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곡동의 송덕비, 그것이 알고 싶다!

심우일 | 기사입력 2014/03/04 [19:57]

능곡동의 송덕비, 그것이 알고 싶다!

심우일 | 입력 : 2014/03/04 [19:57]
▲시흥시 능곡동 영모재 공원에 세워져 있는 낭정호 송덕비     © 심우일

시흥시 능곡동 617번지 영모재 공원 내에 2기의 비석이 서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낭정호 송덕비다. 송덕비는 시흥능곡 택지개발이 되기 전 자연 마을인 삼거리 마을에 위치해 있었다.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방치되다시피 했던 비석을 김규성 씨 등 뜻있는 마을 주민들의 보호로 이곳으로 이전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그동안 송덕비에 대한 실체가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본 원고를 통해 낭정호 송덕비의 면모를 밝히는 바이다. 

1. 송덕비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이 담긴 비석을 말한다. 일명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유애비(遺愛碑), 애민비(愛民碑), 선정비(善政碑라)고도 부른다. 일반적으로 백성들을 위해 정사를 베푼 관리를 위해 이런 종류의 비석을 세운다. 하지만 일정한 지역에서 지역민을 위해 헌신과 봉사를 한 유지급 인사들의 공덕을 찬양하는 비석도 많다. 낭정호 송덕비는 성격상 후자에 해당된다.

2. 송덕비 위치
송덕비는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곳에 위치해야 널리 홍보가 된다. 이런 까닭으로 교통의 요지, 장터 등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 세웠다. 1932년에 건립된 낭정호 송덕비도 장터에 있었다. 이 장터는 1916년 이전부터 존재했던 삼거리장(三距里場)이다. 지금의 시흥시 능곡동 삼거리 마을 일대다. 이곳에서 5일마다 한 번씩 정기적으로 장이 섰고 그 중심에 송덕비가 소재하였다.

3. 송덕비 비문

가. 송덕비 앞면

낭공정호 송덕비(浪公定鎬 頌德碑)
유아낭공(唯我浪公) 춘경추렴(春耕秋斂)
금세활불(今世活佛) 보급주휼(補給周恤)
소작세민(小作細民) 만구공송(萬口共頌)
영보구명(永保軀命) 재차명비(載此銘碑)

나. 송덕비 뒷면

소화칠년십이월일(昭和七年十二月日)

다. 번역문

낭정호 송덕비
오직 우리 낭공만이 봄에 밭 갈고 가을에 거두시네
현세에 살아있는 부처님같이 도와주시고 두루 구휼해주시네
소작하는 영세민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시네
영원히 몸과 목숨을 보전하시기를 바라며 이 비문에 싣노라
소화7년(1932년 12월) 12월

 
4. 낭정호 송덕비 건립 관련 신문 기사 내용
1932년 12월 8일 매일신보에 낭정호 송덕비 건립에 관한 기사가 실린다. 경성부 다옥정 74번지(지금의 서울시 중구 다동으로서 서울시청 동북쪽 일대)에 거주하였던 낭정호씨 관련이다.
 
기사가 작성되기 34년 전인 1898년경부터 시흥군 수암면 능곡리(지금의 시흥시 능곡동 및 장현동 일대)에 갖고 있던 토지 17석두락(약 3만 4천평)의 소작인들에게 곡식의 종자를 무료로 배부하고, 소작료 운반비를 스스로 부담하는 선행을 하였다. 이에 감격한 38명의 소작인들이 소작으로 하는 논과 밭의 1두락(200평)당 50전씩 갹출해서 송덕비를 건립한다는 내용이다. 아래는 구체적인 신문기사 내용이다.

 

▲매일신보에 게재된 낭정호 송덕비 관련 기사     © 심우일


제목:낭지주의 독지(소작인이 송덕비 건설)
(영등포)경성부 다옥정(茶屋町) 74번지 낭정호(浪定鎬)씨는 거금삼십사년전부터 시흥군 수암면 능곡리 소재토지 십칠석두락의 소작인들에게 매년 궁춘(窮春)에 일으러 종곡(種穀)을 무료배부할뿐안이라 소작료의 운반비를 자담(自擔)하야왓슴으로 그 소작인들은 항상 낭지주의 독지에 만흔 칭송을 하야오든바 금반 시흥군 군자면 장현리 권희(權憘)외 삼심칠명의 소작인들은 그 소작전답 일두락에 대해하야 금오십전식을 갹출하야 낭지주의 송덕비를 건설중이라 한다.

5. 낭정호는 누구인가?
출생과 사망, 그리고 그의 삶의 여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일부 기록에 남아 있는 내용을 토대로 대략적인 삶의 궤적을 짐작 해 볼 수는 있다.

우선 그는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중반 경까지 살았던 인물로 보인다. 황성신문 1908년 05월 07일에는 ‘해동졸업(海東卒業)’이라는 기사 제목 아래 “私立海東新塾에셔 第一回卒業試驗을 經얏英語科에崔榮德玄鼎健朴宗薰浪定鎬韓弻求閔泳珍六人이오 日語科에 白俊基崔鳴宇韓柄敎三人이오 進級生에李獻春等諸人이라더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여기에 영어과 졸업생 중의 한 명으로 낭정호가 등장한다. 그가 다닌 학교는 황해도 해주에 있던 근대식 사립교육기관인 해동학교임을 볼 때, 낭정호는 황해도 해주 지방 출신으로 추측된다. 아울러 영어과 졸업생으로 영어 구사능력이 뛰어났을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근대 문물을 빨리 받아 들이면서 사업을 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행회사요록(朝鮮銀行會社要錄) 1925년판에 피혁 제품의 원료와 그 부속품을 판매하는 회사인 유풍상회(裕豊商會(合資))의 사장으로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합자회사였던 유풍상회는 1925년 6월 28일에 설립되었고, 경성부 황금정 1정목 181-3번지(지금의 서울시 중구 을지로 일대)에 회사의 본점을 두고 경영을 해 나갔다.
 
이후 회사 경영을 통해 축전된 부를 기반으로, 한편으로는 시흥 능곡동 일대 등과 같은 토지를 사들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다양한 사회적 나눔 활동을 전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의 신문기사 내용들은 낭정호의 기부 활동에 관한 것으로 그의 나눔 활동의 일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낭정호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시흥 능곡동 일대의 전답 소작인들에게도 덕을 베풀었으며, 이에 소작인들은 감사의 뜻으로 송덕비를 건립하였다고 할 수 있다.

■ 浪定鎬 二元 (在桑港遭難同胞의 救恤金廣告-1906년 5월 12일-대한매일신보)
재샌프란시스코에서 조난을 당한 동포에 대한 구휼금으로 2원을 기부했다는 내용

■ 浪定鎬 一元 (國債報償義捐金收入廣告-1907년 6월 22일-대한매일신보)
국채보상의연금 수입으로 1원을 기부했다는 내용

■ 浪定鎬 五圓(水災同情金-1925년 8월 27일-동아일보)
수재 의연금으로 5원을 기부했다는 내용

■ 一金一圓也(일금일원야) 市內茶屋町(시내다옥정) 浪定鎬(낭정호)(忠武公遺蹟保存問題로 追慕의 結晶體誠金遝至(결정체성금답지)-1931년 8월 22일-동아일보)
다옥정에 사는 낭정호씨가 충무공 유적보존을 위한 성금으로 1원을 기부했다는 내용

■ 浪定鎬 一圓(救濟金遝至-1928년 9월 20일-동아일보)
구제금으로 1원을 기부했다는 내용
 

<이 기사는 시흥문화 16권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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