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구 선생의 '가짐 없는 큰 자유'를 만나다

-제정구 선생 15주기 추모 묘소참배 및 추모기행

최영숙 | 기사입력 2014/02/12 [10:39]

제정구 선생의 '가짐 없는 큰 자유'를 만나다

-제정구 선생 15주기 추모 묘소참배 및 추모기행

최영숙 | 입력 : 2014/02/12 [10:39]
▲ 경남 고성군 대가면 척정리 척곡마을 제정구 선생 묘소로 가는 대숲 길     ©최영숙


지난 8~9일 제정구 선생 15주기 추모 묘소참배 및 추모기행을 다녀왔다. 

제정구(1944~1999) 선생은 경남 고성 출신으로 판자촌에서 빈민운동과 노동운동을 하였으며 주로 빈민 권익 운동을 했다. 서울특별시 목동·상계동 등지의 강제철거 대상 빈민촌에서 빈민운동을 주도해 '철거민의 대부'라는 이름을 얻었다.

 “1976년 2월 11일. 입춘은 지났지만 아직 겨울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추운 날이었다. 이 소박한 사랑방에 이름을 붙이기 위한 작은 미사가 열렸는데 이 미사에서 김수환 추기경님이 ‘복음자리’라는 이름을 붙여주셨다. 이 사랑방을 중심으로 우리는 어느덧 양평동 사람이 되어갔고 이 인연은 1977년 4월 철거를 당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집단 이주할 장소로는 지금의 신천동으로 정했다. 한때는 봄이면 복사꽃이 만발하고 여름이면 탐스런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영글어가던 곳에 과일나무를 베어낸 자리에다 서울시청에서 빌려온 비상천막을 세운 것이 1977년 4월11일이었다.”

-가짐 없는 큰 자유에서-

제정구 선생은 시흥과 인연을 맺었다. 그 후 1986년에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1992년 14대 총선과 1996년 15대 총선에서 (시흥·군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98년 암진단을 받고 1999년 2월 9일 별세했다.

▲ 제정구 선생의 맏딸이 잔을 올리다     ©최영숙



제정구 선생 15주기 추모행사에는 시흥과 서울에서 버스 3대가 출발했다. 오전 7시 30분 출발한 버스는 오후 2시 경 경남 고성군 대가면 척정리 척곡마을 제정구 선생 묘소에 도착했다. 이학렬 고성군수와  최원식 국회의원을 비롯 고성의 각계각층의 군민들과 시흥과 서울에서 참석한 300여명의 추모객들이 참석했다.

 

▲ 제정구 선생 제 15주기 묘소 참배가 끝나고 음식을 나눠먹다     ©최영숙



추모사를 통해 이학렬 고성군수 “그동안 선생님의 뜻을 받들려고 했습니다. 항상 잊지 않고 선생님을 배울 것입니다.”고 했다. 

 제정구 선생의 후배 이병철 씨는 “선생님을 15년 전에 여기 묻을 때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미 해가 저물었는데 마을에서 전깃불을 가져다주던 그날이 떠오릅니다. 민청학련 때 구치소에 같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매일 요가를 하며  몸을 바르게 하는데 한순간도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수행인이었고 종교인이었습니다. 제정구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 스스로 가슴을 열어서 우리가 정말 원하는 삶을 먼저 살아가는 것이 지금 제정구가 우리를 불러 모으는 힘입니다. 작은 제정구가 아니라 제정구를 넘어서 제정구가 이루지 못한 꿈들을 우리의 열린 가슴으로  이루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다.

제정구 선생과 동서지간인 최원식 국회의원은 “형님을 묻고 올라오면서 형님이 올곧은 것은 고성의 이런 기운들과 대나무 숲의 저 아름다운 솟구침이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라며 "이 자리를 준비해주신 고성의 지역분들과 먼 길을 와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고 인사를 했다.

 

▲ 제정구 선생 15주기 추모시를 고성문인협회장 백순금 시인이 낭송하다     ©최영숙



고성문인협회장 백순금 시인이 추모시를 낭송했다.

제정구 선생 15주기 추모시

-백순금


유수와 같다던 세월이 흘러
당신을 떠나보낸 지 어언 15주기를 맞아
무언으로 남겨주신 그 불씨 하나로
우리는 세상을 달구려 합니다.

세상을 같이 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잡초임을 깨닫는 성찰의 길이라고
생명은 혼자가 아니라, 언제나 함께라고 외치시던
시흥의 달동네에는
당신의 혼이 숨 쉬고 있습니다.

깊은 강은 조용히 흐르는 법이라며
당신의 몸부터 낮추시고
철거민의 아픔에 처절하게 몸부림 치셨던 분
청계천 판자촌에는
당신의 목소리가 물 따라 흐르고 있습니다.

그늘 속에 갇힌 빈민촌을 구제하기 위해
진정한 생명의 눈으로 관찰하시어
사람중심, 생명 중심을 부르짖으며
언 살을 뚝 뚝 잘라 나누어 주시던
당신의 마음을 이제야 깨우칩니다. 

가짐 없는 자의 큰 자유를 위해
빈민구제를 끊임없이 추구하시던 당신의 뜻을
우리는 뜨겁게 간직하고자 합니다.

당신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었던 건
판자촌의 다 패인 마루바닥을 잡동사니 나무로
모자이크처럼 만들어 준 것 뿐,
그것조차 과분하게 여기시던 당신은 가셨지만
우리는 그 마음을 영원히 기억하려 합니다.

자신을 불사르는 한 자루 양초가 되어
아름다운 심지로 타올라
자신의 영혼을 불태워 주위를 밝히듯이
당신은 우리들 가슴속으로 녹아 흐르는
영원한 지줏대로 남아 있습니다.

당신의 영혼과
그 마음을 함께하는 우리들의 만남이
천리길을 달려오는 이음줄 되어
길이길이 온 누리에 이어지소서.
이제는 편안하게 영면하시옵소서. 

▲ 제1회 제정구상 수상자들이 제정구 선생 무덤 앞에서 사진을 담다     ©최영숙


제1회 제정구 상을 수상한 태국의 애크(Ake)와 제프(Jeff) 씨가 함께 했다. 

 신명자 여사는 “태국에서 열심히 빈민운동을 하는 애크와 제프 씨는 눈에 띄지 않게 일을 하면서도 주민들이 자신들의 일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깨어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분들이17일 동안 투쟁하면서 정부위원회랑 협의를 해나가면서 한가지 씩 일을 해결해 나가는 것에 놀라웠다”고 했다.

 신병현(78)고문은 "인간적이었던 제정구 선생의 모습이 떠오른다"라며 "단오제 때 국회의원이던 제정구 선생이 여자 옷을 입고 탈을 쓰고 주민들과 함께 어울려 노시던 모습이 생각난다"라며 추억을 얘기했다. 많은 사람들이 제정구 선생과의 추억을 이야기 했다.

추모식이 끝나고 부여 숙소에 도착했다. 

▲ 유홍준 교수와 함께 떠나는 부여문화유산 여행으로 정림사지를 찾아 유홍준교수에게 설명을 듣다     ©최영숙


식사가 끝나고 유홍준 교수의 부여문화유산이야기를 들었다.

유홍준 교수는 백제의 예술을 한 마디로 하면 '검이불루 화이불치'라고 했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백제 제1대 시조 온조왕(始祖 溫祚王 B.C18~28 재위기간 45년) 15년 봄 정월, 새 궁실을 지었다. 궁실은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았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 때 궁실을 지으면서 이미 백제의 아름다움을 만들었던 것이다.

다음 날 유홍준 교수의 안내로 국보 제 9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만났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웠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 놓았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 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는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세련되었다. 초층탑신(初層塔身) 4면에는 당(唐)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멸한 다음 그 기공문(紀功文)을 새겨 넣었으나 이는 탑이 건립된 훨씬 뒤의 일이다. 초층탑신에 새겨진 비문을 줄여서 당평제비라고 부르기도 한다. 혹은 백제를 정벌했던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의 공을 기록했다 하여 소정방비라고도 부른다. 능주장사 판병부에 있던 하수량이 글을 짓고 하남사람 권회소가 글씨를 썼다. 비문의 제목은 전서로 새겨져 있다. 비문에 따르면 의자왕, 태자융, 효, 인 및 대신과 장군 88인, 백성 12,807명을 당나라의 수도 낙양으로 압송하였다고 한다.



▲ 무량사에 있는 매월당 김시습 영정     ©최영숙



무량사로 왔다. 무량사 우화궁 주련에는 진묵대사와 설잠 스님의 시가 함께 걸려 있었다.

事業一爐香火足 사업일로향화족   사업은 향 사를 향로 하나면 족하고,
生涯三尺短筇贏 생애삼척단공영   생애는 세척의 짧은 대지팡이로도 넘친다.
鍾聲半雜風聲冷 종성반잡풍성랭   종소리는 바람결에 묻혀 시원하고
夜色全分月色明 야색전분월색명    밤빛은 달빛과 더불어 밝구나.
天衾地席山爲枕 천금지석산위침    하늘은 이불이요 땅은 자리이니 산을 베게 삼고
月燭雲屛海作樽 월촉운병해작준    달 촛불 밝히고 구름 병풍에 바닷물로 술을 담아
大醉居然仍起舞 대취거연잉기무    크게 취하여 문득 일어나 춤을 추자니
却嫌長袖掛崑崙 각혐장수괘곤륜    긴 소매에 곤륜산이 걸리적거리는구나!
靜邀山月歸禪室 정요산월귀선실    산 위에 달 조용하니 선방을 쓸고
閑剪江雲袍納衣 한전강운포납의    강가의 구름을 잘라 납의에 솜을 누비노라.

무량사에는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 쓴 생육신인 매월당 김시습의 영정과 부도탑이 있었다. 김시습은 5세에 대학과 중용에 능했다고 한다. 신동으로 이름이 높아 세종대왕이 김시습을 불러 시문을 시험해 본 뒤 그의 재능을 아끼며 ‘오세’라고 했다.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법명을 설잠이라 하고 전국을 떠돌았다.

한명회의 시를 보고

靑春扶社稷(청춘부사직) / 젊어서는 사직을 붙잡고
白首臥江湖(백수와강호) / 늙어서는 강호에 묻힌다.

김시습이 다음과 같이 고쳤다.

靑春亡社稷(청춘망사직) / 젊어서는 나라를 망치고
白首汚江湖(백수욕강호) / 늙어서는 세상을 더럽힌다.


 선조는 이율곡을 시켜 김시습전을 쓰게 했다.

“신이 삼가 살피건대, 사람이 천지의 기운을 타고나면서 청․탁(淸濁)과 후․박(厚薄)이 고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과 배워서 아는 사람의 구별이 있으니, 이것은 의리로써 하는 말입니다. 시습 같은 사람은 문장에 있어서 천득(天得)이라고 하겠으니, 문장에도 또한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으로 미친 척하면서 세상을 도피하였으니, 그 숨은 뜻은 가상하지만, 명분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당연히 제 마음대로 놀아난 것은 어찌된 까닭이겠습니까. 빛과 그림자를 감추어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김시습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게만 했더라도 이렇게 답답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 사람을 생각할 때 재주가 그릇 밖으로 흘러 넘쳐서 스스로 가누지 못할 만큼 되었으니, 그가 받은 기운이 가볍고 맑은 쪽으로는 넉넉하면서도 두텁고 무거운 쪽으로는 모자라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비록 그렇다 하나, 그의 의(義)를 내세우고 윤기(倫紀)를 붙들었으니, 그의 뜻은 해나 달과도 그 빛을 다투었고 그의 풍모를 듣는 이들은 겁쟁이라도 또한 용감하게 일어섰습니다. 그를 일러서「백세의 스승」이라고 하더라도 진실에 가까울 것입니다. 안타까워라. 시습이 지닌 영특하고도 날카로운 자질로써 학문의 공과 실천의 덕을 갈고 닦았더라면, 그가 이룬 업적을 어찌 헤아리겠습니까.
아아, 그의 준열한 얼굴은 기휘(忌諱)에 저촉되는 일이 많았고, 재상들을 꾸짖고 매도한 적이 수없이 많았지만, 당시에는 그에게 시비를 건 자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우리 선왕(先王)의 성덕과 훌륭한 재상의 넓은 아량을 선비의 언론이 공손해지게 만든 말세와 비교해 볼 때, 그 득실이 과연 어떠합니까.“ 고 했다.

유홍준 교수는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일반상식들을 뒤집었다. 이율곡선생의 김시습전을 이야기 하면서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이율곡 선생의 김시습전이 수록되어야 한다고 했다. 무량사 한 곳만 가지고도 몇 권의 버전이 다른 책들이 나올 듯했다. 


▲ 제정구 선생 15주기 추모참배가 끝나고 다음날 유홍준교수의 부여문화유산 답사지로 무량사에 들렀다. 이곳에서 단체 사진을 담다     ©최영숙


공주박물관을 마지막으로 시흥으로 출발했다.

제정구 선생 15주기 추모 행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15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행사를 참가하는 것은 ‘가짐 없는 큰 자유’ 를 가졌던 제정구의 삶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반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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