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낭소리의 추억 - 신천동 [뱀내장터] 마을

심우일 | 기사입력 2009/05/17 [23:01]

워낭소리의 추억 - 신천동 [뱀내장터] 마을

심우일 | 입력 : 2009/05/17 [23:01]

연한 녹색의 자연이 내뿜는 아카시 향기는 바쁜 도시민에게 대화의 주제를 감칠 맛나게 한다. 시흥시청에서 소래산 쪽으로 향한다. 얼마 전까지 만해도 활짝 피었던 벚꽃은 지고 나뭇가지만 무성하다. 나무틈새로 얼핏얼핏 보이는 덤프트럭과 황토 빛 흙 줄기가 길게 뻗어있다. 제3경인고속국도 현장이다. 소래고등학교를 지나면서 42번 산업도로를 만난다. 대우4차 아파트가 우뚝 솟아있다. 부우웅~ 도로에는 차들로 만원이다. 신천성당 앞을 지나자 도심의 혼잡함이 밀려온다. 신천 사거리와 삼미시장 입구 일대는 번화가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시흥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여기저기 나붙었던 대형 현수막들은 찾아 볼 수 없다. 신천 삼거리. 그곳에서 부천 방향으로 돌린다. 구도심이다. ‘문화의 거리’라고 부르는 곳이다. 주정차한 차들 사이로 삼삼오오 짝을 이룬 사람들이 거닌다. 멀리 소래농협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옛날에 쇠장이 서던 곳이다. 지금은 구획정리가 되고 도시화되어 자연 부락을 찾아 볼 수 없지만 신천 삼거리와 소래농협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뱀내장터]라고 불렀다.

▲ [뱀내장터]가 있던 신천동 마을의 농협 표지석     © 심우일


■ 마을 이름 유래

[뱀내장터]는 토박이 말이다. 무슨 뜻일까? [뱀내]는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생긴 모양의 냇가>요, [장터]는 <시장이 서는 장소>라는 의미다. 즉, [뱀내장터]는 ‘뱀처럼 구불구불한 하천 주변에 서던 장터’가 되겠다. 따라서 지금은 도시화되어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지만 지명만으로라도 옛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하천이 흐르고 그 주변에 시장이 서서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며 물물교환을 하는 모습. 이런 [뱀내장터]를 한자로 표기했다. [뱀]은 [사 蛇], [내]는 [천 川]으로 하여 [사천 蛇川]이라고 했으며, [사천 蛇川]뒤에 [장터]를 뜻하는 [장 場]을 덧붙여 [사천장 蛇川場]으로 통칭했다.

▲ 장터 이름의 유래가 된 [뱀내] 하천, 지금은 [신천]이라고 부름     © 심우일


■ 소래산 이야기

소래산은 인천부의 진산이다. 진산(鎭山)은 어느 특정 지역의 주산(主山)개념으로 그 지역민의 숭배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소래산도 예나 지금이나 마을 주민들에게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역사적으로 볼 때, 1231년(고종18년)부터 1254년(고종41년) 6차례에 걸친 30여 년간 몽고의 침입에 맞서 고려는 처절한 사투를 벌인다. 그런 대몽 항쟁중의 한 곳이 소래산이다.

『高麗史』권24 세가24 고종43년 4월의「경진(庚辰)에 대부도(大府島)의 별초(別抄)가 밤에 인주(仁州;인천) 근처의 소래산(蘇來山) 아래에 나아가 몽고 병사 1백여 인을 격파하여 도망가게 했다.」라는 기록을 통해 당시의 생생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대몽 승전지로서 민족의 운명, 그리고 지역민과 함께 해왔던 소래산에 왜정 시대에는 명산의 지기를 끊는다는 명목으로 소래산의 혈자리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이야기도 전해내려 온다.

평일은 물론 주말이면 시흥은 물론 인근 지역 사람들의 산행으로 몸살을 앓을 정도인 소래산. 시대는 흘러도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으니 기분은 좋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가 소래산을 보다듬어야 할 책임도 더욱 크다고 할 것이다.

▲ 신천동 [용해부리]에서 본 [소래산]의 모습     © 심우일


■ 워낭소리 들리던 뱀내장터

장터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왕래를 하고 이에 따라 이야기 꺼리가 많다. 그렇기에 시장은 상품 매매의 장이자 소통의 장이 되기도 한다. 뱀내장(蛇川場)은 쇠장(牛市場)으로 유명했다. 1일과 6일에 열리는 5일 정기시장으로서 소를 주로 거래하였다.

뱀내장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은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770년에 발행된 『동국문헌비고』에 보면, 인천의 향시(鄕市)로 사천(蛇川)이 거론되고 있다. 이 사천(蛇川)이 뱀내장터이다. 쇠장 주변에는 국밥과 막걸리를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고 장터에 진열된 각종 물품은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당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뱀내장터는 처음에는 지금의 소래산 기슭의 하연(河演) 선생 산소 앞에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중에 지금의 소래농협과 소래농협 남쪽 일대로 옮겨졌다가 CGV 남서쪽으로 온지 5년여 만에 폐시가 되었다. 명맥을 유지하던 쇠장도 도시화에 따라 80년대 중후반의 신천1지구 토지구획 정리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더 이상 존속할 수 가 없었다. 다만 “장터에서는 씨름을 했었지. 뿐만 아니라 아카시 나무가 있어 단오 때면 거기에 그네를 달아서 뛰었어!” 라고 말씀하시는 안태호(73세) 할아버지의 추억만이 존재할 뿐이다. 지금은 뱀내장터라는 정기 시장은 사라지고 자연 발생적으로 1980년대 후반부터 형성된 삼미시장(三美市場)이 새로운 재래시장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 [뱀내장터]의 중심지였던 지금의 [소래농업협동조합] 자리     © 심우일


■ 공공기관 3곳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조선에 대한 통치 정책이 문화정치로 바뀐다. 이런 상황과 더불어 한국인들의 교육열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학교 설립이 필요하게 된다. 뱀내장터와 그 주변 마을 유지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기부금을 모았다. 당시 돈으로 4천원이나 되는 큰돈이 모금되었다. 이 돈을 바탕으로 1920년 3월16일 소래공립보통학교 설립인가를 받는다. 재목도 기부 받고 지역 주민들이 자녀 교육을 위해서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고 부역에 동참하였다. 드디어 기와집으로 된 건물을 완성하여 개교하였다. [소래초등학교]이다. 우리 지역 학교 교육의 출발이었다. 벌써 90여년의 역사가 되었다. 

1920년대 일제는 산미증산계획을 수립하여 적극 실행했다. 목적은 한국내 쌀의 안정적 확보와 이를 바탕으로 한국이 일본의 식량공급지 역할을 궁극적으로 수행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저수지 건설을 통한 토지개량사업이었다. 1920년대 중후반부터 전국적으로 저수지 건설에 따른 수리조합 결성이 현저하게 증가하였다. [소래수리조합]도 1929년 5월30일에 허가를 받아 설치된다. 은행천 주변의 [호조벌]에 농업용수가 공급되기 시작했다. 안현동, 계수동, 미산동 주민들은 모내기 철에 한숨을 덜게 되었다. 어느덧 은행단지 옆에 위치한 소래저수지는 농업용수 제공의 저수지에서 낚시터로 변모해가고 있다. 

1910년 10월 1일 ‘면에 관한 규정’이 제정되어 면의 지위를 확정했다. 중요한 사항은 면장의 임명제였다. 식민 지배 권력을 최소 지방 단위에서 효율적으로 집행될 수 있도록 체제를 구축한 것이었다. [소래면사무소]가 설치되었다. 과연 소래면사무소는 시흥의 어느 곳에 위치했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뱀내장터인 신천리(新川里)로 알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정답은 아니다. 소래면의 최초 면사무소는 터는 과거에 소래면이었던 지금의 부천시 소사구 옥길동이다. 1916년 5월5일 면사무소 위치를 변경하는 허가를 받게 되어 옥길동에서 지금의 신천동으로 이전하게 된다. 실질적인 소래면의 중심지로 뱀내장터 마을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 지역민의 희망을 담았던 [소래초등학교] 모습     © 심우일


■ 장터 사람들은

부천역까지 주로 걸어갔다. 서울로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어둠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새벽에 집을 떠났다. 목탄차와 전차를 타기도 하였다. 지각하기 일쑤다. 공부하기보다는 학교 다니기 급급한 시절이었다.

마을 앞의 [생매산] 기슭에는 대우통신, 국제상사, 광덕물산 등 우리 귀에도 익숙한 대기업체들이 존재했었다. 마을 사람 중에는 이곳에 취직하여 생계를 도모하는 사람도 있었다. 김춘선(67세) 할아버지는 “이 업체들의 직원이 얼마나 많았는지 퇴근 시간이 되면 뱀내 장터 길이 꽉 찰 정도였어.”라며 당시의 번화했던 모습을 일러주신다.

뱀내장터에는 유명한 음식점이 있었다. [금천옥]이다. 이곳의 설렁탕과 김치 맛은 일품이었다. 그 맛이 얼마나 독특했는지 서울에 사는 사람들도 일부러 음식 맛을 보기 위해 찾아 오곤 하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얼마 전 문을 닫고 간판만 외롭게 가게 입구에 걸려있다. 더 이상 장터에서의 손맛을 찾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 뱀내장터의 마지막 국밥집이었던 [금천옥] 간판     © 심우일


■ 2009년이 있기까지

1983년 신천1지구 토지구획 정리가 시작되면서 장터 마을은 도시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반듯하게 길이 나고 새롭게 단장한 건물들이 들어선다. 쇠장으로 유명했던 뱀내장터도 생매산 아래의 한 구석으로 밀려나 1987년 폐시의 운명을 맞는다. 소래면소재지의 중심에 있던 마을은 1980년부터는 소래읍, 1989년에는 시흥시의 중심지로 거듭난다. 하지만 인근에 1992년 말부터 은행지구 아파트 단지 공사가 시작되어 새 도시가 조성되고, 결정적으로 1997년에 시흥시 청사가 연성지구인 장현동으로 옮겨지면서 구도심으로 변모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 옛날 신천 삼거리였던 현재의 [문화의 거리] 모습, 이곳이 뱀내장터 마을이었음     © 심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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