜선 곳이 과림동이 아닐까 싶다. 바꿔 말하면 그만큼 옛 모습을 많이 간직한 곳, 개발 잠재력을 지닌 곳이라는 의미로도 다가온다. 또한 어떤 모습으로 개발이 이뤄져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201395일 현재 과림동 세대수는 1,365세대이며 인구는 2,522(:1,529, :993)으로 집계되고 있다.

 

▲ 목감천     © 최분임

 

과림1통 행정구역 및 인구수

법정동인 무지내동은 행정동인 과림동에서 관할하며 무지내동은 과림 1통과 2통으로 구성되어 있다. 201395일 현재 무지내동 세대수는 399, 그 중 과림1통에 속하는 세대수는 255세대, 466명이며 남자281명 여자185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 과림1통 마을회관     ©최분임

 

행정구역의 변화

무지내동은 수원과 인천을 잇는 산업도로변에 위치해 있으며 금이사거리에서 서울 및 광명시 방면으로 방향을 돌리면 약1km 정도에 위치한 경기자동차과학고등학교(.한인고교) 일대의 마을 중 <은행동><중동><신흥동><능내동> 마을을 총칭해서 무지내라고 한다.

무지내동’(茂芝內洞)은 조선시대 인천부 전반면의 칠리능내동’(七里陵內洞) ‘칠리은행동’(七里銀杏洞) ‘칠리중동’(七里中洞) ‘칠리신흥동’(七里新興洞)이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인천부 일부와 부평군이 합쳐져 부천군이 신설되면서 신현면 · 전반면 · 황등천면이 소래면으로 통합되어 부천군 소래면 무지리’(茂芝里)가 되었다. 1973년 법률 제2597호에 따라 소래면이 시흥군으로 편입되면서 시흥군 소래면 무지리가 되었다. 이후 1980년 대통령 제10050호에 따라 소래면이 읍으로 승격하면서 시흥군 소래읍 무지리로 불리게 되었다.

1988년 법률 제4050호에 따라 시흥군이 해체되고 1989년 수암면 · 군자면 · 소래읍이 합쳐져 시흥시가 신설되자 시흥시 설치조례에 따라 무지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1995년 시 조례 제423호에 의해 무지동무지내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 목감천 옆 철길     © 최분임

 

마을 명칭 유래

<조선지지자료>에 의하면 인천부 전반면의 칠리능내동’ · ‘칠리신흥동’ · ‘칠리은행동’ · ‘칠리중동을 합쳐 뭇지내’(無池川)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명 앞에 칠리가 붙었던 것은 마을 초입인 은행동에서 능내동까지의 거리가 7리가 되므로 마을 이름을 칠리라 하였다는 기록에 대해 마을 사람들은 그 거리는 겨우 1km 정도 밖에 안 되므로 맞지 않다고 했다. 칠리제 저수지에서 능내동까지의 거리가 7리가 되므로 그렇게 불렀다는 설이 존재하며, 칠리 즉 일곱 개 마을(신흥동· 은행동· 중동· 방죽머리· 능내동 ·토란골· 육골)1, 2, 3리 등으로 부르면서 칠리를 붙였다는 설이 존재한다.

뭇지내’(無池川)라는 지명 또한 못()과 내()가 없는() 마을이므로 뭇지내라 불리다 음이 같은 무지리로 칭한 것이라는 설, ‘무지내’(茂芝內) 곧 지초가 무성히 자라는 냇가 마을이어서 무지리라 칭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또 목감천 주변으로(갈대)가 이 많아서 무지내라고 불렀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마을 근처에 목감천이 있어 못()과 내()가 없는() 마을이라는 설은 맞지 않다는 의견도 있었다.

 

▲   마을 풍경  © 최분임

 

과림1통 입지 여건 및 특성

과림1(은행동, 중동, 신흥동)은 수인산업도로 인천에서 수원 방향의 금이사거리에서 과림동쪽 경기자동차과학고를 포함 2차선 도로 좌우에 길게 분포되어 있는 마을이다. 또한 오랜 세월동안 마을을 묵묵히 지켜봤을 목감천이 마을과 같이 길게 흐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과림동을 통과하는 목감천은 시흥시에서 발원하는 하천 중에서 유로가 가장 길다. 시흥시 남동부인 목감동과 안양시의 경계를 이루는 산지 능선부에서 발원하여 북류하면서 광명시와의 경계를 이루며 흐르다가 광명시 철산동에서 안양천에 합류된다. 목감천의 전체 유로 길이는 15.5이며, 유역분지의 면적은 57.16이지만 행정구역상 시흥시에 속하는 구간은 약3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전통적 농촌마을이었던 이곳의 모습이 달라진 때는 1980년대부터다. 서울 지역에 있던 공장지대가 아파트 신축 등으로 개발되면서 중소기업체와 자영업자들이 서울과 인접한 과림동, 무지내동으로 몰리면서 소규모 공장지대로 변모하였다. 또한 서울 인천 수원 등 대도시에 인접해 있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하여 한때근교 농업이 발달했으며 포도 복숭아와 같은 과수단지, 목우단지, 화훼단지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부 주민들이 축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논농사며 밭농사를 짓고 있는 주민들도 있다. 소규모 공장들이 들어서면서부터 외지인들이 원주민보다 많은 세대수를 이루고 있다.

2013년 현재 과림1통 세대수는 255세대이고 이 중 원주민 세대 수는 대략 80여 세대이며 나머지는 공장을 임대한 임차인 및 새로 이주해 들어온 세대들이다. 원주민들 중 농협 조합원이 65명이며 대부분 원주민들은 소규모 공장주들에게 건물을 임대해주고 있다. 주로 금형 사출이나 프레스 가공 등 임가공 공장들이다.

인접한 광명시와 서울 오류동, 개봉동 등을 생활권으로 삼고 있다. 지금은 온전한 농촌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도로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여전히 전통적인 농촌의 모습을 만날 수 있으며 전통과 새로움의 조화를 위해 고민하는 곳, 과림1통이다.

 

▲   마을 풍경 © 최분임

 

과림1통 마을 조직도

통장: 박완준(1955년생.무지내동 353-1번지)

노인회장: 이웅수((1938년생. 무지내동 273-5번지)

노인회 총무: 김광웅(1940년생)

새마을지도자(과림동새마을동협의회장): 김근환(1962년생. 무지내동 215번지)

영농회장: 통장이 겸직

청년회장: 김태호(1947년생)

 

*이 책이 나오기 직전 노인회장 이웅수씨가 돌아가시고 새로 김연규(1947년생)씨가 선출되었다.

 

 

  * 이 글은 2014년도에 발행된 <과림동史 > 중 일부분인 과림1통에 대한 이야기로 2편에 계속 이어집니다.

 

최영숙 18/03/28 [00:11] 수정 삭제  
  최분임 선생님 고맙습니다. 를 통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흥의 역사를 더욱 자세하게 볼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주셔서요. 깊은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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